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사 주간신문으로 <주간현대> <사건의 내막>을, 그리고 인터넷 신문으로 <브레이크뉴스> <폭로닷컴> <러브삼성>을 발행해오고 있다. 한때는 종합일간 신문인 <일간 펜 그리고 자유>를 발행한 적도 있었다. 2009년 5월로 <주간현대> 창간 12년을 맞는다. 매체를 발행해온 것만으로 생각해보니, 이 기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매체를 이끌어 온 이면을 공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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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나의 생사관을 말하자면, 나의 삶은 더 나은 인간 사회로 진전하는데 참여하며, 그런 지향성을 갖는 데 가치를 두고 있다. 죽음 그것은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보태는 성스러운 마감이라고 본다.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신의 창조 대열에 하나의 먼지라도 놓아두고 떠나는 것이라고.
나는 3년 간 불교 출입기자를 하면서 신학에서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 받았다. 나의 생사관에는 윤회적 가치체계도 녹아 있다. 기독교와 불교의 복합적 생사관일지 모른다. 윤회적 생사관이란, 내 아이디어가 어디선가 나에게 왔듯이 내가 내놓은 신문 속의 아이디어는 누군가의 머릿속에 다시 유입되어 윤회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의 역사관은, 역사의 심(心)은 언제나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삶이 마감되는 날까지 역사에의 복무는 계속된다는 것을 믿는다.
주간신문에서 대다수 인생을 허비한 내가, 이 지면에서 새삼 나의 생사관과 역사관을 들먹이는 것은 이런 생사관과 역사관이 신문 제작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사관은 내 삶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이었고, 살면서 생긴 나의 부적(符籍)은 투쟁에서 살아 남는 하나의 도구였다.
언젠가 유별난 개인택시를 탄 적이 있다. 그 개인택시 기사는 자기가 가진 부적을 자랑했다. 큰스님이 사용하던 108 염주와 신부님이 쓰던 단주가 그것이다. 이 두개의 염주가 자신의 부적이라고 자랑했다. 한번 만져보자고 했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그 염주를 차 안에 걸고 난 후부턴 사고도 전혀 없고, 돈도 잘 벌린다고 했다. 내가 아는 이 나라 최고 깡패는 몸에 직접 부적을 새기고 다닌다. 그 부적을 몸에 새긴 이후 깡패세계의 지존적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좋은 부적을 걸어놓고 하루 종일 핸들을 잡는 개인택시 기사처럼, 몸에 부적을 직접 새긴 주먹세계의 보스처럼, 신문사 발행인인 내게도 몇 가지 영험한 부적이 있다. 나는 그 부적들을 신문사 안에 걸어놓고 있다. 이 첨단시대에 웬 부적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난 이 부적들 때문에 회사경영에 있어 절반쯤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빛 못 보고 사망한 아이디어
영화인 신성일이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 기사를 최근에 읽고 진한 영감을 받았다. 신성일은 은막의 스타다. 그러나 권력자가 좋아 보여 오랫동안 권력 주변을 기웃거렸고, 결국은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하면서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어 감방 생활도 했다. 출옥 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권력에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했다. 스타로서,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게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신성일이 평생 연기자 생활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평생 기자였다. 그것도 주간신문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도 주간신문의 질적 성장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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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3년 기자생활을 하면서 단행본도 30여권 써댔다. 김구 선생의 암살을 추적한 글이나 중앙정보부의 공작을 파헤친 책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 성철 스님의 일화도 모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이민자의 삶도 현장 르포로 조명하는 책을 썼다. 그뿐 아니라 이색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도 담아냈었다. 기자로서, 인간 내면의 고귀한 가치발견에의 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중 주간신문이나 인터넷신문은 서민언론이다. 피의 순환이 있어야만 사람이 생존하듯이 정보의 순환이 있어야만 사회 발전이 가능하다. 나 같은 주간신문 종사자들은 발로 뛰어 기사를 취재하고 가슴을 쥐어짜 가며 긴 기사를 작성, 정보의 순환에 기여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매일 5-7km씩 걷는 것을 생활화했다. 구두에 양말을 신지 않는다. 그리고 주로 전철을 타고 다닌다. 그렇게 걸으면서 많은 구상을 했다. 걸어서 현장을 찾고, 취재원을 만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걷노라면 아이디어가 나에게로 다가와 생각에 입맞춤한다. 기자생활 33년, 아이디어만은 차고 넘쳤다. 아이디어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면 차고 넘쳤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들을 살리지 못하고 명멸해 갈 때는 슬펐다. 그 중 남아 있는 아이디어들이 내가 만든 신문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러 가지 여건상 미처 지면에 주워 담지 못한 아이디어들에게 미안한 감이 든다. 그간 수없이 사망(?)한 나의 아이디어 무덤 앞에서 슬픈 조사를 바친다. “빛을 못 보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시간 이후에도 산에 나무를 심듯 모든 지면과 화면에 아이디어를 심을 것이다.
