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중국에서 별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업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총수들의 근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장 전 회장처럼 재기를 꿈꿨으나 숨을 거둔 총수가 있는가 하면 재계를 떠나 두문불출하거나 추징금 미납으로 은둔형으로 조용히 지내는 총수 등 다양한 인생을 살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이 간다”는 말처럼 그룹은 공중분해됐지만 총수일가는 잘 먹고 잘살고 있을까. 한때 재계를 호령하던 재벌 총수들은 어떻게 지낼까. 몰락한 기업 총수들의 근황을 조명해봤다. <편집자주>
재기의 꿈 못 이루고 별세…진로 장진호·신동방 신명수
여전히 호화생활 추징금은?…대우 김우중·신동아 최순영
해외 불법 도피 후 행방불명…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수감 생활 중인 총수…C&그룹 임병석·STX그룹 강덕수
[주간현대=김유림 기자] 지난 2003년 진로그룹이 공중분해 된 후 해외 도피 중이던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사망했다. 진로그룹처럼 영원할 줄 알았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동네 구멍 가게가 아닌 대기업이 망하면 재벌 총수들은 어떻게 될까. 한때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 했던 총수들의 근황을 들여다봤다.
재기를 꿈꿨지만 별세한 총수
지난 4월3일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중국 베이징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두꺼비 소주’로 유명한 진로그룹은 고 장학엽 창업주가 지난 1924년 평안도에서 설립한 진천양조상회가 모태다. 장 전 회장 일가는 지난 1951년 남한에 정착한 이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서광주조’를 설립해 전국적인 영업을 시작했고, 이 당시에 ‘진로 소주’의 상징인 두꺼비가 탄생했다. 이후 진로는 1965년 생산방식을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전환하면서 당시 점유율 65% 이상을 차지하던 삼학소주를 제치고 소주시장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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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리한 사업다각화 추진은 몰락의 도화선이 됐다. 진로그룹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로 자금난에 시달리다 부도처리되면서 한순간에 그룹이 와해됐다. 그룹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장 전 회장은 지난 2004년 10월 수천억원에 이르는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장 전 회장은 해외로 도피해 캄보디아와 중국 등지를 전전하며 은행, 부동산 개발회사, 카지노 등을 운영하는 등 재기를 꿈꿨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10여 년간의 도피 생활을 하다 타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도 장 전 회장처럼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해표’ 식용유의 부활을 보지 못한 채 지난 2014년 8월 숙환으로 사망했다. 신 전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선친인 고 신덕균 창업주가 설립한 동방유량에 지난 1967년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았다. 지난 1989년부터 선친에게서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당시 동물성 식용유가 위주였던 식용유 시장에 100% 대두로 만든 해표 콩기름을 출시해 식용유 시장을 주도했다.
신 전 회장은 지난 1996년 회사 이름을 신동방으로 바꾸고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며 대농그룹의 미도파에 대한 적대적 M&A를 추진했다. 그러나 전경련과 함께 삼성, 현대, LG그룹 계열사 등 재계를 중심으로 적대적 M&A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미도파 사무 BW(신주인수권부사채)를 인수해 대농그룹의 방어를 도와주는 바람에 신동방의 미도파 인수는 불발됐다.
