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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루다의 피신생활을 소재로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 포스터 ©브레이크뉴스 |
☉ 두 거인의 만남
‘기차는 8시에 떠나고’의 애수어린 멜로디로 기억되는 동시에 항상 민중을 생각하며 작곡했으며, 신의 선물이라는 위대한 칭호에서 보이듯 압제에 굴하지 않으며, 수많은 투옥과 망명 생활을 오롯이 견뎌내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지목된 그리스의 위대한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아름다운 시인이자 20세기 민중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스페인어 문학가인 네루다가 만났다.
외교관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망명으로 얼룩진 끝없는 이국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열정을 발판으로 피 끓는 언어와 살아 숨 쉬는 정신으로 정제된 네루다의 언어인 <모두의 노래>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끊임없는 열정과 고국에 대한 사랑,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라는 이름아래 위대한 음악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1948년 칠레에서 칩거하며 집필한 <모두의 노래>는 1970년 고국 칠레에서 처음으로 민중을 대표하는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당선되자, 취임식에 초대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칠레 민중들에게 약속한 음악적 재승화였다.
게다가 그의 작곡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1972년 파리의 칠레 대사관에서 조우한 네루다와의 상봉이었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에 태어났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비슷한 길을 걸었던 두 거인의 짧은 만남은 지병인 암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네루다와의 건강 문제로 역사적 초연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막을 내렸고, 네루다의 조국 칠레는 피노체트에 의해 다시금 어두운 과거로 돌아가는 처참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대변한 하나의 작품은 세상에 남게 되었다.
☉ 왜 <모두의 노래>인가?
올해는 네루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테오도라키스가 탄생한지 8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 20세기 서구의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시작한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들에게는 무엇인가 지탱할 힘이 필요했고, 앞을 향해 이끌어갈 절대적인 원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시인이면서도, 억압받는 민중의 앞에 서 자본을 무기로 패권 장악을 다시 시작한 강대국들에게 서슬 퍼런 정신으로 대답했던 증거가 바로 네루다의 시집 <모두의 노래>이다. 우리에겐, 김수영을 통해, 네루다의 시를 끔찍이 사랑한 김남주에 의해, 최근의 김용택 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네루다와의 친연성은 상당히 많다.
또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소설, 정현종 시인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번역과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사랑을 넌지시 일러주던 너그러운 시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대표하는 시집인 <지상의 거처>나 <모두의 노래>는 아직도 온전히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네루다가 말했듯 변방에서 시작하여 늘 지역의 한계에 갇혀 고통으로 점철된 날들을 ‘시(詩)’를 빌어 노래한 그의 인생 속에 투영되는 모습은 모진 세월을 견뎌 내며 삶의 진실과 인간의 가치, 이상을 노래했던 우리 모두의 지난 날 모습이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mikis theodorakis)
-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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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브레이크뉴스 |
테오도라키스가 1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그리스는 독일의 침공에 의해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혈기 왕성한 시절의 테오도라키스는 지하로 숨어들어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군가를 작곡하기도 하면서 제국주의와 싸워 나가는 등 전사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영국과 미국 연합군은 점령국으로서 그리스를 통치하게 되고, 그 중 영국은 기독교 왕정주의를 기반으로 한 우파를 앞세워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자 터키로부터의 독립과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독일에 항거했던 민족세력인 좌파의 충돌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내부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대립 현상은 1944년에서 49년 동안 벌어진 그리스 내전으로 비롯되어 50만 명이 넘는 시민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이 때 아테네 음악원에서 푸가, 화성학, 대위법 공부를 마치고 좌파에 가담했던 그는 1947년 구속되어 이카리아의 섬으로 추방되고, 이후 마크로니소스의 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게 된다.
이 때 작곡했던 ‘symphonietta'는 모두 3악장(초기엔 현악 4중주와 피아노 플루트를 위한 6중주로 작곡)으로 구성되어 훗날 교향곡 1번의 모태가 되기도 한 중요한 작품이다.
우파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고 그리스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테오도라키스는 53년에서 60년까지 파리에서 유학하며 메시앙(음악분석)과 유진 비코트(지휘)에게 수학하며 59년 오페라 ‘안티고네’가 유럽 최고의 작곡가상을 받은 후 귀국, 해외에 알려진 그의 음악을 대표한다 하는 그리스 음악의 전통에 바탕을 둔 민족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athens little symphony orch'와 같은 민속 오케스트라와 함께 민중의 애환을 그리스 전통악기(부주키, 산두리)에 담아내기 시작해 방송에서는 금지곡이었지만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민족적 자각의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사건인 그리스 민주좌파의장 람브라키스의 피살사건은 그리스 청년들과 함께 람브라키스 민주 청년단을 조직하면서 저항은 온 몸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던 그리스 왕정의 불안한 정치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반공민족주의자 대령 파파도플로스가 67년부터 7년동안 집권을 하게 된다. 이 군부정권은 서양음악, 노조활동은 물론 일체의 언론에 대한 자유를 억압하며 테오도라키스의 음악 또한 금지곡으로 처분되며 그 또한 체포당하게 된다. 부블리나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받으며 갖은 회유와 폭력에도 굴하지 않으며 20일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게 된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 번스타인 같은 음악가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참가하고, 마리아 파란두리는 전 세계를 돌며 노래와 함께 그의 석방을 호소하게 된다. 결국, 그의 석방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그리스 군부는 그를 국외추방 시켜 버린다.
