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시대정신> 주최 심포지엄
"북한 붕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장소 : 배제 정동 빌딩 세미나실
일시 : 2008.10.14.14:00
발제 : 李東馥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북한의 권력승계 문제와 정치안정
1.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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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 이 모든 행사에 金正日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특히 9일 오후에 있었던 金日成 광장에서의 ‘노농적위대’ 분열 행진의 주석단에는, 금년이 북한의 ‘국가’ 창설 60주년의 ‘꺾어진 해’라는 사실 때문에, 金正日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예상이었다. 더구나, 금년의 경우 金正日의 동정은 8월14일 <조선중앙통신>인 그의 ‘부대 방문’ 기사를 보도한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북한의 보도 매체들로부터 潛跡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인데 그가 ‘9.9절’ 행사에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자 그의 건강에 관한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腦卒症’으로 인한 重病說과 일부 回復說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신문의 1면과 tv 화면을 한 동안 장식했다.
그러나, 북한의 보도매체들은 그의 潛跡 51일 만인 10월4일 날짜는 밝히지 않은 채 그의 대학생 축구 경기 관람 사실(?)을 보도했고 이에 이어 11일에는 <조선중앙통신>이 그의 ‘821군 부대 여성포병중대’ 시찰 사실(?)을 보도한 뒤 <조선중앙 tv>가 그의 부대 시찰 장면을 잡은 12매의 정사진을 방영함으로써 그의 健在를 과시(?)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북한 관측통들이 혼선에 빠져 들고 있다. 11일 tv에 방영된 그의 사진이 眞性이냐 假性이냐를 놓고 양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假性일 경우, 이들 사진은 이번에 찍은 것이 아니라 과거에 찍은 것이라는 說이 제기되고 있는가 하면 아예 사진 자체가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번 사진이 假性 사진일 경우에는 심지어 김정일 有故說을 부채질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가 하면 眞性 사진이라면 그 동안의 金正日의 重病說은 실제로는 그의 고의적인 ‘꾀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金正日의 건강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金正日 病故說은 필연적으로 북한의 권력승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형적인 스탈린 형 공산국가인 북한에는 다른 모든 스탈린 형 공산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정기적인 정권교체는 물론 有事時 권력승계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 이번 ‘9.9절’을 계기로 제기된 金正日 有故의 가능성은 그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 전개될 권력승계의 양상을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의 ‘9.9절’ 사태가 북한의 그러한 권력승계 과정이 임박했거나 아니면 이미 현재형으로 진행 중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金正日의 有故로 인한 북한의 권력승계의 여러 가능한 양상을 점검하고 모든 양상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뜻에서 북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권력승계의 여러 가지 양상을 점검해 보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검색해 보는 데 있다.
2. 스탈린 형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권력승계
1998년 金大中 정권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은 10년 간의 ‘친북ㆍ좌파’ 정권 시대를 살아야 했다. 이 기간 중 남한 사회 내에서의 북한 인식은 많은 혼선을 겪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탈 이념적인 하나의 ‘민족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잘못된 현상은 2000년6월15일 평양에서 있었던 金大中-金正日 회담에서 합의하여 발표된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의 ‘통일원칙’(“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이 초래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 인식은 당연히 왜곡된 것이다. 북한은 여전히 스탈린 형 공산주의 국가인 것이다.
북한은 金日成 사망 2년 전인 1992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부터 종전의 헌법 조항에 있었던 ‘맑스-레닌주의’에 관한 일체의 언급을 제거했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이라는 문구(제3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전형적인 스탈린 형 공산국가로 남아 있는 북한에서 ‘헌법’은 하나의 장식물일 뿐이다. 게다가 이 ‘헌법’도 북한에서는 공산당의 북한 식 호칭인 <조선로동당>이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는 존재임을 명시하고 있다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문제는 <조선로동당> 규약이다. 1980년10월의 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뒤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규약은 <조선로동당>이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로동계급운동에서 나타난 수정주의, 교조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규약은 또한 <조선로동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서 천리마운동과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추진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조선로동당>이 모든 활동을 ‘영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형적인 공산국가인 것이다.
