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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감흥 준 나무 십자가와 창기 십자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계획된 사건

이기송 박사 | 기사입력 2014/04/12 [18:52]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역사의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숱한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한 인물의 탄생사건이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선을 그어 놓은 역사적 사실인 것을 보면 그것이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스라엘 땅 어느 시골출신 한 인생의 탄생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었는지 인종, 민족, 나라 상관없이 그가 탄생한 날이 가까워 오면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괜스레 기분이 유쾌해지고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 온 세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즐거운 날이라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면서 노래를 하고 파티를 즐기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야단법석이다. 그저 시골 무명의 목수로서 조용히 살아가다가 어느 날 대패밥을 털고 나와서 몇 년 동안 잠깐 이야기 좀 하다가 사형선고 받아서 새파란 청춘에 총각으로 죽어간 인생이었을 뿐인데도 그 후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가 이 땅에 오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었던 인류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와 교육과 심지어 투쟁과 생존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존재와 말과 행동이 미친 어마어마한 역사적 변화가 지금까지 이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 십자가 
그러면 그의 그 무엇이 이렇게도 인류로 하여금 두고두고 특별한 감흥을 주며 인류의 역사문화적인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해오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의 짧은 인생이 그 후 세대의 긴 역사동안 불후의 잠재력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생전에 한 말에서 확인될 수가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똑 같이 뱀처럼)들려야 하리니 인자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뱀처럼 징그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죽음이었다. 모든 인류의 징그러운 죄의 값을 대신해서 형벌 받고 죽었다는 희생의 표징이며 대속의 증거라는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죽음의 나무십자가이며 그 결과로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부활의 사건이 바로 그분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의 나무십자가는 오늘날처럼 축복과 행복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목걸이보석이나 장신구로서 인기를 끌만한 상징과는 전혀 반대되는 물건이었다. 그 나무십자가 사형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목걸이 장식이나 할만큼 결코 명예로운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뱀처럼 징그러울만큼 추악한 죄악의 상징이며 끔직하고 저주스런 죽음의 상징일 뿐이었다. 유대민중의 절대적인 다수가 흉악한 살인강도인 바나바는 그래도 용서해 줄만한 여지가 있지만 그 30대 청년 예수의 돌출적인 일탈행동과 언사만은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사회적 통념으로도 도무지 용납할 수 있는 한계선을 훨씬 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흉악한 나무십자가가 불과 몇 세기만에 전세계의 존엄과 숭배의 위치로까지 격상된 파격적인 인식의 전도(顚倒)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물론 아무나 사회적 통념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아주 잘못된 반사회적 잘못을 행하고서 그 결과로 처참한 형벌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 또는 인류의 죗값을 대신했다고 변명되거나 주장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가 진 나무십자가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구세주로서의 사랑과 희생을 의미하는 구원의 십자가로서 긴 세월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늘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계획된 사건이었으며, 예수의 입장에서는 인류를 죄의 세력과 그 저주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던 하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적 선택과 행동이 진실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은 예수의 일생동안 언행의 드러난 모습보다는 그 중심에 담겨진 가슴과 동기와 목적의 순결성과 진실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하게 증명되고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의 신분과 가슴속 중심의 진실성이, 그분을 구원의 십자가인 대속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예수의 심정을 이식받은 제자들의 변화된 거룩한 삶의 열매에서 구별적으로 증명되었으며 또한 예수의 부활이라는 결과로서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하늘 앞에서 흠도 점도 없이 의로운 자만이 타인의 죄와 허물에 대한 값을 지불하기에 최저 자격요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흠 없는 어린 양만이 대속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나무십자가는 진정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작정한 구원의 십자가요 희생과 대속의 십자가였으며 인류가 그 십자가의 진정한 희생과 사랑을 수용했더라면 그 목적의 성취로서 나무십자가의 사명은 완수되었을 것이며 또 다른 십자가희생을 요구할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기대한 결과대로 그렇게 진행되어 오지 못했다. 전쟁도 줄었기 때문에 사람 죽이는 일도 줄었을 수도 있다. 좀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에 도적질도 줄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적범죄는 전 지구적으로 더 확대되고 있으며 일생동안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만 몸과 마음을 주어 사랑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는 아예 웃기는 외계인의 소리라고 들릴 정도로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될 만큼 간음은 인간사회에서 거의 보편화된 문화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날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옛적 나무십자가의 효력이 부족했다면 그래서 또 다른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인류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또 다른 희생의 십자가가 요구되어진다면 그 십자가는 살인강도를 위한 강도십자가나 도적을 위한 도적십자가가 아니라 온 인류가 하나님과 도무지 화합될 수 없이 분리시켜 놓고 있는 죄와 사망의 함정인,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죄악을 대속할 십자가가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듣기에도 거북스러운 ‘창기십자가’인가 하는 반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십자가’라는 것도 당시에는 듣기만 해도 정말 기분 나쁜 소리였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일련의 행동이 그리고 그 결과로 주어진 일련의 수치스러운 오명과 능욕스런 형벌의 과정이 무조건 또 다른 종류의 십자가로서 상징되어질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칭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서 수많은 행악을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과 고통과 저주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모조품 십자가들이 제작되어왔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십자가든 마지막 십자가든, 나무 십자가든 창기십자가든 진정 십자가를 지는 분이라면 적어도 분명하게 확인되어져야 할 자격과 조건이 존재한다. 혈통이나 DNA가 창조주 하나님의 혈통인지 마리아나 요셉의 DNA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죗된 인생들의 죄값을 대신할 구속주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요건만은 모조품 십자가, 소위 사이비 십자가와 극명하게 구별되는 요소로서 검증되어져야 한다.

