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인 1940년 당시 경기공립중학교 5학년생인 박찬오는 CHT(조선인해방투쟁동맹)에서 항일운동에 동참하였으나, 1941년 조직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을 시작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복역중, 1942년 12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3년 ~ 장기 5년을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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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박찬오의 인생에 중대한 분수령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원산 형무소로 이감(移監)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체포된 조직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원산형무소로 이감(移監)되었는데 왜 그만 그런 조치를 받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경위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해방을 맞이 하면서 원산형무소에서 출감한 이듬해인 1946년 소련제1기 유학생 299명중의 일원(一員)으로 선발되어 날짜는 정확히 모르지만 평양역을 출발하여 소련으로 향하면서 독립운동가 박찬오가 유학생으로 변신하는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걷게 되었다.
이로부터 졸업하는 1953년까지 7년 동안 소련에 머물렀다는 사실인데 안타깝게도 기본적인 정보이외에 소련에서의 구체적인 발자취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2년간의 입학시험 준비기간을 거쳐서 마침내 1948년 9월 27일 우랄광산대학 지구물리학과를 입학하여 5년 후가 되는 1953년 7월 10일 졸업하였는데, 필자는 그가 어떤 계기로 지구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지만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된다.
여기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부분 중의 하나가 우랄광산대학을 졸업한 박찬오가 언제 북한으로 귀국하였는지 여부인데 최근에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중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노동신문 1954년 1월 12일자 기사에 박찬오가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내용이 게재된 것을 통하여 소련에서 공부를 마친 직후에 북한으로 귀국하여 중공업성에 채용된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기사에 소련 물리탐광기사 게오르기 와씬리예비치가 등장한다는 사실인데 당시 소련에서 “자동전기지중물리탐광기”를 북한에 지원하였다는 것인데, 와씬리예비치가 이 기계의 조종법을 박찬오에게 알려 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통하여 볼 때 이 소련인이 당시 박찬오를 기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70년전에 있었던 일이라 과연 그 소련인이 현재도 생존하고 있는지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박찬오가 소속되었던 중공업성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중공업성은 1951년 7월 27일 기존의 산업성이 중공업성,화학건재공업성,경공업성으로 개편되면서 설립된 것인데, 한국의 산업자원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공업성이 1955년 6월 25일 금속공업성으로 다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1954년 1월 12일 현재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 소속의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박찬오의 그 이후의 행적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에 확인한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일부 내용을 인용한다.
[ 1953-1954학년도말 김일성대 교원들 중에서 3년미만의 대학교원 연한을 가진 성원의 비중이 38.8%를 차지하였으며, 1954-1955학년도말에 가서는 약 41%를 차지하였다.
이들 새 교원들은 주로 최근에 우리대학을 졸업하였거나 소련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한 대학졸업생들이다. ]
위의 내용을 통하여 당시 김일성대 교원들 중에서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1956년 9월말 현재 김일성대 물리수학부에 천문 및 지구물리학 강좌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소련에서 지구물리학을 전공하였던 박찬오가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하던 중에 김일성대 교원으로 채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실제로 그가 김일성대 교원으로 재직하였는지 여부도 궁금하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박찬오의 행적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변수가 1963년 북한과학원 산하 “물리수학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수학과 물리” 제3호에 도영찬과 공동으로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논문을 발표할 당시의 소속은 어디였는지 여부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1963년 공동논문을 발표한 이후 그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점인데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박찬오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에서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친 이후 귀국하여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하였으며, 김일성대 교원으로 재직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박찬오에게 과연 어떤 신변(身邊)의 변화가 있었기에 공동논문을 발표한 이후 행적이 묘연한 것인지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라볼 때 참으로 미스터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찬오의 행적이 묘연한 이유와 관련하여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으며, 그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 필자의 고뇌가 있으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풀리지 않는 행적을 밝힐 수 있도록 혼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