스탈린 형 공산국가는 특이한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공산당의 ‘총비서’(또는 ‘제1서기’)다. 그러나, ‘국가’의 명목상의 ‘수반’은 사이비 ‘의회’인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총비서’는 ‘군 최고사령관’ 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군을 장악한다. 정부의 수반인 ‘수상’ 또는 ‘총리’는 ‘당’이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한정된 권능을 수행한다. 이 모든 국가기능을 ‘당’이 통제한다. 국가 별로, 그리고 시기에 따라, 명칭이나 기능 면에서 약간의 變數는 있지만 이 같은 권력구조는 모든 스탈린 형 공산국가에 적용되는 하나의 共通分母다. 지금 지구상에서 스탈린 형 공산국가는 모두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改革ㆍ開放’의 길을 밟고 있는 中國과 中國을 모방하고 있는 베트남의 권력구조는 스탈린 형으로부터 크게 이탈하고 있다. 오늘날의 북한은 지구상에서 스탈린 형 공산국가의 권력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스탈린 형 공산국가의 권력승계가 갖는 특징은, 서방세계와는 달리, 권력승계의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의 권력승계는 대부분 제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는 권력자의 측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권력암투를 수반했었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에서 포스트 金正日의 권력승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를 챙겨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스탈린 형 공산국가에서는 권력승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돌이 켜 보고 이와 함께 1994년 金日成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권력승계의 양상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구 소련과 마오쩌둥(毛澤東) 생전의 중국, 그리고 獨逸統一 이전의 東獨에서 있었던 권력승계의 事例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 소련에서의 권력승계>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등장한 구 소련에서는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될 때까지 도합 일곱 번의 권력승계가 진행되었다 [① 블라디미르 레닌 (1917-1924) → ② 조세프 스탈린 (1924-1953) → ③ 니키타 흐루시초프 (1956-1964) → ④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1964-1982) → ⑤ 유리 안드로포프 (1982-1984) → ⑥ 콘스탄틴 체르넹코 (1984-1985) → ⑦ 미하일 고르바체프 (1985-1991) → 보리스 옐친 (1991-]. 그러나, 이 일곱 번의 권력승계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정상적인 절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구 소련에서 진행된 모든 권력승계는 암살이나 축출의 방법으로 권력자를 밀어내거나 아니면, 권력자의 自然死에 의한 퇴장의 경우에도, 측근들 사이의 궁중음모 방식의 권력쟁탈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다음은 이들 권력승계가 매번 진행된 양상을 개관한 것이다.
◇ 레닌 → 스탈린 (1924)
1924년 레닌이 病死했을 때 스탈린은 이미 ‘黨中央’이라는 호칭으로 당의 實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레닌이 病死하자 그는 카메네프 및 지노비에프와 ‘3인체제’를 결성하여 당내 ‘좌파’인 트로츠키와 ‘우파’인 부하린을 물리치고 權座를 차지했다. 트로츠키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스탈린은 이번에는 부하린 및 리코프와 제휴하여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축출했고 그 다음에는 부하린과 리코프를 숙청함으로써 그의 1인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 스탈린 → 흐루시초프 (1953-1956)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1953년 ‘腦出血’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死後 그의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에 의한 毒殺說이 끈덕지게 유포되었었다. 스탈린 死後의 크렘린은 잠시 베리아의 독무대였다.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몰로토프, 불가닌 등과 제휴하여 베리아를 숙청했으나 곧 바로 권좌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가 이끄는 ‘트로이카’ 시대를 허용한 뒤 당 제1서기가 되어 1956년 말렌코프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 흐루시초프 → 브레즈네프 (1964)
1964년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가 휴가로 모스크바를 비운 때를 이용하여 코시긴, 포드고로니, 셸레핀 등과 함께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열어서 흐루시초프 축출을 결의하고 스스로 당 제1서기가 되고 코시긴 수상 및 미코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명목상의 국가원수)과 함께 과도적인 ‘3두체제’를 구축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1966년 스탈린 사망 이후 공석 중이었던 ‘당 총비서’가 되어 권력을 독점하여 1982년 心臟痲痺로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지속된 장기 집권체제를 구축했다.
◇ 브레즈네프 → 안드로포프 (1984)
1984년11월 죽기 전 상당 기간 브레즈네프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크렘린의 실권은 비밀첩보기관 kgb의 최장수 수장이었던 안드로포프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었다. 1982년 그는 당의 ‘이념 담당 서기’가 되어 권력승계의 위치를 확보했고 브레즈네프 死亡 이틀 후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 안드로포프 → 체르넹코 (1985)
1984년11월 ‘당 총서기’로 선출되었을 때 안드로포프는 이미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다. 1983년9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신병으로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보좌관을 시켜서 회의에서 代讀될 ‘당 총서기’ 연설문을 당으로 보내면서 그 연설문의 末尾에 “내가 병상에 머무르는 동안 당 정치국과 비서국 회의의 사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위임한다”는 대목을 첨부했다. 그가 고르바초프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체르넹코, 그리신, 티호노프, 유스티노프 등 당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당 정치국원들은 안드로포프 연설문의 이 대목을 묵살했다. 안드로포프가 1984년2월 권좌를 차지한 지 15개월 만에 죽자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르바초프를 제키고 체르넹코를 ‘당 총서기’로 선출했다.