미도파 인수 실패의 여파로 신동방그룹은 재무구조 악화와 연이어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해 지난 1999년 결국 워크아웃 기업으로 전락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지난 2002년 경영 정상화 작업을 자율 추진으로 전환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신 전 회장은 이후 아들과 부인을 통해 하이리빙 경영에 관여하며 부활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기업 해체 후 새로운 인생을 사는 총수들도 있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총수 시절에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유명했다. 최 전 회장은 재계를 떠나 할렐루야 교회 원로장로를 맡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회장은 지난 1976년 선친인 고 최성모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한생명 대표이사 겸 신동아그룹 회장으로 취임,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최 전 회장은 선친의 재산을 바탕으로 신동아화재를 키워내고 지난 1985년 당시 동양 최고 높이의 63빌딩을 완공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추징금 납부하지 않은 총수
신동아그룹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지난 1999년 최 전 회장이 국내 4개 은행으로부터 수출금융 등의 명목으로 1억8500여만 달러를 대출받아 편취해 이중 1억6500여만 달러를 미국계 은행 등의 계좌로 송금해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면서다. 같은 해 5월에는 최 전 회장에게 금전을 받은 이정보, 이수휴 전 보험감독원장과 홍두표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잇따라 구속돼 일명 ‘최순영 리스트’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공적 자금 투입으로 최 전 회장의 주식은 모두 휴지조각이 돼버렸고, 신동아그룹 주력 계열사인 대한생명은 100% 정부 소유로 넘어가 경영권까지 잃고 말았다. 지난 2006년 법원은 최 전 회장에게 징역 5년 추징금 1574억원을 판결했다. 지난 2008년 광복절 특사로 형집행은 면제됐지만 남아있는 추징금으로 인해 매년 연말마다 공개되는 전국 고액 체납자 명단에 아직까지도 이름이 올라오는 수모를 겪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최 전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 명의로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수십억원대의 고급 빌라가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최 전 회장이 자진 납부한 추징금은 전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그룹해체 후 이렇다 할 대외활동을 하지 않다가 몇 년 전 침묵을 깨고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의 전신은 대우실업이다. 지난 1967년 3월 섬유수출업체 한성실업 무역부장이었던 청년 김 전 회장은 자본금 500만원으로 트리코트 수출업체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이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 해외로 빠르게 시장을 넓혀나갔고 설립 1년 만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 대우그룹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덕분에 급속히 사세를 확장하며 영진토건(대우개발), 대우전자, 한국기계를 인수했고 옥포조선소(대우조선),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를 넘겨받았다. 지난 1983년에는 대우전자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묶어 대우전자로 키웠고 같은 해 대우증권을 설립했다. 이후 대우실업이 (주)대우로 바뀌면서 그룹 회장제를 도입됐고 대우그룹의 외형이 갖춰졌다. 1990년대 들어서 김 전 회장은 해외시장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지난 1998년 대우는 계열사 41개, 국내 직원 10만5000명, 해외사업장 외국인 직원 21만9000명, 해외법인 396개사로 성장해 삼성, LG를 뛰어넘어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110여억 달러에 달하는 무리한 해외투자를 뒷받침하기에는 내부구조가 취약했고, 외환위기에도 외부차입을 통한 기업확장을 계속 이어나가 자금난에 몰려, 지난 1999년 워크아웃에 돌입한 후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22조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았고 베트남으로 도피해 은둔생활을 하다 지난 2005년 귀국해 검찰조사를 받고 이듬해 징역 8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지난 2007년 대통령특사로 사면돼 자유의 몸이 된 이후 이렇다 할 대외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지난해 8월 자서전을 발간하고 대우그룹이 정권의 기획으로 인해 해체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현재 미납 추징금이 17조9253억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으며 납부한 추징금은 전체 추징금의 0.5%에 불과해 여론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룹 몰락 후 대외활동 드문 총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은 그룹 해체 후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1975년 선친인 고 김성곤 창업주가 갑작스럽게 숨져31세의 젊은 나이에 쌍용그룹의 경영을 맡게 됐다. 김 전 회장은 1973년부터 추진했던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연간 560만 톤 규모로 증설하는 프로젝트를 7년 만에 완료했고 1976년에 쌍용정유를 설립해 1980년 지분을 전량 매수해 쌍용정유를 국내 3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이 그룹의 지휘봉을 잡은 지 20년 후인 지난 1995년 쌍용그룹의 매출은 1974년 대비 192배 증가한 15조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쌍용그룹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들어 쌍용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면서다. 사업 초반 쌍용자동차는 코란도와 무쏘를 선보이며 급격히 부상했으나 현대·대우·기아자동차의 공세에 밀려 사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룹 안팎에서는 자동차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지만 김 전 회장은 포기 대신 과감한 투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벽을 넘지 못했고 지난 1997년 외환위기에 발목이 잡혔다. 그 결과 주축을 이뤘던 쌍용건설과 에쓰오일의 전신인 쌍용정유, 쌍용중공업 등이 모두 줄줄이 매각의 길을 걷게 됐다.