파리로 추방된 테오도라키스는 그를 불러주는 많은 제 3세계의 나라들을 방문하며, 음악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었고, 이 때 만나게 된 칠레의 영원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의 조우는 위대한 시집 <모두의 노래> 작곡에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74년 군부가 물러나게 되자 다시 조국의 땅을 밟게 된 테오도라키스는 많은 작곡과 장관, 의원이 되기도 하지만 92년 이후에는 정치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음악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다.
오랜 앙숙인 터키와의 해묵은 골을 음악으로 풀어내고자 터키 음악인들과 만나 그리스-터키 우호협회를 조직했으며, 보스니아 내전 희생자를 위해 ‘플루트와 클라리넷,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의 작곡등 변함없는 음악 활동의 열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98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지목-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축)
- music -
그리스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민중가곡 1000여곡, 교향곡 5곡, 발레 2곡 (조르바, 그리스의 카니발), 오라토리오 2곡(canto general, march of the spirit), 오페라 4곡(코스타스 카리요타키스, 메디아, 일렉트라, 안티고네)과 다수의 영화음악(그리스인 조르바, z, 페드라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금지곡이었던 그의 작품들은 그리스의 현대사가 가지는 억압과 내전, 쿠데타로 이어진 비극과 격랑의 역사 속에서 의연하게 억압과 독재에 맞서 싸우며 국민들의 가슴에 음악으로 희망을 키워냈던 시인이기도 하다. 윤이상과 한스 아이슬러와는 비록 다른 길을 걸었지만 어느 부분은 그의 인생과도 일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낼 수 있기도 하다.
그의 음악 여정은 시대 순으로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리스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민족과 함께 했으며 그의 고난의 역사가 흐르던 70년대 말까지와 음악적 정점에서의 많은 공연과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 현재까지의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작곡은 렘페티카로 불리는 그리스 민속음악에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해, 자긍심 있는 그리스 음악과 시대에 민감히 반응하는 지식인다운 행동을 보인 곡들이 대부분이었다면 후반기로 넘어갈수록 대작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찬가를 작곡하기도 하였고, 1시간 40분이 넘는 대작 발레인 ‘알레시스 조르바’등이 95년에 작곡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랜 시간의 활동으로 인해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음악친구들이 있었다. 마리아 파란두리를 비롯해서, 마리아 데메트리아디, 야니스 토모플로스, 알리키 카야로글로우, 페트로스 판디스, 타냐시스 모라이티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 심지어 야니스 베조스라는 연극배우까지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서도 콘트랄토 마리아 파란투리는 16살 때부터 노래를 시작해 테오도라키스에게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며 표현하는 가수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그의 많은 노래를 불렀고, 1967년 군부쿠데타로 테오도라키스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자 그리스를 떠나 3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면서 조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등 테오도라키스의 영혼의 벗이었다.
늘 검은 셔츠에 맨손으로 지휘를 하며, 독재와 억압에 온 몸으로 항거해 온 그의 빛나는 정신의 노래는 그의 80년 인생을 거쳐 현재까지도 꺼지지 않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음악 성화의 시작일 것이다.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칠레 파랄 출생, 1973년 이슬라 네그라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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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네루다 ©브레이크뉴스 |
평소 흠모하던 체코 시인인 얀 네루다(jan neruda)에서 따온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은 급기야 1946년 법적으로 개명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빠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이다.
네루다가 시와 문학에 대해 흥미를 품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사이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의 시와 만나면서 정형적인 문학형식의 틀을 벗어나게 시작하여 그의 인생에 양대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사회저항의식에 조금씩 다가서게 되었다.
1921년 프랑스어 학위를 받기 위해 수도 산티아고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 네루다는 공부보다 시와 문학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고, 1924년 출간된 시집〈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는 순식간에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후 외교부에 들어가 아시아 각국을 비롯하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a)와 친분을 맺게 된 아르헨티나와 그가 평생 유명 시인들과 교류를 지속했던 장소인 마드리드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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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나무에서 발간된 평전 <빠블로 네루다> ©브레이크뉴스 |
1938년 파리에서의 외교관 생활을 마친 후, 그는 멕시코에서 1943년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이미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던 네루다는 1945년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정치와 의회활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열의를 보이면서도 문학 집필활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1948년 공산당의 비합법화로 인한 탄압에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그는 안데스 산맥을 거쳐 파리, 소비에트 연방, 멕시코를 거쳐 1952년 칠레로 되돌아와 그에게 끊임없는 시적영감을 불어넣어주었던 세 번째 부인인 마틸데 우루티아(matilde urrutia)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953년에는 레닌 상을 수상했고 1960년에는 쿠바를, 1966년에는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70년 민족 정권인 아옌데 대통령의 권유로 재차 파리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슬라 네그라에 자택에 머무르고 있던 네루다는 1973년 피노체트에 의해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무너졌고, 아옌데가 쿠데타군에 의해 살해된 날로부터 며칠 뒤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를 규탄하는 최초의 반독재시위로 기록되었다.