◇ 체르넹코 → 고르바초프 (1985)
1984년2월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되었을 대 체르넹코는 이미 안드로프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는 권좌에 오른지 13개월 만인 1985년3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체르넹코 사망 3시간 후에 전격적으로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고르바초프가 ‘당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체르넹코가 죽었을 때 고르바초프의 政敵 로마노프는 지방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장악한 구 소련은 이미 침몰 중인 難破船이었다.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라는 두 개의 劇藥을 동시에 처방한 고르바초프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1991년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공산당 내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소련방 해체를 주장하는 보리스 옐친에 의하여 진압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이를 통해 발언권을 장악한 옐친은 1991년12월 구 소련방 구성국들과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내용으로 하는 <벨라베자 합의>에 합의했다. 고르바초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수용하고 곧 이어 공산당 ‘총서기’와 소련방 대통령 직을 모두 사직하고 野人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공산 중국에서의 권력승계>
중국 공산당은 1949년10월1일 國共內戰에서 승리하여 중국 본토에 <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했다. 건국 시점에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이었고 건국과 동시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임했다. 이어 그는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직도 차지했다. 그러나, 마오 치하의 중국은 파란만장이었다. 이 때문에 마오는 1954년에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의 자리를 저운라이(周恩來)에게, 1959년에는 <국가주석>의 자리를 류샤오치(劉少奇)에게 나누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자리는 1976년 사망 시까지 지켰다.
마오 생전에 중국은 몇 차례 권력분규를 경험했다. 경제정책 노선을 둘러 싼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사이의 권력 다툼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1966-1976)을 일으켜서 류샤오치와 그를 따르는 ‘개방’ 주의자들을 숙청 또는 추방했다.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넘보았던 림뱌오(林彪)는 실각하여 비행기로 중국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가다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마오의 말년에는 그의 後妻 장칭(江靑)을 필두로 하여 쟝춘챠오(張春橋)ㆍ야오웬얀(姚文源)ㆍ왕홍웬(王洪文) 등 ‘4人幇’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 마오쩌둥 → 덩샤오핑 (1976-1981)
1976년 마오쩌둥이 病死하기 직전에 중국은 또 하나의 별을 잃어야 했다. 저운라이가 病死한 것이다.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류샤오치를 비롯한 많은 ‘개혁ㆍ개방’ 지지자들이 생명을 잃거나 정치적으로 숙청되어야 했다. ‘黑猫白猫’論의 장본인인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도 숙청의 비운을 면치 못했으나 저운라이의 세심한 배려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76년 저운라이와 마오쩌둥이 연 이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오는 그의 말년에 화궈펭(華國鋒)에게 <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당 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물려주었다. 1976년 저운라이가 죽자 화궈펭은 그로부터 <국무원 총리> 자리를 물려받았고 이어서 마오쪄둥이 죽자 <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당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물려받았다. 이렇게 절대 권력을 장악한 화궈펭은 ‘4人幇’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는 뿌리가 없는 蓮꽃의 신세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생전에 저운라이의 도움으로 유명무실한 <국무원 부총리>의 한 사람으로 復權되어 있었다. 마오가 죽자 덩은 당내외의 지지를 업고 화궈펭의 권력을 蠶食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1980년 화궈펭이 차지하고 있는 <국무원 총리> 자리를 쟈오지양(趙紫陽)에게 넘겨주게 만들었고 이어서 1981년에는 <당 총서기> 자리를 후야오방에게 넘겨주게 만들었다. 이로써 덩샤오핑 체제가 완성되었다.
◇ 덩샤오핑 → 쟝저민 (1989 - 1993)
1989년 덩샤오핑은 隱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쟈오지양을 <국무원 총리> 직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를 쟝제민에게 넘겨주었으며 이어서 <당 총서기>와 <당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넘겨주었다. 그로부터 4년이 걸린 쟝저민 체제로의 권력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쟝저민에게는 많은 敵手들이 있었다. 양상쿤(楊尙昆)과 양바이빙(楊白氷) 같은 사람들이 그들로 한 때는 쿠데타 설이 유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쟝제민은 덩샤오핑의 지원 하에 당ㆍ정ㆍ군의 최고위 직책을 차지하여 착실하게 그의 권좌를 다졌다. 그는 1993년에는 <국가주석>이 되었다.
