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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 말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

파독 50주년, 광부와 간호사의 가요무대 밤 축제를 보고

김연숙 시인 | 기사입력 2013/08/08 [16:20]
2013년 8월 3일 파독 50주년 기념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위한 kbs 주최로  독일 <복 홈> 에서 3천명이 모인 가운데 가요무대 축제가 열렸다. 1963년도 초반에 간호사 광부로 와서 일한 사람들의 모습엔 흰머리에 늘은 주름살이 인생반백에서 이국에서 쌓인 고엽이 얼굴과 모습들이 역력하다.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향수의 그리움에 지난 추억들을 뒤돌아보며 눈물지었다.
 
가난한 나라와 환경의 지배로 떠나와야만 했던 저마다의 가지각색 사연들과 회상의 추억은 심금을 울려주어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도 경제적인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고국을 방문할 수 있지만 삼사십년 고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오늘날 경제가 성장한 출발의 첫 시초의 디딤돌로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알고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등지고 희생과 헌신과 배려로 몸과 마음 바친 모습들이 행복한 모습들이라기보다 처절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보는 이들로 슬픔이 자아내게 했다.

▲ 김연숙     ©브레이크뉴스
1960년 대만해도 고국에서 서울 가면 죽는 줄만 알았던 시대였으며, 부모와 형제와 이별이란 큰 고통이기 전에 아픔 이였다. 나도 게 중의 한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고국을 떠나왔다!! 1971년 내 나이 24살 한더위 8월 말이었다. 비행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석별의정을 나눔 하느라 울고불고 마치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나는 큰오빠 내외가 나를 배웅하러 나왔는데 오래전부터 지치고 지친 몸이라 울지도 못하고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인지 어떤 지역에 떨어지는 것조차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이제 정말로 고국을 떠나는 현실을 느낌으로 알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눈을 부칠 수가 없었다. 우는 사람들 상념에 잡힌 사람들 가지각색이다. 나는 미니 치마에  단풍잎 무늬의 브라우서를 입고 단발 머리에 망사로 된 구두를 신었다. 막상 비행기에 앉으니 몸은 피로하고 배도 아프고 속이 너덜거리며 정말로 내가 독일로 가는 실감이 안 났는데 비행기에 앉고 보니 와 !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벌벌 떨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잘 견디어 나가 는 것만 남았는데 자꾸만 겁이 나는 것이다. 알라스카에 도착해서야 꿈이 아니라 현실 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기름 넣는다고 다들 내리라고 해서 내렸는데, 세상에나 ! 바깥은 얼음 세상이고 사람들은 털모자에  털옷을 입고 말만 들은 알라스카에서 이국의 냄새를 난 맡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들 한복을 착용하라 한다. 난 빨강치마 흰 저고리 갑사한복을 입었다. 가슴엔 독일주소와 이름이 쓰인 명찰을 달고 마치 국민 학교 입학하러가는 기분이다. 고용사리 품팔이를 가는데 명절처럼 한복을 입고 혼자가 아니고 300명이 넘는 동족인과 함께 라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믿고 의지 하며 무서움을 떨쳤다. 
 
괠 론에 도착, 내가 독일에 떨어진 지역은 바 더 삭사라는 곳이다. 시골인지 대도신지 알 수가 없었다. 바 더 삭사에 떨어진 사람들이 7명이었다. 공항에서 내려서 두리번두리번 하고 있는데 어떤 코쟁이 수녀가 우리 앞으로 와서 손을 내밀며 무어라고  말하며 웃음 짓는데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까마귀 귀신이 된 거다.ㅎㅎ ㅋㅙㄹ 론, 바 더 삭사 까지 의 거리는 500키로 이었다. 우린 준형버스에 12명이 탔다. 5명은 바 더 삭사에서 3키로 떨어진 국립병원으로 떨어진 5사람들과 합승한 것이다.
 
