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징비록(懲毖錄)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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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1542년 출생하여 1607년 별세하기 까지 66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산 정치가이면서 경세가,전략가,유학자,의학자라 불릴 정도로 실로 하늘이 내린 인재라고 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라 할 수 있는데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 5월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실질적으로 전쟁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마침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진 7년에 걸친 전쟁이 1598년(선조 31년) 종결되었는데 서애는 안타깝게도 영의정에서 파직되어 고향인 하회에 은거(隱居)하면서 불후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징비록(懲毖錄)은 한마디로 7년에 걸쳐서 발생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원인부터 시작하여 그 전모를 상세히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서애가 이 책을 저술한 취지가 다시는 조선에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충신의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서애의 간절한 충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처절한 역사에 대한 교훈을 철저히 깨닫지 못한 연고로 그로부터 40년이 지나서 한 나라의 왕이 청나라의 황제앞에 머리를 읖조린 그 치욕적인 병자호란의 역사를 겪게 되니 서애가 바로 이런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될 것을 염려하여 징비록(懲毖錄)같은 역사적인 교훈서를 저술한 것인데 생각할수록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사실 필자는 그동안 서애에 대하여 임진왜란과 관련된 부분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 그의 전반적인 생애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하나의 계기는 연천의 의학자로 알려진 박승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미 박승석에 대하여는 칼럼을 통하여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으나 그가 두창(痘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출발점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의 종두법(種痘法)이 포천 출신 의관 이종인에게 계승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를 하다가 뜻밖에 다산과 초정 이전에 서애도 의학에 탁월한 식견이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 서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종결이 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서 파직된 이후 고향인 하회에 은거(隱居)하면서 저술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애는 의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당시 백성들에게 직접 치료를 실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그는 의학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의서를 직접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의서는 하나는 침구요결(鍼灸要訣)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이라는 것인데 필자가 조사한 결과 침구요결(鍼灸要訣)은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같은 경우는 서애집(西厓集)17권에 서문은 소개되었으나 그 책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이 부분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의서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1575년(선조 8년) 명나라의 이첨이 저술한 의학입문(醫學入門)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서애가 저술하였다는 것인데 의학입문(醫學入門)은 유학적 원리가 잘갖추어져 있어서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서애의 의학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침구요결(鍼灸要訣)은 의학입문(醫學入門) 본문 중에서 침구의 내용을 서애의 시각에서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의서라 할 수 있는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도 의학입문(醫學入門)에 수록되어 있는 내상과 외감에 관한 대목을 역시 서애의 시각에서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러한 의서에 주목하는 점은 서애가 의학입문(醫學入門)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요약한 저술이라 하지만 이는 평소에 의학적 식견이 탁월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책을 저술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특히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침구요결(鍼灸要訣)은 당시 조선의 침구전문서로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애가 1607년(선조 40년) 별세한 이후 그의 의학사상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가 서애의 의학사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이후 그동안의 연구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이라는 책에서 그의 의학사상과 관련된 일부 행적이 소개되었으며, 더불어 관련 논문이 1편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현재 서애의 의학사상과 관련된 부분은 체계적으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하여 보면 서애의 66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바라볼 때 그는 이미 소개한 대로 정치가를 비롯하여 실로 다양한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서애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면 그가 21세가 되는 1562년(명종 17년) 9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는데 당시 퇴계가 서애를 보고 이르기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볼 때 그는 한마디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퇴계의 그런 평가는 그로부터 31년후에 발생한 임진왜란을 서애가 실질적으로 총지휘하면서 보여준 탁월한 능력을 통하여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앞으로 3개월 후면 대하사극 징비록(懲毖錄)이 방영될 예정인데 이러한 방송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서애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며, 특히 현재 제대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서애의 의학사상이 학계차원에서 재조명되기를 정중히 제안한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