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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화상> ‘나’ ‘너’만 있고 ‘우리’란 없다

‘우리’란 공감대를 저해하는 무서운 이기적 ‘틀’

김기홍 기자 | 기사입력 2009/08/09 [10:57]
작금의 대한민국이 ‘나-너’의 이분법적 대치만 만연한 채 ‘우리’란 공감대는 상실한 것 같아 우려가 크다.
 
오랜 시간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던 쌍용차 노사문제의 극적 합의 타결은 상처뿐인 무대였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간의 긴 대치 국면 속에서 양자 간 상처도 깊고, 후속 과제도 산재한 상태지만 그나마 ‘우리’란 공통분모를 도출했으니 한시름 들은 형국이다. 반면 미디어 법 날치기 통과를 둘러싼 대치 상황은 안개속 국면속에 여전히 '우리'란 단합을 저해하고 있다.
 
이런 제반 대치상은 정치, 사회, 언론 등을 떠나 현재 우리 사회 전반을 깊숙이 관통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 불신의 만연과 중-서민들의 한숨, 불투명한 미래만 지리 하게 대한민국을 엄습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이혼율-자살률 세계 1위, 외국기업들이 진입을 기피하는 나라, 몸싸움을 통해 국회에서 억지로 법을 통과시키는 나라, 여-야를 줄 창 바꾸어도 답이 없는 나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나라,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은 ‘낙타가 바늘 뚫기’ 나라 등 부정적 오명들만 ‘코리아 트렌드’로 계속 자리 잡아갈 뿐이다.
 
▲ 촛불시위, 광우병     ©유장훈 기자
 
시간을 돌이켜 지난 2002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하나 된 함성을 혹여 기억하는가? 대한민국엔 당시 하나의 ‘우리’만 존재했다. 그 결집의 원동력은 아직도 의문이다. 거기엔 오직 ‘대한민국’이란 하나의 구심축만 있었다. 태극 깃발아래 함께 포효하던 대한민국의 ‘우리’만 존재했지 ‘나-너’는 없었다. 거기엔 여-야도 진보-보수도 없는 ‘우리, 대한민국!’만 있었다. 모처럼, 아니 8.15 해방 후 유일하게 단일민족의 하나 된 단합을 견인했던 그 벅찬 감동의 순간들을 어찌 잊을 까. 낯 설은 이들과 그냥 ‘대한민국-우리’란 공감 하에 ‘하나’가 된 채 목쉬도록 고래 함성을 질렀고, 어깨동무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함께 그 순간들을 공유했다.
 
아마도 그 감동의 순간을 재차 만끽하진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왜일까. 불과 7년여 전 그때 ‘우리’와 ‘감동’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고, ‘나-너’의 적대적 대치만 이리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가. 존경받는 지도자의 부재, 미숙한 정치-정치인들의 난무와 사회 중심 가치지표의 실종 등이 ‘나-너’의 이기 및 대치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단적으로 규명하기엔 너무 긴 지난 시간의 터널이 대한민국에 짙게 깔려 있다. 이런 제반 사회 분위기는 고스란히 국민들 삶속에 녹아들어 폭넓게 투영되고 있다.
 
자원이 없는 태생적 국가 환경 속에서 모두가 ‘일류병’에 목메며 자녀교육에 올-인하고, 사교육을 부추기면서 어릴 때부터 자식들을 몰아붙인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기본 인성의 의미는 ‘일류병’과 ‘돈 광풍’에 밀려 일찌감치 그 가치를 잃은 지 오래다. 내 자식, 내 가족은 무조건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과 질 높은 라이프를 선점해야 한다. 핵가족 시대에 그저 우리 가족, 우리 자식들만 잘되면 그만이란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가 대체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어릴 때부터 이런 삶에 익숙하게끔 길들여진 탓이고, 부모들이 이를 적극 견인한 탓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모델이 그저 일류대나와 남보다 먼저 좋은 자리 선점하고, 돈 많이 벌어 그럴싸한 타이틀잡고 사는 것이 됐다.
 
‘우리’란 공감대를 저해하는 무서운 이기적 ‘틀’이다. 어릴 때부터 나름의 ‘틀’을 갖고 우리 집은 이런 집, 우리 아버지는 이런 지위다란 타이틀로 자신을 대체 포장하고, ‘나’와 ‘너’의 상대적 잣대를 재면서 이를 성인기까지 잇는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국적불명의 사회 트렌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남들 눈에 보여 지는 ‘수족관 삶’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 진 탓이다.
 
대한민국에 깊이 만연중인 'lookism(외모 지상주의)'과 ‘학벌 지상주의’는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무서운 전염병들은 방송과 언론 등도 여과 없이 부추기면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성형외과를 배부르게 하고, 대학을 서열화하고 ‘나’와 ‘너’를 차별화하면서 ‘우리’를 저해하는 암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또 컴에 입력된 인위적 데이터로 ‘인연 장사’를 하는 결혼정보업체의 난립을 부추기고, 혼기가 찬 일부 미혼남녀들이 의식 없이 동승해 ‘조건-사람’을 저울질 하며 귀한 ‘인연’의 본질을 훼손한다. 물론 이런 대체적 기류가 일부 사람들에 국한되며 반대 쪽 사람들로 인해 아직 이 사회가 유지된다는 자위도 해 본다.
 
‘나-너’의 연으로 비롯돼 ‘우리’로 이어지는 인연 길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다. 불가에선 삼천 생(生)의 인연이 있어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논한다. 모든 만남에는 다 뜻이 있고, 무릇 귀하지 않은 인연이 없다는 말이다. ‘연’의 귀함이 이러 할진데 하물며 부모-자식, 부부를 비롯해 현재 나와 닿은 인연들은 어떠할까. 그러나 현 시대의 우리는 언제부턴가 ‘영원을 보는 시선’을 잊고 사는지 모른다.
 
어설픈 정체불명의 학습된 자신의 ‘틀’과 ‘아상(我相)’으로 자신의 맘에 테두리를 친 채 ‘상대’를 가리고, 분별하며 쉬이 상처를 준다. 결국 삼천 생의 긴 시간의 의미는 한 순간 부질없이 흘려보내고, 먼 뒤안길 뒤에 후회를 하는 우매함을 늘 반복한다. 진정 ‘인연’을 중시하는 이는 길가에 핀 들꽃조차 가벼이 여기지 않음이 여기서 기인한다.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만큼 더한 허물은 없다.
 
현재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등 대한민국의 그 어느 것도 국민들 가슴을 시리지 않게 하는 게 없다. ‘나-너’의 상대적 대치 속에 ‘우리’란 공감대가 상실된 대한민국. 그 서글픈 현실 속에 중-서민 국민들의 한숨과 회한이 불투명한 미래와 함께 짙게 녹아 있다. 앞일은 아무도 모르고, 정답 없는 게 삶이라지만 ‘희망’조차 허물면 삶이 너무 공허할 것 같다. 2002 월드컵 당시 하나 된 ‘우리’를 연출했던 대한민국, 그 순간을 재차 희망하는 게 요원한 염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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