은퇴한 덩샤오핑은 1997년 病死했다. 이 동안 쟝제민은 그를 후계할 후진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쟝제민은 2002년부터 덩샤오핑이 남긴 선례에 따라 권력 이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의 자리를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물려줌으로써 권력 이양의 과정을 시작했다. 쟝은 <당 군사위원회 주석>의 자리는 계속 유지했지만 후진타오에게 2003년3월에는 <국가주석>의 자리를, 2004년9월에는 <당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5년에는 정부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로써 중국은 사상 초유의, 아마도 전 세계 공산국가 가운데서도 처음으로 이루어진 정권 이양을 완성시켰다.
<구 共産東獨에서의 권력 승계>
1949년 독립국가로 창설될 당시 東獨은 철두철미 구 소련의 위성국가였다. 1949년 최초의 의회 선거가 실시될 때부터 東獨의 사실상의 유일 정당은 <독일사회주의 통일당>(sed)이라는 이름의 ‘공산당’ 뿐이었다. 그 당시 존재하던 <기독교민주당>(cdu)ㆍ<민주농민당>(dbd)ㆍ<자유민주당>(ldpd)ㆍ<국민민주당>(ndpd) 등 다른 ‘정당’들에게는 <민주독일국민전선>이라는 이름의 ‘통일전선’ 조직에 합류하여 ‘단일후보’로 선거에 참가하는 것이 강요되었다.
이 같은 선거(?)를 통하여 수립된 <독일민주공화국>의 권력구조에는 1950년까지는 ‘대통령’ 직이 있어서 <독일공산당>의 초대 당수인 빌헬름 피에크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이 자리는 1960년 피에크의 죽음과 더불어 폐지되고 그 대신 <국무원 의장> 자리가 신설되어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 다. 역대 <국무원 의장>은 ① 발터 울브리히트(1960-1973), ②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973), ③ 빌리 슈토프(1973-1976), ④ 에리히 호네커(1976-1989), ④ 에곤 크렌츠(1989), ⑤ 만프리드 겔라크(1989-1990)였다.
共産東獨의 실권은 <공산당>(sed)와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에 있었다 <공산당>의 역대 제1서기는 울브리히트(1950~1971), 에리히 호네커(1971~1989), 에곤 크렌츠(1989)였고 <각료회의 의장>은 오토 그로테볼(1949~1964), 빌리 슈토프(1964~1973), 호르스트 진더만(1973~1976), 빌리 슈토프(1976~1989), 한스 모드로우(1989~1990), 로타 드 메지에르(1990)이다. 여기서 특기할 일은 마지막 <각료회의 의장>으로 東獨 해체 과정을 관리했던 한스 모드로우는 <공산당>이 아니라 <기독교민주당> 소속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東獨 <공산당>은 이미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았다.
東獨의 경우 <공산당> 제1서기는 철저하게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될 뿐 아니라 소련 정부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다른 공산국가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권력분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3. 북한에서의 권력승계 - 金日成-金正日 세습후계의 경우
1945년 日本의 항복과 더불어 蘇聯軍의 進駐로 공산화된 북한에 건설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점령당국이 소련으로부터 화물열차로 실어다가 북한에 조립해 놓은 철저한 復製國家였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북한의 권력구조는 스탈린 현 공산국가의 전형적인 그것이다. 1948년 창설 당시 북한의 권력구조는 모든 권력이 북한판 <공산당>인 <조선로동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은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가주석>제가 아니었다. 정권은 <내각수상>이 관리하고 있었고 군은 당의 <군사위원회>를 통하여 <인민군 총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명목상으로 수행했다.
金日成은 <조선로동당 위원장>과 <내각수상> 및 <인민군 총사령관> 직을 독차지했다. 다만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라는 명목상의 국가원수 자리는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편법 탈당하여 이른바 ‘友黨’으로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이 된 金斗奉에게 맡기는 편법을 사용했었다. 이 같은 권력구조는 그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조정이 되어 왔지만 큰 뼈대는 지금도 크게 변화한 것이 없다. 북한은 1972년 改憲을 통해 <국가주석>제를 도입했고 그보다 얼마 전에는 <조선로동당>에 <총비서>제를 도입했다. 1994년 사망 이전의 金日成은 <국가주석>ㆍ<당 총비서>와 <인민군 총사령관> 직을 獨食하고 있었고 이에 더 하여 <당 군사위원장>과 정권의 <국방위원장> 직도 모두 獨占했었다.