첫째는 생각으로라도 유혹하는 힘에 굴복할 수 없는, 털끝만큼이라도 죄를 짓지도 않고 지을 수도 없는 의의 상태는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는 하늘의 선택한 방법인만큼 반드시 흠이 없는 의의 생애가 전 생애에서 완벽하게 특징되어져야 한다. 죄에 대해서라면 인류의 전 역사를 갈등과 고통과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원흉임을 알기에 가장 증오스러운 존재요 꺼지지도 않고 식을 수도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죄와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 가슴을 소유한 자이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가슴을 갖지도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넌센스의 극치라고 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기꺼이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능욕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하늘 부모님의 심정과 사랑을 너무도 잘 알고 하늘 부모님의 원통한 가슴과 한을 풀어드리기 위한 애정과 효성이 자신의 모든 욕망과 소원을 삼켜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늘 부모님의 행복과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순종도 마다하지 않는 쇠할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효심으로 증거되어져야 한다. 셋째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다. 죄와는 철천지 원수관계가 되지만 죄에 씹히고 죄의 밥이 된 죄인 인생들에 대해서는, 목숨이 백 개라도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는 한으로, 말과 글이 아니라 실재로 전 생애를 이러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어떤 욕망이나 이기심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정이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줄 가능성이란 추호의 여지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기본 요건이다. 이러한 요건들이 전 일생 동안에 지속적인 열정과 한으로 농축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면 그건 아무래도 모조품일 가능성이 확실하다.

자식이 수영장에 빠졌다면 아빠는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 아들을 건져내려 할 것이다. 자식이 똥물에 빠졌다면 다른 사람은 ‘큰일 났다’ 하면서 주저할지 몰라도 아빠는 아들이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기 전에 건져야겠다고 더 신속하게 뛰어들지 모른다. 똥물을 온 몸에 뒤집어쓸 수도 있다. 똥물을 마실 수도 있다. 아니, 똥물에 빠져서 사람들이 시체 옆에 가기도 피할 정도로 죽더라도 정말 더럽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을 살리고 싶은 아빠의 가슴 타는 열망을 막을 수는 없다.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라고 해도 그건 들리지 않는다. 더럽다고 피한다고 해도 그건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이 친아빠이고 그것이 진짜 사랑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는 너나 없이 애석하게도 하필이면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째 계명의 똥통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행동으로든 마음으로든 이 똥통에 빠진 채 스스로는 헤어날 길이 없이 거의 운명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할 현실이 되어 버렸다. 마음이 창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벌써 옛날이야기이다. 왜 하필이면 창기십자가이어야 했는지 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더기에게는 똥물을 보면 입맛이 다셔진다. 그러나 나비들에게는 근처에도 가기 싫고 냄새도 싫은 것이 똥통이다. 구더기들에게는 똥물이 유혹이 되고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절제와 자기희생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러나 나비들에게는 똥물에 가까이 가는 것이나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건 희생과 죽기보다 싫은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행동이다. 도적질이 재미있는 사람에게 탐나는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대단한 절제와 희생이 요구된다. 그러나 전혀 욕심도 없는 신선이 그런 도적질을 강요당한다면 그것은 고통이고 죽음처럼 괴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참 사랑은 호랑이굴에 잡혀간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호랑이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참 희생은 똥통에 빠진 자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똥통이라도 뛰어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 참 십자가는 간음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서는 간음죄의 웅덩이로 뛰어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남들이 뭐라고 욕하건 저주하고 돌로 때리건 그건 상관이 없어져 버린다. 