김 전 회장은 쌍용그룹 해체 당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김 전 회장 앞으로 된 재산은 전직 국회의원 자격으로 지급되는 120만원이 전부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일가는 미술관을 운영하거나, 기업 임원으로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는 일이 드물다. 가장 최근 대외적으로 활동한 건 지난해 11월 별세한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빈소를 찾은 모습이었다. 또 이따금씩 아들 재범씨가 운영하는 와인업체 금양인터내셔날의 신제품 테이스팅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은 지난 1981년부터 선친 박병규 회장이 타계한 뒤 해태그룹을 이끌었다. 해태그룹의 몰락은 탈 식품을 선언하고 전자, 건설, 유통 등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추진한 데서 비롯됐다는 업계의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1994년 인켈, 1995년 나우정밀을 인수하는 등 무리한 투자와 해태중공업에서 극심한 적자가 발생하면서 자금난을 겪게 됐다. 박 전 회장은 금융권으로부터 1500억원을 지원받아 회생에 힘썼으나 결국 지난 1997년 조흥은행 남산지점에 돌아온 196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해태제과, 해태전자, 대한포장공업 등 3개의 계열사가 부도처리되며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학교법인 공산학원의 이사장으로 교육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공산학원은 동아방송예술대학교와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를 운영하는 곳이다. 잘나가던 동아그룹 몰락의 시작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동아건설의 부실공사가 도화선이 됐다. 지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에 빠지면서 겁잡을 수 없이 그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1998년 동아그룹은 국내 최초로 기업개선작업 대상기업으로 최종 확정되면서 재계 10위 자리를 수성하던 그룹이 와해됐다.
이후 언론에서 사라졌던 최 전 회장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지난 1999년 장은영(45) KBS 전 아나운서와 27세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리며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당시 최 전 회장은 세 번째 결혼이었으며 장은영 아나운서는 결혼식을 올리고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지난 2010년 두 사람은 합의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마무리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해외에서 9년째 도피 중이다. 한보그룹은 지난 1995년 재계 24위 그룹이었다. 하지만 2조2800억원 투자를 염두에 두고 당진제철소 건설을 위한 차입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금융기관에서는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면서 한보그룹은 지난 1997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행방불명 총수
그 직후 김영삼 정권 시절 한보그룹과 관련된 권력형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 이른바 ‘한보사태’가 터졌다. 한보그룹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여 명은 징역 20~25년을 선고받았고 정 전 회장은 구속돼 공금횡령과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정 전 회장은 5년 5개월을 복역하다 고혈압, 협심증의 병세로 석방됐다. 그러나 지난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도중 지난 2007년 치료를 핑계로 일본으로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도주한 뒤 생사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해외 도피 중에도 정 전 회장은 한국으로 팩스를 보내 강릉영동대 소유권을 주장하고, 정 전 회장 일가가 떼먹은 세금이 국세청 기준으로만 3199억5000만원에 이르는 것이 알려져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
수감 생활 중인 총수
감방 신세를 지고 있는 총수들도 있다. 500만원의 신화로 유명한 임병석 전 C&그룹 회장은 현재 만기 출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임 전 회장은 단돈 500만원으로 칠산해운을 설립해 계열사 41개 재계서열 71위의 그룹을 일궈낸 자주성가형 경영인이다. 그러나 수천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돼 지난 2011년 1심에서 징역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7년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돼 서울고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도 임 전 회장과 같은 신세다. 강 전 회장은 배임·횡령과 2조원대 분식회계를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5월 구속돼 같은 해 9월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수감 생활 중이다. 강 전 회장은 지난 2001년 쌍용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쌍용중공업을 모태로 STX그룹을 설립해 한때 재계 11위까지 올려놨다. 하지만 유럽 재정위기에 주력사업이던 조선과 해운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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