1994년 이러한 북한에 느닷없이 권력승계의 필요가 발생했다. 이른바 ‘수령독재’를 표방하는 북한의 神格化된 유일 지도자인 金日成이 죽은 것이다. 북한이 어떠한 권력승계를 선택할 것인가는 당연히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모든 스탈린 형 공산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북한에도 권력승계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없었다. 드디어 뚜껑이 열린 북한의 선택은 어느 공산국가에서도 先例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공산주의 이념체계는 물론, 사실은 1970년대 초까지는 북한에서도, 禁忌가 되어 있던 世襲後繼였다. 사망한 권력자의 자녀가 권력을 승계하는 封建王朝의 권력승계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죽은 金日成의 맏아들인 金正日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사실은 북한에서의 權力世襲은 金日成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장기간에 걸쳐 준비되어 왔었다. 뒤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북한에서의 長子에 의한 權力世襲은 이미 1960년대 초 金日成의 長子 金正日이 金日成大學 학생이었던 때부터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는 이미 스탈린 형 권력구조를 封建王朝의 그것과 椄木시키는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징후가 아버지 金亨稷, 조부 金輔鉉, 증조부 金膺禹 등 金日成의 3代祖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神格化된 ‘革命史跡’을 조작하는 金氏王朝版 ‘龍飛御天歌’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金日成 一家에 의한 통치는 이미 神託에 의하여 ‘점지’된 것으로 脚色되기 시작했다.
이와 병행하여 1964년 ‘金大’(金日成大學)를 졸업한 金正日의 지도자 수업과 권력기반 구축이 시작되었다. 그는 ‘金大’ 졸업과 더불어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시작으로 黨職 경력의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黨職 경력은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겸 <문화예술부 부부장>(72년)ㆍ<당 중앙위원회 조직선전 담당 비서> 겸 <선전 담당 비서>(73년)을 거쳐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74년)으로 뛰어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구 소련에서 스탈린이 했던 것을 모방하여 <당중앙>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후계자 수습을 본격화시켰다. 金正日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獨逸 때의 ss를 연상시키게 하는 ‘3대혁명소조’(사상ㆍ문화ㆍ기술)를 조직하여 당과 정부의 모든 계층에 파견하고 그 자신(<당중앙>)에게 직접 보고하게 함으로써 현장에 대항 장악을 강화했다.
黃長燁 전 <조선로동당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권력구조는 1970년대 중반부터 ‘金日成 회장ㆍ金正日 사장’ 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는 1980년10월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당내 서열 2위’의 <중앙위원>ㆍ<정치국 상무위원>ㆍ<비서국 비서>ㆍ<군사위원>으로 추대되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金日成의 공식 후계자의 위상을 공식화시켰다. 그는 1982년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勞作’을 발표했고 후야오방, 덩샤오핑, 리셴니엔(李先念), 쟈오지양 등 중국의 首腦들과도 접촉을 시작했다. 그는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앞서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아버지인 金日成이 아들 金正日의 비위를 맞추는 괴이한 작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들의 50회 생일(1992년2월16일)에 즈음하여 아들을 위한 頌詩를 漢文으로 지었고 白頭山 山麓에 조작된 아들의 生家 인근 산봉우리 石壁에 아버지의 친필로 쓴 ‘정일봉’이라는 글자를 陰刻하게 했다. <金正日 勞作>ㆍ<金正日花>ㆍ<口號나무>ㆍ<충성의 편지 달리기>가 등장했다. 金正日은 1991년에는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1992년에는 <인민군 元帥>로, 그리고 1993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94년7월 아버지 金日成이 돌연 세상을 떠나자 金正日은 권력의 頂上 登頂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무렵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300만명의 주민이 餓死하는 최대의 경제위기인 ‘苦難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舞臺의 뒤에 머물면서 두 가지 일을 진행시켰다. 첫째로는 8억 달러에 가까운 外貨를 들여서 죽은 金日成의 집무처였던 소위 <錦繡山 議事堂>을 그의 시체를 안치한 <錦繡山 기념궁전>으로 개조했다. 둘째로는 북한 헌법을 개정했다. 그에 앞서 그는 1997년 <조선로동당 총비서>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그는 <당 총비서>ㆍ<국방위원장>ㆍ<인민군 총사령관>이라는 당ㆍ정ㆍ군의 최고위 직을 獨食하여 권력의 최고 頂上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의 자리는 죽은 그의 아버지 몫으로 남겨 놓았다.
