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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윤숙영 “뜨거웠던 그해 여름…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21년 ‘잠수’ 끝내고 깜짝 개인전…추상화 지나 뜨겁고 대담한 인물화 ‘몰두’…
강렬한 붓끝에 머문 얼굴은 가족, 이웃, 여행지 마르세유에서 마주친 사람들

김혜연 기자 | 기사입력 2025/07/25 [12:02]

▲ 갤러리밈에서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윤숙영. 여름을 살아내는 얼굴들을 강렬하게 담은 작업으로 주목을 끌었다.

 

화가 윤숙영을 처음 만난 건 우연 같으면서도 어쩐지 정해진 순서 같던 날이었다. 유난히 무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여름날 주말 아침. 서양화가 허미자 작가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안산자락길 산책을 하던 길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허 작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전시 이야기로 흘렀다.

“며칠 전 모임에서 20여 년 만에 전시회를 앞둔 후배 작가를 만났어요. 그 화가도 연희동 사람이 됐대요. 한 달 전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하네요.”

 

안산자락길 초입에 조성된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 개운해질 무렵, 스치는 대화와 발소리 사이로 허 작가가 말하던 그 ‘연희동 이웃’이 저편에서 걸어왔다.

 

그렇게 동네 뒷산 산책에 나선 윤숙영 작가와 처음 마주쳤다. 요란한 인사를 주고받지도, 적극적인 소개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허 작가가 “이 후배가 그 작가”라고만 소개하자, 윤숙영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곧 전시를 해요. 아주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이에요.”

 

‘아주 오랜만에’라는 말은 늘 그렇듯 뒷이야기를 예고한다. 망설임이 있었을 테고, 기다림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통과한 마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다시 세상 앞에 그림을 내어놓는 용기는 또 어떤 색깔일까. 괜히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가벼운 인사처럼 건넨 “그럼 전시장에 한번 가봐도 될까요?”라는 말 끝에, 덜컥 인터뷰 약속까지 잡혔다.

 

‘전업 화가’로 산다는 것은

며칠 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사거리 근처 갤러리밈에서 윤 작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산책길도, 황톳길도 아니고, 뜨겁고도 대담한 그림들 앞에서였다. 윤숙영은 7월 9일부터 27일까지 갤러리밈 3전시실에서 ‘Rhapsody in Summer, 그해 여름은 뜨겁다’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04년 전시회 이후, 무려 21년 만의 외출이었다.

 

갤러리 안은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 않은 분위기였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던 날 이른 아침, 관람객은 없었고 윤 작가 홀로 전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인터뷰는 그렇게, 조용하고 무겁게 시작됐다.

 

2004년 이후 오랜 시간 전시 활동을 멈췄다가 다시 개인전을 열게 된 이유를 묻자, 윤숙영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듯 울컥하며 말을 멈췄다가 눈물을 훔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시라는 형식 자체가 내게는 좀… 괴로웠어요.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을 내놓고 ‘직업 화가’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늘 ‘보상’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참담한 감정이 몰려왔고요. 물론 화가의 본령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죠. 그런데도 허망함은 그림자처럼 따라왔어요.”

 

윤숙영의 고백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 우리 시대 ‘전업 예술가’가 감내해야 했던 구조적 풍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 윤숙영은 이번 개인전에서 2019년부터 최근까지 그려온 유화 14점을 포함해 총 18점을 선보였다.

 

세종대 회화과를 나온 윤숙영은 스물일곱 살에 ‘더 성공한 예술가’를 꿈꾸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코웨건 회화·조각학교에 적을 두고 ‘내공’을 쌓았다. 역량 있는 작가로 주목받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돼, 창작 활동 지원을 받기도 했다.

 

윤숙영의 남편은 서울대 조각과 출신 예술가 겸 학예연구사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 시절 만나 결혼했고, 부부 예술가로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미술계 안팎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위계는 언제나 윤숙영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남편은 서울대를 나왔고, 나는 세종대를 나왔죠. 뉴욕에서 활동할 땐 몰랐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불평등을 피부로 느꼈어요. 우리 두 사람 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지만 처지는 달라졌어요. 남편은 자연스레 대학 강의를 시작했지만, 나는 아무 데서도 안 써줬어요. 하다못해 모교에서도 서울대, 홍대 출신만 모실 뿐, 나 같은 사람은… 어디서도 안 써줬어요.”

 

직업화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단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자 자괴감에 빠진 채 10년 넘게 버텼다. 그리고 결국, 2005년께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건 너무 재미없다. 그만두자.”

 

젊은 예술가로서의 불안감, 앞날에 대한 막막함까지 겹쳐지며, 윤숙영은 2004년 개인전 이후 점점 전시회와 멀어졌다고 했다.

