옛날 어떤 사람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사슴이 한 마리 나타났다. 나무꾼은 사슴을 잡으려고 작대기를 들고 사슴의 뒤를 좇았다. 사슴은 자꾸만 달아나다가 해질 무렵 어느 굴속으로 들어갔다. 나무꾼은 기어코 사슴을 잡을 욕심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굴속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찾으려 했으나 전혀 찾을 길이 없었는데 이것이 청학동에 얽힌 전설이다.
그 곳엔 아직도 상투 틀고 한복 입은 채 문명과 등져 사는 도인들이 살고 있단다. 이 쪽 산에서 저 쪽 산으로 훨훨 날아다니기도 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대한 외지 사람들의 환상이다. 그래서 벼르고 별러 기대를 갖고 청학동을 찾아간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실망을 안고 돌아선다.
에이 청학동이 뭐가 이래? 청학동이 변했다며 시답잖게 여길 정도로 그 옛날의 청학동이미지가 아니다. 지리산 중턱의 산중마을인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해발 830m 넘는 곳에 자리 잡은 청학동은 1910년경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정감록을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기를 시작하면서 터를 일군 곳이다.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라는 긴 이름의 종교를 믿는 도인들이 환난을 피해 6·25 직후에 들어와 터를 닦았다. 그러나 그 이전 수백 년 전부터 청학동에 터를 잡고 살았던 원주민들이 있었다.
일명 도인촌(道人村)이라 불리는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흰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고 양식은 산을 개간해 자급자족했으며 약초를 캐어 하동장터에 내다팔아 그 돈으로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만을 구입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청학동마을은 본래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청학동으로 굳어졌다. 경남하동의 지리산 청학동은 1970년대 초까지 외부와 교류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골짜기가 깊고 삼신봉의 높다란 능선이 사방을 에워싸 접근조차 어려웠다.
이곳을 1972년경 매스컴에서 우리가 예로부터 찾던 이상향 지리산 청학동이라 보도한 것이 당시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자 구경꾼이 하나 둘씩 청학동을 찾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불기 시작한 관광바람은 이러한 천년피난처를 그냥 두지 않았다.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초가지붕 위엔 TV안테나가 서고 전화가 놓이고 여러 문화시설들이 갖춰졌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 청학동은 청학(靑鶴)을 타고 다니는 지상낙원?
청학동은 한국 남부에 위치하는 지리산 깊은 산 속의 해발 850미터 정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청학동은 한국인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명이다. 청학동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천 년 전인 신라시대이고 후에도 여러 문헌에서 청학동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다.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鳥)다. 그래서 청학이 사는 곳을 청학동이라 하고 이곳을 신선의 고장이라 한다. 신선이 푸른 학인 청학(靑鶴)을 타고 다니는 지상의 낙원으로 세속의 어떤 혼란과도 무관하며 이곳에서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신선(神仙)이 된다는 전설의 마을이다.
그러나 청학동이 어디인지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지금의 청학동이 전설에 등장하는 그곳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리산을 두류산(頭留山)이라고 했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일어나서 꽃봉오리처럼 그 봉우리와 골짜기가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야 수 천리를 서리고 얽혀서 그 테두리는 무려 십여 고을에 뻗치었기에 달포를 돌아다녀야 대강 살필 수 있는 산이다.
옛 선조들의 전하는 말로는 그 속에 청학동(靑鶴洞)이 있는데 길이 매우 협착하여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십 리를 가서야 허광(虛曠)한 경지가 전개된다. 거기엔 모두 양전옥토(良田沃土)가 널려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나 거기엔 청학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대개 여기엔 옛날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살았기에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가시덤불에 싸여 남아 있다고 전한다.
◆ 청학동은 정감록에 진주서쪽 100리 지리산 남쪽에 있다고?
정감록에는 청학동은 진주서쪽 100리 지리산 남쪽에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폭포가 있고 이를 지나면 석문이 나오는데 물 속 동굴을 따라 기어서 10리 쯤 들어가면 주위가 약 40여리 되는 넓고 평탄한 지역이 펼쳐지는데 그 안에서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다.
그곳에는 신선이 노닐 만한 별천지로서 청학이 노닐 수 있는 학연(鶴淵)이 있다. 돌샘(石井)에서는 약수가 넘치고 마을 뒤쪽에는 삼신봉(三神峯)이 구름위로 높이 솟았다. 깎아지른 암석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해바위(日石)와 달바위(月石)가 있다 하였다.