차안엔 침묵이 흘렀다 어느 누구도 입하나 떼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 하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지만 혼자가 아니란 것에 위안을 받을 수 가 있었다. 나는 차멀미가 심하여 두통이 심했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떠나오기 전에도 잠도 못자고 못 먹고 정신적인 스트레스 육체적인 스트레스로 내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 있었던 것이다.
 
도중에 점심을 밥 종류로 시켜서 커피 조금과 먹었는데 워 찌 한담 나는 구토를 또 하기 시작했다. 속은 너덜거리고 차멀미에 두통이 심하고 가슴은 온 전신이 쑤시고 아픈데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정신이 들어 바깥 전경을 내다보니 집도 드문드문 밑도 끝도 없는 들판만 내 시야에 보일뿐 도시나 시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난 어디로 끌려가는 것만 같고 점점 무서웠다. 수녀들은 우리들을 창경원 원숭이 보듯 살펴보고 나를 처다 보는데 파란 눈이 무서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녁에야 바 더 삭사에 도착이 되었다. 5사람은 공립병원에 3키로 떨어진 라우 테 베르크로 가면서 우리 7명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7명은 교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어린이 병원인 휴양 도시에 배치되어 근무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아울러 사립병원 이라는 것도 알고 교회 수녀들이 운영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숙사 배당은 큰방은 둘이서 작은방은 혼자서 우린 서로 합의를 봤다. 방이래야 침대 1인용 두개, 작은 책상, 의자2개, 각각 작은 옷장하나, 부엌과 화장실 목욕탕은 공동이고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전화기도 없었다.
 
병원 위치는 외진 곳 동네 끄트머리 산속이다. 시내를 가려면 20분정도 걸어서 한참을 가야한다. 가난한 대한미국은 돈이 없어 우리를 3년 고용살이 하는 대신 비행기 값은 독일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아르바이트 계약은 3년이며 봉급 받으면 정기적금 3년 동안 서울조흥은행으로 부쳐야 되는 것이 필수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나 3년의 임무를 수행 못 할 땐 비행기 값을 사비로 일체 자기부담 해야만 했다. 작어마한 병동이 7개인데 우리는 병동마다 한사람씩 배치되었다. 일주일 쉴 시간의 여유를 우리들에게 주었다. 1971년 9월 1일부터 근무를 시작하였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우리들은 질질 끌려 다니며 일했다. 육체적인 노동은 시키는 대로 하고 눈으로 보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했다. 내가 주거한 병동은 직원이 15사람이고 애들이 천식, 수술후유증, 다이어트, 정신장애, 육체장애인도 있었다. 어린이들이 100% 건강치 않아 휴양하러 온 것이다.
 
휴양지라 공기 좋고 물 좋아 모두들 대도시에서 온 애들이었다. 인원수는 35명이며 6주내지 8주 있다 가고 또 새로운 애들이 온다. 나이는  4살에서 9살까지의 연령이다. 나의 병동엔 수녀원장 1명 외 14사람의 직원이다. 모두들 어린이 가르치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선생들이었다. 수녀 원장은 투약을 하고 나는 주로 아픈 애들 돌보았으며 저녁으론 애들 목욕 시키는 일을 하였다.
 
나는 작어마치 35명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비누칠하고 다른 여직원은 수건으로 닥아 주는 역할을 한다. 매일 저녁마다 목욕을 시키고 나면 나의 온 몸은 땀으로 젖고 허리가 많이 아파 구부렸다 폈다 하는 운동을 하였다. 근무 시간은 하루 10시간. 문제는 언어다!! 말이 소통이 안 되니 애들 상대라 더욱 어려웠다. 독일 도착하면 독일어를 가르쳐주기로 되어 있건만 사립 병원이 되다보니 언어 교육도 없이 일을 마구 부려먹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육체적인 노동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작어마한 한독사전을 가지고 혼자서 안간힘을 다해봤지만 배움의 전진이 아득하기만 하고 먹먹하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눈치로 애들 말 하는걸 귀담아 듣고 메모지에 적었다. 예를 들어 나는 배가 고프다. 라는 말을 알아들었을 때 애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쪽지에 단어 한 토막을 한국으로 적어 무조건 외우고 또 외웠다.
 