초현실주의와 남미인 들의 역사, 저항정신에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에는 열정과 서정성, 이와 더불어 자연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저서로는 <지상의 거처, residencia en la tierra>, <제 3의 주소(지상의 거처 3권), tercera residencia>, <내 가슴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 <모두의 노래, canto general>, <일상적 송가, odas elementales>, <송가 3집, tercer libro de odas>, <사랑의 소네트 100편, cien sonetos de amor>, <질문서, el libro de las preguntas>,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 memorial de isla negra>, <회고록, confieso que he vivido(자서전)> 등이 있다.
테오도라키스와 네루다
<우석균 -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연구원>
1970년 테오도라키스는 파리로 향했다. 예술가들의 천국이요 개인적으로도 음악을 공부하며 청춘을 불태웠던 곳이었건만 군부정권의 표적물이 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망명길에 나선 것이라 테오도라키스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고달픈 망명생활 속에서도 조국 그리스의 민주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어느 날 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인물과 조우했다. 칠레의 주 프랑스 대사로 임명 받은 파블로 네루다였다. 네루다 역시 과거 정치범이 되어 고단한 망명생활을 경험했던 터라 테오도라키스에게 따뜻한 배려를 베풀곤 했다.
네루다는 테오도라키스가 칠레를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리하여 테오도라키스는 1972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권하에 있는 칠레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환희를 맛보았다. 소외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고 애쓰던 칠레에서 그리스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라키스는 칠레에서 네루다가 얼마나 위대한 시인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네루다의 수많은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의 항구 발빠라이소에서 테오도라키스는 어느 연사의 네루다 시 낭송을 듣고 영감이 떠올랐다. 일찍이 스페인내전 직후 네루다의 주선으로 2,000명에 달하는 스페인인들이 새로운 삶을 찾은 그곳에서 테오도라키스는 새로운 음악적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네루다가 1948년 칠레 대통령의 정치적 변절을 고발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한 뒤 숨어 다니면서 완성한 대서사시집 모두의 노래를 음악으로 승화시키려는 야심만만한 꿈이었다.
며칠 후 아옌데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 결심을 털어 놓자 아옌데는 소장하고 있던 '모두의 노래'를 꺼내 들고 시 몇 편을 직접 낭송해 주었다. 그리고 그 책을 테오도라키스에게 선물했다.
테오도라키스는 파리로 돌아와 '모두의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네루다와 여러 차례 작품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3년 어느 정도 완성된 <모두의 노래>를 들고 라틴아메리카 순회공연에 나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청중들은 테오도라키스와 네루다를 연호했고, 테오도라키스는 감격에 겨워 전화기를 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기로 했으나 류머티즘이 도져 이슬라네그라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네루다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테오도라키스는 그 다음 차례로 예정되어 있던 칠레 공연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번 공연만은 반드시 네루다와 같이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옌데가 직접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고 네루다가 먼저 테오도라키스에게 동행 의사를 밝혔던 공연이건만 공연은 무산되었다. 칠레 정국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전갈만 받아든 테오도라키스는 결국 베네수엘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베네수엘라에서 테오도라키스는 칠레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당혹한다. 그러나 그 다음 공연 예정지인 멕시코로 날아든 소식은 더욱 황망한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날 아옌데가 숨진 데 이어 네루다마저 쿠데타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딛고 테오도라키스는 거리로 나서 칠레 쿠데타 규탄 대회에 참여하고, 그날 저녁에는 공연을 가졌다. 원래 조국 그리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장으로 마련된 공연이었지만 그날만은 테오도라키스나 청중들이나 모두 칠레와 네루다 그리고 아옌데를 생각했다.
테오도라키스는 한없는 슬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고자 그해 겨울 <모두의 노래>를 더욱 다듬었다. 그러던 중 그리스의 군부독재가 종식되면서 그는 조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의 순회공연을 1975년 가지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한 테오도라키스는 <모두의 노래>를 공연 레퍼토리에 집어넣었다. 그의 <모두의 노래>에는 네루다의 시집에서 유래하지 않은 곡이 딱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곡이 어느 곡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바로 ‘네루다를 위한 레퀴엠’(neruda requiem eternam)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5년이 가고 10년이 가도 칠레는 여전히 군부독재로 신음하고 있었다. 테오도라키스의 마음 한구석은 늘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은 헛되지 않아 1990년 드디어 칠레에도 민선정부가 들어섰다. 테오도라키스는 1993년 비로소 칠레에서 <모두의 노래>를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었다. 1973년에 가지려던 공연이 무려 2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네루다도 아옌데도 이미 사망한 지 오래였지만 그 사실이 테오도라키스에게 회한으로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20년이나 지났는데도 기어코 이루어진 공연에, 예술과 역사와 인간존엄의 위대함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테오도라키스는 팔순이 된 몸을 이끌고 다시금 <모두의 노래>를 지휘했다. 이번에는 스페인에서였다. 네루다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였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석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