땅은 기름지어 농사가 잘되고 흉년, 난리, 질병이 들어오지 않으며 돌샘의 물을 마시면 오래도록 살 수 있고 자손을 낳으면 인재가 많이 나와 능히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고려시대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몇 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나는데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고 청학이 그 곳에 사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고 했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는 못하였다고 고백했다.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고원을 각각 청학동이라고 보긴 했지만 모두들 확신하지는 못했다.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청학동 말고도 불일폭포부근, 세석고원, 상덕평, 청학이골 등과 같은 여러 곳이 있음이니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 청학동도(靑鶴洞圖)는 약 20여종
청학동은 구전과 함께 그림지도, 비결, 비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그 소재가 비밀스럽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청학동관련 지도가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데 필요에 의해 필사본으로 그려지면서 점차 많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제일 오래 되었다고 여겨지는 청학동도(靑鶴洞圖)는 1700년대에 그려졌다고 추정되는데 전해오는 청학동도는 모두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현재 청학동 삼성궁에 소장되어 있는 청학동도에 의하면 최치원 선생이 합천해인사에서 지내다 청학동을 찾으려 지리산에 들어와 말년을 보내면서 만들었다 한다. 한편 청학동도는 고려시대 도선스님과 조선왕조를 세우도록 이성계를 도와준 무학대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만들어 현재 청학동도는 약20여종에 이른다.
청학의 모습을 보았다는 유일한 기록은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로 화를 당해 지리산에 들어간 김일손의 글에서 불일암에 기거하는 스님에게 들은바 몸은 푸르고 목이 붉고 다리가 긴 새가 해마다 6월이면 불일암의 학연이라는 연못에서 목을 축인다고 하였다.
청학의 생김새에 관한 중국의 문헌인 습유기를 보면 형상은 사람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하였으며 날개가 여덟이고 발이 하나라 하였는데 날개 빛이 꿩의 빛깔이면서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선교에서는 선인이 하강할 때 타고 내리는 교통수단으로 이 환상의 새를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청학동이란 청학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난리에 시달린 피난민들이 이 동처에 살면서 천하가 태형하여 진다는 청학의 울름소리를 선망하여 붙여진 이름이거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 동천을 선경으로 보고 선인이 타고내린 청학으로 동천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만주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신선들이 학을 타고 노니는 그림이 많이 보인다. 다른 민족에 비하여 유난히 새를 숭상하고 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예부터 상서롭다하여 숭상하던 상상의 새 봉황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청학의 모습으로 바뀌어 청학이 사는 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청학을 찾아서 지리산을 헤맨 사람들이 몇 몇 있었지만 청학은 외적이 나타날 때마다 그 자취를 감춘다는 속설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 지리산 청학동이 쌍계사 계곡 일원인가? 악양(岳陽)의 뒷산기슭 청학이골인가?
지리산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은 그 아름다운 청학동 즉 무릉도원은 난세를 피하고픈 선비들이 꿈꾼 유토피아로 일종의 피세공간(避世空間)이라 할 것이다. 이곳은 기(氣)와 에너지가 넘쳐 출렁거리고 있는 곳이다.
청정지역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계곡 일원인 지리산 기슭에 서린 천년의 향기는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는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자란 야생차에 대한 헌사(獻辭)는 무수하게 많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하동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화개장터가 자리 잡고 있으며 김동리의 역마 그리고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 민속마을도 모두 함께하고 있다.
지리산에는 유명한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여러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택리지 산수편에 나온 청학동에 관한 기록을 보면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이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온다.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며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溪)로 근래에 비로소 인적이 조금씩 통한다.
이중환선생도 청학동에 대한 말은 들었으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며 물론 지금도 청학동의 확실한 소재를 모르고 있다. 지리산 도처의 마을에서 각기 청학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이른바 도인촌(道人村)이라고 알려진 청학동은 매스컴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지만 이곳이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충분하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지리산을 제대로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다.
간혹 지리산을 아는 자가 있어도 부자는 자기 재물에 인색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재물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감히 들어가고 싶어도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며 어리석은 자 또한 들어가지 못하고 의심이 많은 자도 들어가지 못하며 지혜가 없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고 복이 없는 자는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선을 쌓고 덕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청학동이 있는 지리산에 들어가 만나볼 수가 있겠는가?
만약에 천하의 3대길지라고 하는 청학동을 찾아서 그곳에 들어가면 나도 신선이 될까? 그보다도 먼저 청학동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지리산 최남단 산기슭에 일 년 내내 햇볕이 마르지 않는다는 악양(岳陽)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이곳은 주위의 산세와 수세가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모든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다. 이 고을은 산속의 거대한 평온이다. 이 산속에 거주하는 주민만 5천명이나 된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 민속마을도 이 속에 함께 묻혀있다.
유불선삼교를 숭상하는 도인촌도 조용히 자리하며 소문 없이 수행중이다. 이 악양이라는 고을의 뒷산 기슭 어느 곳을 옛 선조들이 청학이골 이라고 명명했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온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탐색해 보았다. 과연 산세의 자리하는 자태가 청학이 알을 품고 부화를 하기 위해서 숨죽이고 조용히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관조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음이 아닌가?
nbh1010@naver.com
□글/노병한〈박사/자연사상칼럼니스트/한국미래예측연구소장〉〈질의: 010-5248-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