나의 책상 옆에는 지난 12년 간 발행된 신문이 차곡차곡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와 기자들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는 주간신문들이 마지막까지 한 부라도 존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매주 나오는 신문을 12년째 모으고 있다.
신문 속에서 스타는 취재원이기도 하지만 기자 자신도 스타라고 본다. 나는 오늘도 좋은 기사를 써 대서 신성일 같은 스타, 스타 기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 가운데 몇 가지 부적을 지니게 됐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바짝 마른 명태처럼 씹히지 말자“
내 사무실에 있는 몇 가지 부적(符籍), 그 중 하나는 명태 머리이다. 동해(東海)를 헤엄치던 명태는 어느 어부의 손에 잡혀 햇빛과 바람 속에서 아주 잘 말려진 것이다. 후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던 무속인 한 분이 가져다 준 것이다. 나는 그 명태를 볼 때마다 “내가 망한다면 저 명태처럼 바싹 말려지고 쫙쫙 찢겨져, 사람들의 입에 씹힐 것이다. 무슨 일이 있든지 저 명태처럼 돼선 곤란하다”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그 명태를 보며 성공하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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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원래 내 머릿속에 1천억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왜 한국인들은 눈에 보이는 재화만 돈으로 보는가, 머릿속에 든 자본을 왜 무시하는가?’ 나는 곧 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그래서 지인들이 모인 식당에서 한번은 원맨쇼를 벌였다. “내 재산이 최소 1천억 원은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한 지인이 “그 돈을 다 어디에 감춰뒀느냐?”고, 다그치듯이 물었다. 나는 식당 주인한테 돼지머리 자를 때 쓰는 식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식칼을 들고 “지금 당장 내 머리를 쪼개 달라, 내 머릿속에 1천억 원이 들어 있다. 당장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날 밤 용기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내 머리는 돼지머리처럼 잘려 나가는 신세가 될 뻔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날 원맨쇼를 지켜본 지인들은 그 뒤 “문 발행인 머릿속에 든 1천억 원을 진짜로 보았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곤 한다. 그 사건 이후로 나와 주간현대가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은 없어졌다.
그 날의 원맨쇼 이후 난 주간신문 업계의 재벌(?)로 통한다. 지금까지도 그 효험이 이어진다. 믿거나 말거나, 그날 푸닥거리가 영험(靈驗)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바짝 마른 두 눈으로 날마다 나를 지켜보는 동해바다 명태 부적은 나에게 신성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
할부 타자기 한 대로 버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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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신문을 발행해 오면서 지인과 단체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물론 그분들이야 내가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뭐 그리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라고 자문자답도 해본다. 그저 그분들의 지원이 고마워 언젠가 신세라도 갚았으면 하는,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현장에서 취재를 해서 기사로 생산한 뉴스는 창조적 보상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난 세월 동안 지출의 시한부적 무거운 명령 앞에서 쩔쩔 맸다. 그 속에서 늘 신음했다.
