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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일기 둘

이현실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9/29 [17:59]
엄청난 불볕더위네요. 후끈후끈 달구어진 지열로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상기되었어요.
 
종로에 있는 서점으로 가기 위해 전동차를 탔어요. 문이 열리자마자 용케도 빈 좌석 하나가 눈에 들어오네요. 쾌적한 냉방에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어요. 노곤한 식곤증까지 겹쳐 스르르 잠이 쏟아졌답니다. 자꾸만 주억거리는 고개를 추스르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음메에~~~~~” 깜짝 놀라 두리번대며 소리의 방향을 쫒았어요. 도심의 한 복판에서, 수 십미터 지하를 달리는 전동차 안에서 소 울음소리라니!

마치 어미가 새끼를 찾는 듯 “음메에~~~” 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어요. 승객들 중에는 간간히 목을 젖히고 입가에 빙긋 웃음을 베어 물고 있는 사람도 있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요. 옆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부인이 짐짓 아는 체를 하네요.

“요새는 핸드폰의 컬러링까지 소 울음소리로 서비스를 해주네요. 그래도 소 울음소리는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네요”

정말 그랬어요. 소 울음소리는 도회지의 정형화된 콘크리트 숲에서 잊고 있었던 아득한 향수를 불러오는 그리움과 같았어요.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전원생활을 소재로 한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었어요. 앞장 서 가는 어미 소 뒤를 따라 목매기송아지가 어슬렁대며 제 어미를 따라갔어요. 주인은 소를 앞장세우고 코뚜레 낀 줄을 잡고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장면이었답니다. 남편은 꿈을 꾸듯 소년 같은 얼굴로 말했어요.

“소처럼 영리한 짐승이 없어. 가끔씩 산이나 들로 소에게 풀을 먹이러 다니곤 했지. 소고삐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지 맘대로 다니면서 배부르게 실컷 풀을 뜯어먹지. 해가 뉘엿뉘엿 할 무렵 산을 내려오면 소가 앞장서고 나는 뒤따라 내려오는데 용케도 우리 집 대문을 소가 먼저 알고 찾아들어간다니까.”

소의 울음소리 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슬며시 떠올랐어요.

농촌의 일 년 중 제일 바쁘다는 농번기였어요. 결혼한 지 채 한 달 밖에 안 된 새색시인 내게 시어머님은 손 하나가 그리운데 잠시 내려와 세참이라도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고추잠자리가 마당에서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한가로이 날고 있는 가을이었어요. 앞마당 텃밭에서 풀벌레가 찌륵 찌르륵 울었어요. 가을 햇살에 보송보송하게 말려진 빨래를 바지랑대 위에서 막 거둬내어 돌아서는 참이었어요.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비실대며 내 곁을 스쳐갔어요. 본능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어요. 순간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어요. 가슴에 한 아름 안고 있던 옷가지들은 땅바닥에 저 만치 내 동댕이쳐 진체······

불과 며칠 전에 태어난 어린 송아지가 외양간을 빠져 나온 것이었어요. 송아지는 말 안 듣는 아이처럼 좁은 제 집을 뛰쳐나와 뒤뚱거리며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무리 소가 순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짐승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와락 겁이 났어요. 송아지를 피해 얼른 마루 위로 뛰어올라갔어요. 항상 어른들이 안 계실 때는 호위병처럼 함께 있던 6살배기 조카를 숨 넘어 가듯이 불렀어요.

‘혁아. 혁아. 얼른 저 송아지 외양간에 좀 집어넣어라. 도망가면 큰일 난다’

“소는 도망 갈 줄 몰라예”

조카는 마치 내게 약을 올리듯 빙긋이 웃으며 송아지에게 다가갔어요. 자신보다 엄청 덩치가 큰 송아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마치 손아래 동생을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답니다.

“너그 집에 들어가그레이. 너그 엄마가 자꾸 안 부르나”

조카의 말처럼 정말 외양간의 어미 소는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는 듯이 음메에~ 음메에~ 느리고 부드러운 소리로 제 새끼를 부르고 있었어요. 조카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고 소를 얼렀어요.