한 문장 두 문장 한마디 두 마디를 달달 무슨 달 노래처럼 익히고 외우고 했지만 혼돈 이 되고 까먹기도 하고 배우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동화책 여섯 난쟁이와 백설 공주 작가가 쓴 책을 읽고 또 읽고 한자 두자 바름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기초 말을 배우는 데는 어린이 책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음식도 적응 못하겠고 시퍼런 눈과 얼굴을 대할 때면 무서워 고개도 못 들고 땅만 처다 보고 빵을 먹었다. 19세기 후진국가 대한민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었다. 나라도 가난하고 환경도 불우한 내 정서와 문화 원망을 하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꽃피는 젊은 나이에 남들은 시집을 가는데 나는 고용사리 외국으로 나가는 팔자가 되었으니 아이 구! 내 신세!  내 팔자야 !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ㅎㅎ 세상에 태어나 선 한 번도 못보고 주먹세고 돈 많은 한사람을 알았으나 내가 나가는 직장을 반대하고 출장 가노라면 가는데 마다 오토바이 타고 불쑥 불쑥 나타나서 직장에 일하는 걸 못 마땅히 여기고 결혼도 하지 않은 나에게 시집 사리를 시키는 것이다.
 
이게 웬 말인고 ? ㅎㅎ 주정뱅이 아버지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환경인지라 친구 집안에서 반대하고 노발대발이다. 만남조차 반대 또 반대 가슴 아픈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기댐이 되고 싶은 나였지만 난 모든 것을 접기로 하고 떠나온 것이다.
 
선진 국가 독일, 고용인으로서 일을 하러왔지만 인권 침해를 받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기에 나라는 정체성을 무시하고 짓밟을 땐 참기 어려운 고통이기 전에 참아내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이미 각오는 했지만, 자존심도 다 팽 계 치고  나는 일만하는 소유물 인정받지 못하는 고용인 외국인이라는 것이 서러웠다. 나는 남모르게 서러워서 울고 싶을 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더더구나 독일인에게 울음은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 이었다. 가난한나라 불우한 환경 내가 기댈 것이라곤 그 아무것도 없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내 신세 울긴 왜 울어 도전을 해야지. 이를 악물고 나오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다. 나의 병원 수녀 원장은, 한마디로 완백한 사람이며 성격은 괴팍스럽고 별난 중의 별난 사람이며 이해심이라곤 씨알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언어 소통이 되지 않고는 눈 뜬 바보 고용인일 뿐이기에 언어를 빨리 배워야 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성격도 변덕스러워 젊은 애들은 절절 매고 선생들도 그녀 앞에선 고양이 앞에 생선이다. 이를 어찌할거나 ! 내 팔자야 ! ㅎㅎ

된 시집 살 생각하니 하늘이 새까맣고 노랗다. 코쟁이 수녀보담 내가 일을 월등하게 더 잘해야만 내가 살수가 있다는 신념으로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부터 일거일동 살피면서 말을 배우느라 전심전력 다하며, 입으론 중이 염불하듯 중얼거리고 눈으론 보고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독일 온지 6달째이다. 1972년 1월 겨울이다. 처음으로 우린 카톨 릭 카니발 축제에 초대를 받아 한복을 입고 성당을 가게 되었다. 많은 성당 지인들이 호화찬란하게 옷을 입고 축제 기분에 젖어 들어 먹고 마시고 있는 즈음 그때 한, 젊은이가 피아노와 키 타를 번갈아치고 다른 두 어른들은 하모니카와 아 코 디온 을 치고 있었다. 우린 초대석으로 들에 핀 장미화를 부르고 엥 콜에 보리수를 불렀다.
 