늘 가난해 돈에 쫓기는 경영인으로, 파랗게 멍든 가슴을 부여잡고 또 내일을 향한다. 나는 지난 12년 간 직원들에게 꽃과 상패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위로와 감사가 담긴 마음의 꽃다발과 상패를 나와 일한 모든 분들에게 드리고 싶다. 그간 주간현대 제작에 참여한 직원들도 많았다. 모자를 벗어 들고 신문제작에 동반해준 전-현직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할부로 산 타자기 한 대와 중고 컴퓨터로 이 세상을 버텨왔던 것 같다. 초기에는 타자기 한 대가 유일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타자기를 쳐다 볼 때마다 “문일석이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지금까지 새 컴퓨터 한 대를 사보지 못했다. 모두 중고품이거나 조립 컴퓨터였다. 그래도 글 쓰는 도구였던 타자기와 컴퓨터가 항상 내 곁에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그 행복감에 눈물이 난다.
큰 작두-작은 작두의 의미
공개하기가 섬뜩하지만, 기왕에 부적에 대해 말하기로 했으니 다소 생소한 부적에 관해서도 소개하련다. 내 무실엔 작두가 두 개 있다. 이 작두 역시 신문사 벽에 걸려 있으나, 내 사무실에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내 목을 자를 수 있을 만큼의 큰 작두요, 또 하나는 나의 다섯 손가락을 다 자를 만큼의 작은 작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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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롤링스톤>의 발행인 잰 웨너의 사무실 앞에는 가슴에 총을 맞아 피 흘리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다. 마찬가지로 내 책상 옆에는 머리와 가슴에 꽂힌 펜에서 피가 질질 흐르는 캐리커처가 하나 걸려 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날마다 이 캐리커처를 보고 나서 업무를 시작한다. 이것도 역시 나의 부적이다.
나는 주간신문에 최면이 걸려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주간신문을 읽는 분들에게 매주 최면을 걸고 있는지 모른다. 한 주에 한 가지라도 꼭 읽고 싶은 기사거리 만들기에 시간을 쏟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부적이 하나 더 있다. 꿈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다. 나는 오늘도 꿈을 먹고산다. 한국 최고의 주간신문을 만들겠다는 꿈이 그것이다. 그리고 주간신문의 왕이 되기를 꿈꾼다. 이 말을 하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국 주간신문의 왕(王)이 되고 싶다. 지금은 비록 재화의 빈곤 속에서 주간신문의 왕을 꿈꾸지만, 그 꿈을 위해 끝까지 내 삶을 투척코자 한다. 직업적 열정에 취해 살고 싶다.
주간신문 발행인. 그간 알고 지내던 분들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은 원고도 많았다. 어찌 보면 원고도둑(?) 생활을 해온 셈이다. 기업들로부터는 숱하게 광고지원을 받았다. 이 사회는 거대한 샹들리에와도 같아 모난 유리알들이 서로를 비춘다. 이런 구조적 인연 속에서 기업들은 주간신문에 광고를 주었고, 주간신문은 기업이 준 광고료로 정보를 생산, 이 사회에 정보를 되돌려 줬다. 그런 의미에서 주간신문의 역할도 꽤나 있다고 본다. 주간신문은 자본의 순환과 시장주의에 기여한 셈이다.
주간신문은 톱에 살고 톱에 죽는다. 톱 하나 잘 세우려고 1주일 간 고민이 계속된다. 신문을 잘 아는 분들은 톱과 내용이 다르다고 핀잔도 준다. 주간신문이 많아지면서 그런 이야기는 더 들린다. 톱에는 생존의 치열함이 배어 있다. <주간현대>는 매주 80면을 발행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주간신문 가운데 지면이 제일 많다. 지면이 많은 이유는 미래에의 도전의지를 담기 위해서다.
