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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고려공산당이 설립된 이르크츠크!

<러시아 르포>우리는 결코 잊어서도 안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야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기사입력 2017/08/01 [07:34]

몽골 횡단 철도의 분기점이며 동시베리아의 수도이기도 한 이르크츠크! 19세기말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여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고 있는 안톤 체호프가 이르크츠크를 ‘시베리아 파리’로 묘사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3일 밤낮을 달려 도착한 이르크츠크는 무려 블라디 보스톡에서 4,000Km나 떨어진 먼 거리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50Km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리이다. 중간에 하바로브스크를 경유하여 이르크츠크를 오는 도중에 몇 번이나 시차가 바뀌는 것을 체험하며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실감했다.   

 

이르크츠크 역에 도착한 순례단을 맞은 고려인 후예들이 꽃다발을 들고 반갑게 맞이했다. 서울보다는 덥지 않지만 7월의 하늘아래 내리 쬐이는 햇빛은 강렬했다. 그래도 우리의 고려인2세 문삼순(65)부회장(고려문화센터)과 대표단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꽃다발까지 선사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최초로 고려공산당이 창건된 이르크츠크

 

이르크츠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최초로 봉건체제인 짜르 정부를 무너뜨린 볼세비키 혁명사상에 심취하며 볼세비키 혁명세력인 코미테른과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일본에 항거한 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시각에서 고려공산당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시 우리의 선배들인 조선의 지식인 청년들은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조국에서 5천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크츠크까지 와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지금 우리는 휴전선에 막혀 섬나라에 우리의 의식이 갇혀 있지만 우리들의 선조인 독립운동가들은 볼세비키 소련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이곳 이르크츠크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정치적 활동무대였다. 지금보다 훨씬 교통이 열악했지만 연해주와 만주벌판을 누비고 이르크츠크까지 활동무대를 넓히며 항일독립운동에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 결과 1919년 김철훈, 오하묵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최초의 공산당 조직인 전로 고려공산당 조직을 이곳 이르크츠크에서 설립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운형, 박헌영 등이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출신이다.

 

이창주 집행위원장은 “고려공산당 창건 시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진보, 보수가 없었다. 오로지 독립운동의 일념으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소망, 일제에 대한 투쟁만이 있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볼세비키 혁명 1호 김알렉산드리아!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가장 최악의 비극적인 자유시 참변(1921)이 발생한다. 1918년 이동휘, 김알렉산드리아 상해 공산당 조직이 이르크츠크 공산당 조직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된다. 볼세비키 혁명1호인 김알렉산드리아는 서양의 ‘로자 룩셈부르크’에 비견되는 인물로 일본놈들 에겐 눈에 가시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김알렉산드라아의 공통점은 열혈 혁명가였고 두 사람 다 총살당한 후 강에 버려졌다. 일본놈들은 김알렉산드리아를 총살시킨 후 아무르 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동휘 선생은 김알렉산드리아가 죽은 걸 알고 통곡했다고 하니 얼마나 아꼈으면 그랬겠는가 짐작이 간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 심장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다”며 오열하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고려인 하바로브스크 사회당 세력이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파보다 더 강해서 독립운동세력끼리 총격전을 벌인 자유시 참변 같은 비극은 안 일어났을 것으로 예상했다. 

 

독립운동사에 가장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 자유시 참변!

 

사할린 의용대 파르티잔(만주 빨치산)세력이 일본군에 쫓겨 자유시(연해주와 아무르 접경지역)로 집결했다. 당시 독립운동세력은 단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적군에 가담한 고려공산당 조직과 백군(짜르 정부)에 가담한 조직으로 분열되어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었다. 하지만 이것은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었지 독립운동세력의 투쟁이 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할린 무장운동의 세력들은 이르크츠크 독립운동 세력과의 주도권 싸움으로 치열한 헤게머니 싸움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조직이 볼세비키 혁명 본부세력인 코민테른과 함께 사할린 독립운동세력을 공격했다. 

 

일제와의 무장투쟁에서도 살아남은 사할린 무장운동세력인 이들 2,950여 명의 정예요원들은 볼세비키 혁명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세력의 공격으로 무참히도 사살, 실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후 독립운동세력은 해방이 되기까지 단 한번도 통합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중국은 일본의 공격 앞에 내전을 접고 국공합작(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으로 일본군과 싸웠는데....   

 

조선공산당사에는 이동휘가 상하이에서 결성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의 적자 경쟁을 하면서 싸우다가 1922년 12월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주도로 모두 해체되고 새롭게 조선공산당으로 통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독립운동사에 기록될 러시아 4대 비극!

 

국제 한민족재단 이창주 상임의장은 “독립운동사에 러시아 4대 비극을 고려인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신한촌 참변, 자유시(러시아 지명, 스보 보드니)참변, 고려인 강제이주(1937년 10월),사할린 동포 강제이주”라고 강조했다. 

 

이창주 박사는 인류사에 일곱 번이나 국적이 바꾼 민족이 있다. 유대인도 아닌 바로 사할린 동포라고 강조했다. 사할린 동포는 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사할린에 강제로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사할린 동포들은 탄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놈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사할린에 남겨두고 자신들만 철수해 버렸다.

 

사할린에 남겨진 동포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소련의 영토가 된 사할린은 북한과 가까워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하고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끝까지 무국적자로 남는 사람도 있었다. 소련 국적을 취득한 후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들인 이들 무국적자로 유랑하는 사할린 동포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70세 이상자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여 안산시에 고려인 마을, 광주(전남)고려인 마을들에 정착해 살고 있다. 세계 민족사에 전무후무한 유랑의 민족사를 우리의 언론이나 학계, 그리고 정부에서 밝혀낸 게 아니라 부끄럽게도 뉴욕 타임스 기자가 특종으로 기사화했다.

 

소련은 유일하게도 사할린 동포에게는 조선말을 하게 허락하여 조선말, 신문, 조선 역사를 배워 러시아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할린 동포2세들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보다 5년이나 빨리 창건한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우리 민족사에 버려지고, 잊혀지고, 재조명되고 있지 않은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1926년에 중국 공산당이 창건했는데 그보다 5년이나 빨리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온몸으로 일제와 당당히 맞서 투쟁하며 치열하게 싸운 이르크츠크는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며, 우리 선조들의 얼이 깃든 곳이기에 결코 잊어서도 안되고 역사적으로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비록 고려공산당 건물을 바라보며 길바닥에서 하는 특강이었지만 순례단은 국가가 버리고 역사가 버린 역사의 편린들을 주워 모아 열변을 토하는 이창주 박사의 열강에 때로는 안타까운 한숨을 때로는 눈물을 짓는 모습들을 보였다. (계속) hpf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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