1998년 개정헌법은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이었으나 <金日成 헌법>이라는 다른 이름을 아울러 선포하고 있었다. 이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원한 金日成의 나라’로 헌납하는 문서였다. 이 헌법은 金日成에게 바치는 獻詩인 거의 1,500자에 가까운 序文에서 金日成을 “공화국의 영원한 主席”으로 추대하고 있다. 이로써 북한은 죽은 金日成이 살아있는 아들 金正日을 통해 통치하는 하나의 ‘神政國家’가 되었다. 북한에서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의 자리는 헌법에 의하여 영원한 ‘空席’이 되었다. 죽어서 棺 속에 누워있는 金日成이 영원히 차지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1998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목상의 ‘국가원수’는 북한 창설 당시로 돌아가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인 金永南의 몫이 되었다.
4. 포스트 金正日, 무엇이 문제인가?
이상의 과정이 밝혀주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한의 권력구조가 권력의 世襲을 내용으로 하는 봉건적인 金氏王朝로 자리 매김이 되었지만 이 王朝에서 이루어지는 世子 책봉과 권력승계의 과정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마도 전체 住民의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북한식 현대판 絶對王政의 속성상 權力世襲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無誤謬性을 확보하기 위한 안간힘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無誤謬性의 확보가 불완전할 때 직면하게 되는 정체성의 위기는 朝鮮王朝 초기 太祖ㆍ定宗ㆍ太宗 3대에 걸쳤던 政情不安이 웅변해 준다. 위대한 君王이었던 4代 世宗은 龍飛御天歌를 통해 朝鮮王朝의 정체성 문제를 해소시켰다.
이 때문에 북한은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장기적이고 세심한 과정을 거쳐 金正日을 세습후계자로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을 죽은 金日成이 棺 속에서 통치하는 神政國家로 만들어 아들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의 後光을 등에 업고 세습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9.9절’ 파동을 통해 새로이 世間의 관심의 대상이 된 북한의 急變事態 사태 발생 시 金正日의 후계체제가 어떻게 구축될 것인지는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생각해 볼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포스트 金正日의 북한의 권력구조가 어찌 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제시되고 있다. 論者들 가운데서는 軍部 쿠데타의 가능성은 물론 집단지도체제의 등장을 예고하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개입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논의들은 모두 과거 王朝 시대에서의 易姓革命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한이라고 하는 金氏王朝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논의들이다. 결국, 金正日 死後 북한의 권력승계는 1994년 金日成 死後에 진행되었던 세습후계가 再演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우선 그 후계자가 누구일 것이냐는 것이다. 金正日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成惠林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장남 正男(37세)와 高永喜와의 사이의 소생인 正哲(27세)ㆍ正雲(24세)이 그들이다. 黃長燁 씨는 長男인 正男에 의한 승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 이유로는 지금 북한의 권력구도에서 金正日의 同腹 누이인 敬姬와 그의 남편인 張成澤이 正男을 지원하고 있고 이에 더하여 중국의 지도부가 正男을 選好하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金正日이 막내아들인 正雲을 더 총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9.9절’을 전후한 金正日의 潛跡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최근 正雲의 피해 정도를 알 수 없는 교통사고에 대한 충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거론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金正日 死後의 권력승계가 다시 世襲後繼로 귀결될 경우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많은 의문들이 있다. 우선, 첫째로 등장하는 의문은 그 같은 권력세습이 과연 가능할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 같은 권력세습의 시기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지금 당장이 그 시기라면, 그 같은 권력세습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이유는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內治ㆍ外交 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로동당>이라는 펀다멘탈이 건재할뿐더러 金氏王朝에 대한 당과 군의 충성심에 아무런 이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뒷날이 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이 간단하게 나오기 어렵다. 앞으로, 특히 북한 내부에서, 어떠한 변화가 진행될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의문은 그 같은 권력세습이 再演될 경우 이를 통해 북한이 과연 정치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金正日 死後 그로부터 권력을 世襲할 3명의 후보 가운데 그 어느 아들의 경우에도 지난 날 거의 25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金正日의 권력세습 준비 작업이 이루어진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같은 준비가 없이 권력세습이 이루어졌을 경우, 카리스마의 차원은 물론 당ㆍ정ㆍ군 등 권력구조의 펀다멘탈에 대한 장악의 차원에서, 지금의 金正日에 匹敵할 수 있는 영도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냐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지금의 북한 식 ‘수령독재’ 체제에서는 북한의 모든 국정 영역에서 金正日에의 의존도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내외 정세의 현실은 金正日의 후계자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의존도가 필연적일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金正日로부터 권력을 세습하는 후계자가 