 

“2004년까지는 그래도 해보려고 애썼는데…. 아, 이건 너무 재미없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만뒀죠. 하지만 그림은, 계속 그렸어요. 그건 손에서 놓지 못했거든요.”

 

세상의 인정은 멀고, 그림은 가까웠다. 윤숙영은 언젠가, ‘작가 노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고 했다. “기억에 압사되지 않기 위해 나는 그리는 행위를 택했다.”

 

격렬한 추상화 거쳐 인물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건 윤숙영의 생존 방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마음도 그림도 조금씩 편안해졌어요. 예전처럼 격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 주변의 사람들과 시간들에 대해 조용히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다가 그냥…내 이야기를, 덤덤히 내보이고 싶었어요.”

 

21년 만에 다시 전시장에 작품을 내건 지금,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물었을 때, 윤숙영은 덤덤하게 고백했다.

“오늘로서 전시회를 연 지 딱 열흘이 됐네요. 전시회가 일주일을 넘기면서 또 ‘그때’의 감정이 덮쳐오더라고요. 20년 전, 그 참담했던 전시의 기억을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복잡한 감정이 다시 몰려왔죠. 일주일이 지났지만 전시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고, 내 작품을 선택하는 이도 거의 없고, 또다시 마음이 내려앉더라고요.”

 

말끝을 흐리던 윤숙영 작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틀 정도는 아예 꼼짝도 못하고 집에 있었어요. 몸도 지치고, 마음도 가라앉고…. 그 누구의 말도 솔직히 위로가 되진 않았죠. 그런데 인터뷰 질의서를 받아들고 내 그림과 작업과정을 다시 돌아보니까 갑자기 반전이 오는 거예요.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세상에 꺼내놓게 됐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됐어요.”

 

윤숙영 작가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지금은 감정 정리가 된 것 같아요. 뭔가… 다시 시작해도 괜찮겠다는, 새로운 기운 같은 게 솟아나요. 그냥, 다시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뉴욕으로 가기 전, 화기 초기 시절 윤숙영은 당시 우리 화단을 휩쓸던 추상표현주의 기류에 몰두했다. 늘 번민으로 가득했던 때라서, 그 흐름은 화폭에도 묻어났다. 치열하고 뜨거운 붓질, 물감이 튀는 격정의 화면. ‘추상화가’로 주목은 받았지만 그 에너지의 기저엔 정돈되지 못한 기억의 편린과 감정의 격랑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 목마를 타고 싶던 애틋한 마음, 너무 어려서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의 임종, 굿판의 기억, 신들린 듯한 무당의 몸짓…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뒤엉켜 있었어요. 그 기억들을 어떻게든 꺼내어 캔버스 위에 나열하고 싶었죠. 엉켜 있는 건 엉킨 대로, 풀리는 건 풀린 대로 그려야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그 시절, 윤숙영은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강한 이미지’를 먼저 앞세웠다고 털어놓는다.

 

“그땐 젊었으니까요. 내 안의 깊은 걸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어요. 화가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더 앞섰죠. 남보다 다르게 보여야 한다는 욕망이 강했어요. 그 시류에 편승해서, 눈에 띄기 위한 작업을 추구했던 것 같아요.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죠.”

 

그렇게 윤숙영은 거칠고 격렬한 추상회화를 지나, 오늘의 인물화로 돌아왔다. 이제는 사람을 즐겨 그린다. 삶을 통과한 흔적, 감정이 말라붙은 뒤 남은 얼굴, 여름을 견디는 이들의 몸짓으로.

 

▲ 윤숙영의 화폭에는 가까운 가족의 서사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왼쪽은 '큰형수 하소연' 오른쪽은 '열변'.

 

“사람들 이야기 덤덤히 그려 나갈 것”

윤숙영의 작업은 분명히 달라졌다. 20여 년 전, 뜨겁고 치열했던 추상화의 물감 자국에서 이제는 사람의 얼굴, 그 뒤에 감춰진 이야기로 시선이 옮겨왔다. “이젠 나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그리고 싶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화두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거창한 문학적 상상력보다는 가까운 일상에서 찾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이 겪은 삶, 주변인들의 표정, 가족의 서사. 그 모든 것들이 윤숙영의 화폭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림이라는 건 영감이 앞서야 된다고 생각해요. 큰동서, 친동생 등 가족들로부터 ‘영감’을 얻곤 합니다. 큰동서가 칠남매가 있는 집으로 시집 와서 큰며느리로 살아낸 이력을 알거든요. 늘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신산한 감정을 담고 싶었어요. 내 여동생이 ‘내가 얼마나 힘든데’ 열변을 토하는 이유를 알거든요. 그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와 캔버스에 담았고, ‘큰형수 하소연’ ‘열변’이란 작품으로 변신했어요.”