나는 일간지 기자도 해보았고, 일간지에 딸린 월간지에 집중적으로 기고도 했다. 그뿐 아니라 1년 반이나 <펜 그리고 자유>라는 일간지를 직접 발행, 발행인-편집국장도 해보았다. 신문 속에서 사는 게 내 업(業)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용기(用器)는 일간지는 아닌 듯하다. 일간지보다는 주간지를 만드는 삶이 더 행복했다.
정신적인 부적은 “주간신문의 왕”
‘주간신문의 왕(기껏해야 성주(城主) 정도이겠지만)이 되겠다’는 꿈은 나의 열정을 북돋아 주고 있다. 이 꿈이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어차피 왕이 없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진짜 왕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부적의 신통력을 믿는다. ‘주간신문의 왕’이 되겠다는 꿈은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나의 정신적 부적이자, 가장 중요한 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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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편집국장-발행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는 걸핏하면 경찰-검찰에 불려 다녔다. 일종의 수난이라면 큰 수난이었던 셈이었다. 씁쓸한 일이지만, 지내놓고 보니 이런 것들도 훈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성공학의 대부인 브라이언 트레시는 성공에도 법칙이 있다고 했다. 그는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잘 해보려고 모든 것을 쏟고, 성공할 때까지 끈질기게 도전하는 게 성공의 법칙이라고 했다. 기자 33년, 주간신문 발행인 12년, 나는 아직까지도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이 시간에도 주간신문 제작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성공을 바라면서. 나는 지금도 나를 향해 ”네 삶의 자리가 어디냐?“고 묻고 있다. 또한 ”네가 가진 부적이 과연 무엇이냐?“고 치열하게 따지고 있다.
내가 날 바라다보면, 나에게서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자유시장주의의 희열을 보는 듯하다. 맨손으로 상경한 시골촌놈 출신의 언론인생활과 언론발행은 자본-자유시장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런 도전도 수용됐을 것이다. 끝으로 시장주의에 무한한 감사함을 표한다.
그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한화갑, 이인제, 정대철, 이회창, 박근혜, 손학규, 박지원 등등 수많은 국내 유명 정치인들과도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지르포나 기사로 세상 흐름을 활자화했다. 기자로서 또는 발행인으로서 사회참여는 내 삶이 나에게 준 값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늦깎이 시인된 이야기
기자생활 33년. 그 긴 세월, 종국적으로 문자를 다루는 일을 해왔다. 살면서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취재수첩 사이사이에 습작을 해왔다. 그리고 그 습작 시를 여럿이 모이는 식사-술자리에서 가끔씩 낭송해왔다. 그럴 때, 더러는 감동했다고, 보내주는 박수를 받기도 했다. 어쩌면, 시 쓰기는 일상의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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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다. 기자정신은 날카로운 송곳이나 면도날처럼 사회에 메스를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자정신의 최종 지향점은 결국 이 사회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맘 놓고 말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확대. 이것이 기자를 기자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이 57세에야 겨우 시인이 됐다. 늦깎이 시인이다. 시인은 기자와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를까라고 고민해봤다. 시인도 기자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충만한 자유를 노래하고 자유의 영역을 확대 시키는 데 종사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기자와 다른 게 있다. 시인은 원천적으로 자연과 사람과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누구의 가슴에나 들어 있는, 사람과 떼어놓을 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영적-정신적 존재물이다.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사랑은 어떤 면에서 “치유가 불가능한 불치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스스로 찾아오기도 하고, 스스로 떠나가기도 한다. 사랑은 기쁨으로 오기도하고, 사랑은 때로 증오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 내면을 언제나 떠나지 않고, 가슴 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거시적 시각으로 사랑을 말하면, 사랑하는 세상은 무한대요, 장엄하다. 감동으로 감동으로 늘 떨린다. 보아도 보아도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같이 있어도 있어도 그리움의 천국이다. 나의 시는 내 내부에 도사린 불치병인 사랑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인 것에 불과하다. 내 시는 거대한 사랑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미세한 먼지에도 못 미치는, 글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사랑을 다 알지 못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내 시어는 마른 장작을 두들겨 패는 듯한 소리처럼 둔탁하다. 그래서 시 속에서도 눈물을 흘린다.