그 같은 의존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북한이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지금의 상황이라면, 金正日의 세 아들 가운데 어느 누구가 권력을 세습한다 해도 그가 보여주는 영도력은 1994년의 시점에서 金正日이 보여 준 영도력에 크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되면, 권력을 세습하는 아들은 그 자신의 역량으로 북한을 통치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아마도, 金正日을 후계하는 아들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구실하는 가운데 黨이나, 혹은 軍이 그를 업고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결국, 이 경우 ‘先軍政治’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지배하는 金正日의 ‘수령독재’ 체제는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짚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같은 권력세습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점검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권력세습이 북한의 ‘붕괴’로 연결될 가능성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권력세습 과정이 ‘王子의 亂’으로 이어져서 國家 敗亡으로 귀결된 사례를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統一新羅 말기 後三國時代 甄萱의 後百濟에서 그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만약 북한에서 ‘王子의 亂’이 일어난다면 그 과정에서 북한에서의 武裝內亂과 이로 인한 流血事態에 대한 염려를 아주 배제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당 또는 군에서 제3의 세력이 일어나서 쿠데타의 방법으로 ‘金氏王朝’의 幕이 내려지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의 권력승계 과정에 주변국가, 특히 중국이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특히, 북한에서의 권력승계 과정이 ‘王子의 亂’을 포함하여 대내적인 무력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는 각별한 대처가 필요하다. 이로 인하여 북한 내부에서 공공질서가 파괴되어 치안유지가 어려워진다면 이는 보통사태가 아니다. 더구나, 북한은 북한은 핵무기를 비롯한 핵물질 및 시설과 화학ㆍ생물 무기, 그리고 미사일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有事時 ‘이판사판’으로 이를 사용할 가능성에 대한 對備도 필요하지만 이와 함께 치안질서의 파괴로 무정부 사태가 조성되고 이를 틈 타 이들 可恐할 大量殺傷武器들이 제3국이나 제3자에게 流出될 가능성에 對備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
5. 결론 -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번 ‘9.9절’ 소동이 金正日 有故說로 번지자 남한사회에서는 엉뚱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친북ㆍ좌파’ 진영에서 ‘북한 안정 지원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어처구니없는 잘못 된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북한에서 진행되는 권력승계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안보 위협에 대해서는 안보 차원에서 有備無患의 事前 대처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옳지만 북한에서 진행되는 포스트 金正日의 권력승계에 대해서는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를 우리의 통일정책의 차원에서 대처할 절대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북한에서의 권력승계 과정이 원만하지 못해서 이른바 ‘急變事態’로 이어진다면 그 같은 상황은 우리가 지난 60년간 鶴首苦待하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통일정책의 차원에서 이에 대처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對備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하루 속히 보완하여 완성하고 이에 따라 실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태세를 완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동안 두 개의 ‘親北ㆍ左派’ 정부에 의하여 死藏되었던 <平和計劃>을 하루 빨리 꺼내서 補修해야 한다. 이와 함께 合參의 <忠武計劃>도 조속히 정비하여 북한에서의 모든 급변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盧武鉉 정권 때 흔들어 놓은 ‘韓美 聯合作戰’ 체제를 復元하고 그 틀 속에서 <作計-5029>를 더욱 발전시켜 ‘槪念計劃’(conplan)이 아닌 ‘實行計劃’(oplan)으로 완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같은 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북한의 ‘예고 없는 붕괴’가 現實化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북한의 ‘붕괴’에 대한 對處가 정부의 ‘통일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 동안의 정부의 대북정책 수행 조직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를 망라하여 대북정책 일체를 통일부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고 있는데서 초래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는 서로 相異하고 相衝되는 정책 목표와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정부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정책’은 대한민국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통일국가의 체제이념과 가치체계 등 國家像과 그러한 통일국가에 접근하는 방법과 수단을 연구하고 이에 관한 교육과 홍보를 통하여 국민적 합의 기반을 도출하여 관리할 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 필요한 제반 정책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통일정책’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收斂하는 것으로, ‘통일실현’에 의한 ‘現狀打破’가 그 목표다. 이 같은 ‘통일정책’의 相對方은 북한 동포들이지 북한 동포들을 抑壓하고 있는 독재정권이 아니다. 북한 정권이 이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북한식 통일’ 추구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 같은 통일의 실현은 북한에서 필요한 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정책영역이다.
