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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 고통 잊지말자!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7/30 [13:50]

필자는 오랜전부터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주민들을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많은 북한관련 칼럼을 썼지만 정치범수용소와 관련된 칼럼을 쓴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왔다고 믿고 브레이크뉴스 독자들에게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그렇다면 먼저 정치범수용소의 개념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정치범수용소란 정치적인 죄를 지은 본인을 포함하여 그 가족까지 처벌하여 수용하는 장소를 일컫는데, 특히 일반사회와 철저히 격리시킨다는 점을 주목한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정치범수용소를 공식적으로 관리소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와 대비되어 교화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교도소와 같은 기능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환경이 수용소 못지 않게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정치범수용소의 규모는 5곳(14호,15호,16호,18호,25호 관리소)에 수감된 인원은 8만 ~ 12만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과거에는 15 ~ 20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 들어 와서 그 인원이 대폭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원이 축소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정치범이 10만이상 수감되어 있다는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치범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구분하는데 먼저 완전통제구역이란 한번 수감되면 출소할 수 없는 종신수용소이며, 혁명화구역은 일정기간동안 강제노역을 한 이후에 형기를 마치면 출소되는 수용소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가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원래는 1950년대 후반 한국을 도운 치안대나 적대계급을 수용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으나 김일성 우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70년대 들어서 김일성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강력한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수용소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필자가 그동안 어렴풋이 나마 알았던 수용소는 15호 관리소로 알려진 요덕 수용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전에 탈북민 관련카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있는 ‘탈북스토리’코너에서 16호 관리소로 알려진 화성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중국으로 탈북한 사연을 기록한 “어느 소년의 북한수용소 이야기”라는 글을 읽으면서 수용소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내용은 소년의 아버지는 김일성대 교수, 어머니는 김형직 사범대 교수이었으며, 누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는데 그러한 가정에 어느 날 청천병력같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사건의 시작은 소년의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발언이 결국 문제가 되어 국가보위부 요원들에 의하여 부모를 비롯하여 소년과 누나를 포함한 전가족이 수용소에 수감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실 부모가 교수라면 북한사회에서 대단한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가정도 북한체제를 비난한 발언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 신분이 박탈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를 비롯하여 누나가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탄압을 받다가 결국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눈물겨운 사연을 읽으면서 수용소내에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현실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필자 또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예전에 요덕 수용소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 대략적으로 나마 수용소의 생활에 대하여 짐작은 하였으나 이번에 읽은 글을 통하여 수용소의 참담한 실상을 보다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소년은 부모와 누나가 사망하는 절망감 속에서 수용소에서 알게 된 동료와 같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동료마저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망하는 아픔까지 겪어야 하였으니, 그 어린 나이의 몸으로서 참으로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결국 탈출하는 과정에서 청진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한국의 어느 기자의 권유로 수기를 쓰게 되었다는 사연으로 이 스토리는 마무리를 하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수기를 통하여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생활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근본적으로 인권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인권이란 인간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일컫는 것인데소년의 사연을 통하여 북한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체제에 도전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철저한 사상개조가 필요하여 수감자들을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도 수용소에 수감된 주민들의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되는 것이 합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요새 정치범수용소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문득 떠오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박찬오 이다.

 

이미 박찬오에 대하여는 그동안 브레이크뉴스를 통하여 여러차례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독자들도 그의 행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필자가 20년넘게 끈질긴 집념을 가지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이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실체를 파악하게 된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행적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 핵심적인 부분을 다시 한번 소개한다.

 

첫째. 박찬오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에 동참하였으며, 해방이후 소련제1기유학생 299명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1948년 9월 27일 우랄광산대학 지구물리학과를 입학하였으며, 5년 동안의 교과과정을 이수한 이후 1953년 7월 10일 졸업하였다. 다시 북한으로 귀국하여 1954년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 소속의 물리탐광기사로 재직한 이후부터 1963년 물리수학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수학과 물리”제3호에 도영찬과 공동논문을 발표하기까지의 약10년간의 행적이 공백기라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에 김일성대 교원들중에 일부가 소련유학생 출신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박찬오가 소련유학생 출신이기 때문에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하다가 김일성대 교원으로 임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한다면 1956년 9월말 현재 당시 김일성대 물리수학부에 천문-지구물리학 강좌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랄광산대학에서 지구물리학을 전공한 박찬오가 김일성대 교원으로 재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 문제는 실제 교원으로 재직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박찬오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인데, 필자가 출생한 해인 1963년에 공동논문을 발표한 이후 50년이 지나도록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박찬오가 어떤 배경에서 정치범수용소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인지 그 부분에 대하여 구체적인 견해를 밝힌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소년의 수기에 아버지가 김일성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치적인 발언이 문제가 되어 하루아침에 교수라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결국 수용소에서 자결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소련유학생 출신으로서 물리탐광기사로 활동한 박찬오도 그러한 비슷한 경우로 인하여 어느 순간 갑자기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동신문 1954년 1월 12일자에 물리탐광기사로 소개되었던 박찬오가  1963년 이후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50년이 흘렀다는 것으로 볼 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치범수용소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과연 박찬오가 수감이 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가 매우 궁금하게 생각되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필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규명해야 할 사안으로 생각한다.

 

바야흐로 2015년이면 남북이 분단된 지 70주년이 되는데 부디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주민에게 자유의 순간이 도래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특히 브레이크뉴스 독자들도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의 고통을 잊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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