나는 시를 통해 “나도 몰래 뚝뚝/가끔씩 눈물이 날 때가 있다.//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너무 보고 싶어질 때/주체할 수 없는, 그 사람 그리움에//기뻐선지, 놓치고 싶지 않아선지/눈가에 눈물이 저절로 저미어 고였다.//눈물을 흘리다보니 흘리면 흘리는 만큼/삶이란, 양파껍질처럼/한 꺼풀, 한 꺼풀 신비를 더했다.//어쩌겠는가. 눈물이 날 땐/줄줄, 주루룩, 뚝뚝, 그냥 흘리도록/내 자신이 나를 내버려 둘 수밖에//내 눈물이 내 운명이라면.(졸시/눈물 중에서)“이라고 읊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길이었다 해도
나는 앞서 언급한 명태-타자기-심장에 펜이 꽂힌 사진-작두를 부적으로 삼고 제 자신을 채찍질하며 기자로 살아왔다. 이 부적들은 모두 절망적인 것들이다. 고사 지낼 때 쓰는 명태는 죽은 생선이다. 타자기는 남의 약점을 공격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주가 없어지는 날까지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나 스스로 내 머리와 가슴을 펜으로 찍어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일은 죽음으로 가는 자살행위이다. 큰 작두 작은 작두 또한 한 순간에 살아 있는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고약한 물건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죽음의 물건 들 속에서 생명을 찾아냈다. 명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썩지 않을 마른 생선이다. 공자가 말한 항심(恒心)이다. 마른명태는 그 어떤 벌레도 먹지 못한다.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신의 사랑이다. 타자기는 남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는 살인무기가 아니라 일류를 살릴 수 있는 펜이다. 머리와 가슴에서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야 건강한 육체이다. 작두가 있어야 소를 살릴 수 있다.작은 작두는 명의였던 화타를 화타이게 했다. 작은 작두가 있어야 좋은 약재를 잘라 중병에 걸린 환자를 살려낼 수 있다. 나는 죽음의 부적을 넘어,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생명에의 경외심이 이 세상 끝까지 차고 넘치는, 자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유가 불가능한 불치병적 사랑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칭송하면서,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 이후 내일까지도, 열심히 뛰는 '글쟁이'이고 싶다.
주간신문은 민중(民衆)-백성의 신문이다. 민중-백성은 다수다. 민중-백성은 정치의 주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정치가에 의해 소외되어 왔다. 때론 짓밟혀왔다. 감옥에서 신음하기도 했다. 주간신문은 민중-백성의 신문으로 민중-백성을 위한 정보를 주는 신문이다. 난 33년을 민중-백성들을 위한 신문제작에 시간을 쏟아 부었다. 민중-백성,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기사를 취재해왔다. 그런 중에 권력의 변방 이야기만을 보도했는지도 모른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의 삶을 살아왔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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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백성의 시각에서 민중-백성이 읽고 싶어 하는 기사를 실으려고 몸부림친 세월이었다. 오직 민중-백성 속에서만 숨을 쉬며 살아왔다. 1980년 이후 대한민국의 민중-백성은 위대했다. 그들은 두 번에 걸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선진국형 정치로 승화시켰다. 그런 속에 용해된, 나 자신의 투척(投擲)을 감사해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길이었다 해도 난 나 자신의 알아줌에 감사해한다.
"자유의 물을 마시고 자란, 한국 주간신문&인터넷신문이여 영원하라."
**ps/필자는 이 글을 몇 차례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세월이 자꾸자꾸 지나니까요. 2008년 10월31일이 최종 수정일입니다. moonilsuk@kore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