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식사를 하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노숙자, 교회 내부 쪽방촌에서 생활하는 노숙자 등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건의내막>은 광야교회의 쪽방촌에서 생활하며 지병을 앓고 있는 노숙자 이중기(가명·64세)씨와 최민재(가명·65세)씨를 만났다.
| 이중기씨 “12월 심장 멈춘다는 판정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최민재씨 “주먹세계의 오야봉에서 매일 통증에 고통의 나날” |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웠던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9남 2녀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중기씨는 선천적으로 만성중이염을 앓았다. 고막에 구멍이 뚫린 징후로 양쪽 귀에서 고름이 나온 것.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아들이 못마땅했던 이씨의 아버지는 넉넉한 형편임에도 치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미군 부대 내 교회를 다닌 어머니가 의무관을 전전하며 아들의 치료에 힘쓸 뿐 이었다.
중이염에 이어 급성 심근경색증까지
귀가 들리지 않아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이씨는 9살 무렵 미군부대 의무관에서 보청기를 받은 이후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고 늦게나마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의 놀림과 따가운 시선이 있었지만 그는 공부와 운동으로 시련을 감당하곤 했다. 11살 때는 당뇨병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가며 용돈을 충당했다.
당시 그에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는 작은 형이었다. 중학교 학비는 물론 취직자리까지 소개해 줬다. 이씨는 작은 형의 도움으로 플라스틱 도금회사에 입사해 사업을 해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저축을 시작했다. 3년 동안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그 후 3년 동안 자장면으로 식사를 대신해가며 돈을 모은 그는 23살 무렵 새로운 가정을 일구었고 쌈짓돈을 마련해 플라스틱 도금 사업을 구상했다.
1년의 준비 끝에 시작한 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도 잠시, 회사가 부도난데 이어 작은 형이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고 그로부터 2년 뒤 큰 형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이씨는 평소 앓고 있던 중이염이 크게 악화됐다. 충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오른쪽 귀 뒤쪽의 구멍으로 고름이 새어 나오고 귀 안쪽이 썩어 들어간 것. 그는 12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지만 당시 귀 사이 뼈를 건드리면서 신경이 끊어져 왼쪽 입이 돌아가고 한쪽 눈이 감기지 않는 후유증을 앓게 됐다.
수술 이후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이씨는 oo금속 회사에 입사해 능력을 인정받아 자동차 부품 및 전자부품 등을 총괄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신입면담을 비롯해 영업, 기술,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공장장 생활을 하던 그는 퇴직 이후 imf가 터지면서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아내가 다단계에 빠져 수 억원 가량의 돈을 탕진, 별거에 이르게 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식을 하면 떼돈 번다’는 소리를 듣고 주식을 시작해 5억 이상을 날린 것.
회사를 그만둘 당시 받았던 퇴직금은 결국 다단계와 주식으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그는 돈을 벌기위해 러시아행에 올랐고 러시아에서 2년 동안 돈을 벌었지만 그 역시 주식으로 탕진했다.
모든 것을 잃은 이씨는 지난 2004년 겨울, 영등포를 찾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던 중 임명희 목사의 도움으로 광야교회의 쪽방에서 생활하게 됐다. 이씨는 중이염을 앓으면서도 재기를 하기 위해 막노동은 물론 주유소 등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말부터 원인모를 통증에 시달리면서 그마저 그만둬야 했다. 가슴이 조여 숨을 쉴 수 없고 어깨와 팔이 쑤시며 손발이 시린 증상이 주기적으로 찾아온 것. 여러 번 병원을 방문했지만 담 또는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이씨는 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지난해 2월 b종합병원을 찾았고 검사 도중 응급실로 이송,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의 병명은 심근경색증으로 황급히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지난해 2월, 혈관이식 수술을 하게 됐고 수술 이후 꾸준한 치료와 관리가 필요했지만 이씨는 병원비 부담으로 병원방문을 차일피일 미루며 일하기를 여러 해, 결국 3~4회에 걸쳐 응급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수술 후 6개월 만에 심근경색증이 재발, 또다시 응급실로 이송됐다.
두 차례의 심근경색증 수술 이후 현재 혈관하나를 못쓰게 된 이씨는 중이염까지 악화된 상태다. 이씨는 “(의사로부터)지난해 12월에 심장이 멈춘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아직까지 기적적으로 살아있다.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남은 생을 전도 생활을 하며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싶다”고 전했다.
폭력조직 보스에서 통풍환자로···
“수술 이후에도 상처가 안 낫고 있다. 손·발에 고름이 계속 차고 퉁퉁 붓는데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현재 통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최민재씨 역시 영등포 광야교회의 쪽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들과도 연락이 끊긴 채 집 없이 떠돌던 지난해 봄, 임명희 목사의 도움으로 이곳에 정착해 살게 됐다.
지금은 통증을 호소하며 아무 일도 못하고 있지만 그도 한때는 주먹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싸움꾼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그는 20대 시절, 우연치 않게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젊음을 믿고 서울로 상경해 일을 찾던 중 일명 폭력 조직의 막내에 합류하게 됐다.
최씨는 잔심부름만 하는 막내시절을 거쳐 싸움을 통해 인정을 받게 됐고 ‘깜상’으로 불리며 폭력 조직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1970년대 서울역 근교 양동에서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조직의 ‘보스’로서 100여명의 부하들까지 거느렸다. 양동 세계를 주름 잡았던 그 시절 최씨는 두려울 게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포지역에서 발생한 패싸움에서 사고를 당해 강원도 옥동의 탄광으로 피신을 하게 됐고 그 사건을 계기로 주먹세계를 떠나게 됐다.
“10여 년간 정말이지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 다치는 것은 비일비재했고 싸움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사고로 약 4개월 동안 피신해 있다가 그곳(탄광)을 빠져 나왔고 이를 계기로 ‘조직’ 일을 그만두게 됐다.” 주먹세계를 떠나고 몇 년 후 결혼을 했고 지방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게 최씨의 설명이다.
그는 “지방소재의 농장·목장에서 일을 했다. 비록 가난 했지만 아내와 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돈도 모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내가 자궁암에 걸리면서 그동안 모은 돈을 병원비로 쓰게 됐고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최씨와 아들만이 세상에 남겨졌다고 한다.
최씨는 “아내와 사별한 이후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꼬박 일했다. 힘이 들었지만 아들을 생각하며 견뎠다”고 말했다.
아들의 학비마련을 위해 농·축산 일을 하던 최씨는 50대 중반 무렵 원인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온몸이 붓고 손가락, 발가락 등 뼈 마디가 쑤시고 저려왔다고 한다.
몸이 아픈 상황에서 최씨는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됐고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해야했다. 하나뿐인 아들과도 연락이 끊긴 채 홀로 방황을 하던 중 광야교회와 인연이 닿아 쪽방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정말이지 밤마다 뼈가 쑤시고 시린 느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같이 손발이 부어오르고 고름이 나왔다. 아픔을 참고 생활하며 일을 했지만 결국 아픔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쪽방에서 생활하게 됐고 지난해 4월, 무려 4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술을 했지만 여전히 아프다. 의사는 완치가 어렵다고 한다. 밤이면 밤마다 아픔 때문에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다. 진통제를 먹지만 아픔이 가시지를 않는다”며 “주먹세계에서 아이들을 거느리며 생활했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매일 통증에 시달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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