독일 노래를 독일어로 동양인이 부르니 우린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음악이 시작되니 성당 교인들이 춤을 청하러왔다. 너나없이 주저했지만 우린 함께 일어나서 한 발짝씩 오른쪽 왼쪽 음악에 맞추어 처음으로 정든 남자 품도 아닌 이국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췄으니 그 모습 우습다 못해 멋지다 할까 황 당 ㅎㅎㅎ 간은 콩닥거리고 어떻게 당황했는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로불이다. 헌데 나와 춤추는 사람과 춤을 추는데 맙소사 ㅎㅎ
 
내 한복 치마 자락이 마이크 줄에 걸려 음악이 중단되어 다시 수습하였다. 데일라일아 라 노  비아, 배사 메 무쳐, 겐 세라 세 라, 조-코가 언 체이마이하드 비틀즈 다양한 노래를 고향 떠나와 처음으로 듣고 감계가 무량하였다. 처음으로 맞는 아름다운 외국에서의 밤 무대였다. 그로인해 우리 7명은 우리가 말을 배우는 데는 사람의 어울림에서 듣는 게 중요하다고 동의를 하고 쉬는 날엔 커-피 홀에 나가기로 했다. 단독은 외출 금지로 동의를 하고 무조건 단체로 움직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낯 서른 외국인 얼굴도 익힐 겸, 말도 배울 겸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어느 하루 어머나! 언니! 저 젊은이 성당에서 본 청년이 기타를 치고 있네.
 
커피 홀에 들어가니 성당에서 음악 하는  젊은이가 벤드 속에 끼어 기타를 치고 있어 우리는 무척 기뻤다. 서울 간대 나와는 언니가 성악을 공부해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쳐서 휴식 시간에 젊은이를 보자고 했더니 쾌 이 승낙을 하여 주었다. 휴식 시간에 젊은이를 불러 콘사이스 찾아 가며 반갑습니다!  간단한 단어 인사를 하고는 우리가 그에게 물었다.
 
여기서 음악하세요? 예! 아르바이트 하며  나는 우리 집이 여기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세요? 저는 치과 대학생입니다. 주말이라 집에 와서 아르바이트 한다고 말하였다. 그럼 주말에 우리들을 독일어 좀 가르쳐 주실 수 없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도 주말에 성당 오르간 치고 성가대 음악하며 팝 음악을 해서 전혀 시간이 없다고 친절히 거절하며 주말에만 집에 온다고 말한다. 그럼 다음 주말에도 여기서 음악을 합니까?
 
다음 주는 다른 큰 도시에서 음악 합니다. 나이 많은 언니가 또 물었다. 우리가 독일 말을 배우려고 하는데 당신이 일상생활의 대화를 독일어로 써줄 수 없느냐 물었더니 그는ㅇk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주소를 적어 젊은이에게 주고 돌아오는 길에 언니, 저 사람 착해 보여도 대학생 아닌 것 같이 느껴져. 아무래도 가짜 대학생이라고 내가 말했다.
대학생이 더구나 의대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주말에 음악을 한다니 한국 문화와 비교하면 나는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우린 일주일에 한두 번  커피 홀을 가면 중년 나이의 벤드들이 우리들이 즐기는 라 노 비아 색소폰으로 웃음으로 맞이하여 주셨다. <중략> 
"나의 수필 한 토막에 실린 글이다."
 
나 역시, 이방인생활 40년이다. 첫, 시집을 작년에 내고 가을이면, 나의 이방인 생활이 책으로 나온다. 위의 글은 나의 일부분~~
 
수필집의 한 토막이다. 내 나라에서, 부모와 형제 친구를 가까이하고 내 나라말을 하며 정서와 문화에 살 수 있음은 소박한 밥상을 대함은 최고의 행복인줄 고국사람들은 알아야한다. younsook47@naver.com
 
*필자/김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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