“이랴···이랴···”  

정말 신기하게도 송아지는 마치 조카가 길라잡이인 듯 재빨리 외양간으로 돌아갔어요.

소가 제 주인을 알아본 다는 건 사실이었어요. 그 당시 시가의 뒷간은 소 외양간의 한켠에 있었답니다. 뒷간을 가려면 응당 소외양간을 거쳐서 가야했지요. 찝찝하고 콤콤한 냄새에 코를 싸매었어요. 내가 들어갈 때 마다 어미 소는 눈을 껌벅껌벅 거리며 나를 경계하듯 어슬렁거렸어요. 새 식구인 내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아서인지 소는 나를 온전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었어요.

아예 문고리조차  없었던 뒷간은 좁은 널빤지 두 개를 달랑 올려놓은 구조였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보드라운 두루마리 화장지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지요. 초등학교 교사였었던 아주버님이 학교에서 사용하고 난 이면지나 신문지를 잘라서 녹슨 못에 끼어놓으면 한 장씩 툭 떼어서 사용하곤 했지요. 내가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면 으레 조카는 문 앞에서 보초를 섰죠.

하얗고 긴 속눈썹에 쌍꺼풀 진 두 눈을 껌벅 껌벅이던 소. 커다란 두 눈망울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잠시 앉아 쉬었다가는 순하고 맑은 어미 소.
 
때로 농가의 소들은 도시에서 공부하는 아들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우골탑 牛骨塔이 되어 팔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소가 팔려갈 때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글썽인다고 하네요.  

하얀 코고무신을 끌며 댓돌 위를 내려서는 어머니 모습이 오늘따라 애련합니다.  명아주 수북한 붓 도랑가에서 풀을 뜯는 어미 소가 간간히 고개를 들고 긴 울음소리를 내고 있네요. 음메에~~~~~
 
나는 잠시 전동차에 앉아 소 울음소리를 더듬어  푸른 시절의 기억 하나를 광주리에서 꺼내고 있다. 쉴 새 없이 닫혔다 열리며 전동차는 종착역을 향해 달린다. 6살배기 조카는 이제 건장한 삼십 중반의 두 아이의 아빠가 된지 오래인데. 
 
이현실 
한국예총 월간 예술세계 수필 등단
격월간 서울문학 시등단
예술시대작가회 회원
문학동인 글마루 회원
2005 한국문화원 연합회 국민 창작시 금상수상
2008 제5회 한국영농신문사 주최 농촌문학 시 부문 작품상 수상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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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실 2008/10/04 [22:14] 수정 | 삭제
  • 그립네요. 다홍치마에 초록 저고리. 긴 생머리 틀어올려 꽃핀을 꽂고 있었던 해맑은 신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함께 공감하실 수 있어 행복합니다.
  • 따오기 2008/10/04 [11:56] 수정 | 삭제
  • 도시생활에 매우 익숙한 신부가 시골 시댁에 잠깐 내려가서 가장 곤욕스럽던 일은 화장실 가기인데 그 뒷간 곁에 있는 외양간에 매인 소 눈망을이 무서워 꼭 누구를 데리고 다녔었는데 현실님도 어린 신부 때 황소보고 기겁을 하셨군요. 똑같이 겪은 일이라 공감대가 쉽게 느껴집니다. 소가 많은 집이 부자라는데 그 부자 냄새에 코를 막고 쩔쩔댔지요. 푸른 시절의 싱싱한 체험을 소상히 기억해 낸 글엔 농촌의 순후함이 고스란히 베어나 소 여물 같은 정을 곱씹어 봅니다. 자연스런 삶의 터전은 역시 놓촌생활이고 말고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소서...
  • 보헤미안 2008/10/02 [14:42] 수정 | 삭제
  • 유년에 소 풀 뜯기러 산을 오르던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고삐를 내려놓고 장수잠자리 숫좀 잡아 실에 꿰어 돌리면 잠자리 암놈들 수십 마리가 달라 붙는다네요. 그걸 다 잡아서 열 손가락사이에 끼워서 비행기 놀이를 한다더군요. 그 옛날 동네 떠꺼머리 머슴애들이 그립네요. 향토색이 짙은 맛깔스런 글 읽고 향수병에 시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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