북한의 변화를 통해 통일을 위한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남북관계를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이때 필요한 정책 수단이 ‘남북대화’다. ‘남북대화’는 통일 이전의 분단상태 하의 남북한 간에 현안 문제들에 관하여 남북의 두 ‘分斷主體’ 사이의 협상과 타협으로 통해 평화적으로 분단을 관리하는 것이 그 목표다. ‘남북대화’는 남북 간에 상호관계 설정, 전쟁재발 방지, 긴장완화, 화해협력, 신뢰조성에 필요한 현안문제들을 대화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남북 간의 ‘敵對的 공존관계’를 ‘平和的 공존관계’로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平和共存’을 통한 ‘現狀維持’가 목표다. 따라서 ‘남북대화’의 相對方으로는, 북한 동포들을 抑壓하는 독재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실효 통치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 두 정책영역은 분리하여 별도 관리되어야 마땅하다. 과거 西獨의 경우가 그랬다. 西獨에서는 ‘통일정책’은 ‘內獨關係省’이 담당하고 ‘兩獨協商’은 수상실에 별도의 ‘무임소장관’을 두고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관계 부처 담당자들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수행하게 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 통일부로 一元化하는 한국의 정부조직은 결과적으로 ‘남북대화’ 爲主가 되어 ‘통일정책’이 亡失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북정책 수행 관련 정부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통일부는 ‘남북대화’에서 손을 떼고 ‘통일정책’만 전담해야 한다. 통일부는 ‘통일정책’의 틀 속에서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수립하여 북한의 ‘붕괴’ 사태에 對備해야 한다. ‘현안’ 해결을 위한 ‘남북대화’는 내각에 전담 무임소장관을 두고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현안 별로 관계부처에서 差出된 담당자들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수행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그 동안 30년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론적으로는 ‘한반도 分斷狀況의 평화적 관리’에 기여하리라는 期待感을 불러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북한의 독재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함으로써 暴政의 연장을 통해 북한 동포들의 고통을 永續化시킬 뿐 아니라 대한민국 주도로 이루어지는 통일을 지연시키는 逆機能을 수행해 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미 ‘실패한 정권’으로 判明이 난 북한 독재정권의 붕괴와 이를 통한 체제변화를 자극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에 대한 필요성을 外面할 수 없다. 이 같은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이 곧 ‘대북공작’이다.
‘대북공작’은 근본적으로 ‘비합법 활동’의 영역이다. 만약 공개적 방법으로 이 같은 활동이 전개된다면 이에 대해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저항하리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같은 ‘비합법 활동’의 공개적 추진은 대한민국이 추진하는 ‘남북대화’의 眞正性을 무너뜨릴 염려도 없지 않다. 이 때문에 북한체제의 변화를 推動하는 데 목적을 둔 ‘대북공작’은 “왼 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할 정도의 隱密性”을 요구한다. 이 같은 일은 당연히 國家情報院 및 이 기구와 제휴관계에 있는 국가정보 및 공작 기구들의 몫이다. 정부는 ‘대북정책’을 ‘통일정책’과 ‘남북대화’ 및 ‘대북공작’으로 三元化하고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대북공작’은 은밀하게 추진하는 ‘2 + 알파’의 分業體制를 슬기롭게 稼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이 같은 分業體制에 입각하여, 國家情報院으로 하여금, 관계 부처와 협동하여, 종합적인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수립하고, 有事時, 관계부처가 분담하여 이를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계획에서 정부는 북한에서 ‘정권’의 ‘붕괴’가 이루어질 경우 ‘金氏王朝’를 대체하는 後續 政權을 상대로 과도적인 ‘一國兩制’를 시행하여, 미국의 南北戰爭 종결 후 南部 10개주에서 북부 출신 投機꾼(carpetbagger)들이 했던 것처럼, 남쪽의 挾雜ㆍ投機輩들이 북한에 진출하여 북한 동포들의 利權과 權益을 壟斷(농단)하는 일을 방지하고, 북한의 경제체제를 사회주의 명령경제로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며, 북한 동포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경쟁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適應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조치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이 계획에서 정부는, 과거 統獨 과정에서 등장했던 ‘2 + 4’ 외교와 같을 수는 없더라도, 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를 비롯한 한반도 有關國들을 상대로, 정부 차원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이해와 지지 등 유리한 국제환경을 事前에 확보하는 데 필요한 彈力的 외교 노력을 미리 전개할 필요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http://www.dblee2000.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