안타까운 그 사람들을 그 불행과 사망의 늪에서 진정으로 살려서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려움이 없고 그 무엇도 아까운 것이 없고, 그 무엇도 주저함이 없어져 버린다. 이것이 창기십자가의 실상이다. 이것이 창기십자가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창기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는 분은 위에서 언급된 적어도 세 가지의 조건을 기본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에누리될 수 없는 요건이다. 여기서 창기십자가와 창기행각이 구별된다. 창기십자가가 과연 자기를 버린 무아적 희생의 사랑인지 아니면 지극히 비열하게 포장된 탐욕의 수단이었는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희생과 탐욕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낮과 밤처럼 다르다. 비슷한 것 같지만 천양지차로 구별된다. 공자님이 웬 까닭인지 어떤 여인을 꼭 안아준 것과 어떤 바람둥이 호색가가 어떤 여인을 안은 것은 모습은 같지만 똑 같은 탐욕의 실상이었다고 섣불리 정의할 수가 없다.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 다르고 빛과 어두움이 다른 것처럼 실상은 전혀 달라진다. 한날 한시에 나란히 처형된 다른 두 명의 흉악범이 매달려 죽었던 나무 십자가와 예수님이 매달려 죽었던 나무십자가는 똑 같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였지만 실상은 하늘과 땅처럼 전혀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처음십자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막 십자가인 창기십자가 또한 양심으로도 죄를 품을 수도 없고 추호의 이기적 욕망에도 마음 한 조각 내어줄 수도, 내어줄 리도 없는 의에 대한 열망과 인류를 불행으로 몰고 온 죄와 이기심에 대한 적대적 분노가 전 일생을 불태워 온 분만이 그 창기십자가를 지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다. 인류역사상 헤아릴 수도 없는 숱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피부가죽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신분도 망각한 채 거저 고등 포유동물의 한 통속으로 사라져가고 말았다는 사실 때문에 통탄 통탄했던 그런 분만이 창기십자가를 지기에 합당한 자격이 있다. 그러한 확증이 있었기에 나무십자가는 나무사형틀이 아니라 거룩한 구원의 십자가가 될 수 있었으며, 창기십자가는 수치스런 창기행각이 아니라 거룩한 구원의 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우리에게는 가짜에게도 속임당하지 않고 진짜에게도 속임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현실이 될 수 있다. heek3220@hanmail.net
 
*필자/이기송. 전 돌나라한농복구회 회장, 경제학 박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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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기십자가 2021/02/05 [19:42] 수정 | 삭제
  • 이기송박사님 아직도 창기십자가 만세 이십니까? 범죄교리 창기십자가를 옹호하시다니 ... 창피합니다.
  • 푸른나무 2015/07/05 [05:14] 수정 | 삭제
  • 창기십자가의 의미를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2천년 전의 나무십자가와 오늘날의 창기십자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는 공통점이 있네요.
  • 세상에... 2015/04/08 [16:26] 수정 | 삭제
  • 간음은 어떤 마음으로 해도 그냥 "간음"이지 공자가 여인을(성적인 의미로) 안은것과 호색가가 여인을 안은것이 차이가 있다니... 나비가 되었기 때문에 간음을 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라니... 해괴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어쩌면 큰 맥이 너무나 같군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말을 못하듯이 (정직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옷이니까??) 간음을 싫어하는 그분을 (제가 속물이라서) 이해 못하는 건가요? 천만에요. 그냥 간음은 간음입니다. (간음하는 것이) 괴롭긴 뭐가 괴롭습니까?
  • 가고파 2014/04/13 [05:48] 수정 | 삭제
  • 온세상이 성 범죄로 죄악이 판을 치는 이 때에 인류를 구원할수있는길은 이 창기십자가 뿐이라 죄를 모르는 분이 창기를 사랑 하므로 비난 받을걸 알면서 지신 창기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것것이군요 감사합니다~~
  • val lee 2014/04/12 [23:31] 수정 | 삭제
  • 이 시대는 7게명의 범죄가 심각하여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는 결국 창기십자가만이 필요한것이네요.
  • 가람 2014/04/12 [21:53] 수정 | 삭제
  • 장기십자가란 그런 심오한 진리가 있었군요
    오늘날은 창기십자가많이 우리의 구원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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