 

서울 목동에 살던 시절, 집앞 ‘파리공원’도 그림 속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사 오기 전 20년 넘게 살던 동네에서 평범한 아줌마들의 삶을 지켜보며 느낀 감정이 자연스레 화폭에 녹아들었다.

“그냥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 편안함이 진짜든, 위장이든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우리네 삶이잖아요.”

 

윤숙영의 시선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족 여행으로 떠난 프랑스 남부에서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니스, 아비뇽, 엑상프로방스 같은 도시의 고전적 아름다움 속에서도, 윤숙영의 눈길은 자꾸만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향했고 ‘마르세유 연작’으로 이어졌다.

 

“남프랑스는 유적도 대단하고 전반적으로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마르세유는 달랐어요. 사는 게 고단한 이민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어요. 시장에 모인 가난한 사람들, 요란한 원색의 원피스를 입은 중년여성, 유모차에 애 둘, 유색인종 애엄마의 삶의 무게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의 눈을 자극했죠. 에스프레소 향기는 나는데, 그 밑으로 지린내가 풍겼죠. 질펀한 삶의 냄새랄까요.”

 

▲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역시 팜플렛 표지를 장식한 ‘마르세유 연작’이다. 윤숙영 작가도 전시장을 찾은 이가 가장 깊게 봐줬으면 하는 그림으로 ‘마르세유 연작’을 꼽았다.

 

그해 여름, 마르세유, 이민자

윤숙영은 이번 전시에서 2019년부터 최근까지 그려온 유화 14점을 포함해 총 18점을 선보였다. 그중 16점은 인물화를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 두 점—은행나무와 사루비아를 그린 작품—은 인물과 자연을 연결하는 감정의 메타포 역할을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역시 팜플렛 표지를 장식한 ‘마르세유 연작’이다. 윤 작가도 전시장을 찾은 이가 가장 깊게 봐줬으면 하는 그림으로 ‘마르세유 연작’을 꼽았다.

 

프랑스 남부의 해안도시 마르세유에서 마주한 낯선 이방인들, 거리의 여성들, 아이들의 표정들이 화면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 풍경은 그저 여행의 추억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 작가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겪은 뜨거운 감정들과 맞닿아 있다.

 

그 장면은 곧바로 윤숙영 작가를 브루클린의 어느 지하방으로 되돌려놨다. 유학 시절, 바퀴벌레가 나오는 낡은 집에서 살던 시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외로움과, 끝이 보이지 않던 막막함.

“마르세유에서 마주친 중년여성, 이민자 모습에서, 브루클린 시절의 내가 겹쳐졌어요.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그림으로 옮기게 되더라고요.”

 

그해 여름 여행지에서 마주친 기억은 단순한 정서적 풍경을 넘어 삶의 체취와 닿아 있었다. 그래서 전시회 타이틀도 ‘그해 여름’으로 잡았다. 그해 여름이란 단어 안엔 수많은 시간이 겹쳐져 있었다. “여름은 늘 감정이 극대화되는 계절 같아요. 그해 마르세유의 여름은, 특히 더 뜨거웠고요.”

 

뉴욕의 혼란스러운 시간, 파리의 정처 없음, 서울 연희동의 고요한 현재. 그리고 그 사이의 그림자와 빛들. 그것들이 윤숙영의 붓끝에서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색, 하나의 여름으로 되살아났다.

 

▲ 그해 여름 여행지 마르세유에서 마주친 기억은 단순한 정서적 풍경을 넘어 삶의 체취와 닿아 있었다. 그래서 전시회 타이틀도 ‘그해 여름’으로 잡았다.

 

“과감한 터치는 나만의 재능”

“내 그림에서는 강렬한 색감, 거칠고도 과감한 터치가 돋보인다고들 해요. 터치는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저절로 뿜어져나온 일종의 재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사회성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마르세유 연작’을 통해 나의 자발적 고립, 현대인의 소통 단절 등을 말하고 싶었어요.“

 

윤숙영의 회화는 그렇게 ‘강렬한 색채’를 지나 ‘살아낸 감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뜨거운 여름의 빛 속에서도 어딘가 서늘한 그늘이 있는 얼굴들. 윤숙영은 그 얼굴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다.

 

“사람을 그리는 건 어렵지만…. 자꾸만 사람이 궁금해졌어요.” “그림은 결국 ‘사람을 다시 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리는 게 아니라, ‘보다가 멈춰지는 순간’을 그리려고 하죠.”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역설적인 감정이 깃들어 있다. ‘서글픈 행복’, ‘행복한 불안’ 같은, 분열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삶의 양면들. 윤숙영은 여전히 이 복합적인 감정의 층위를 ‘버텨내며’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오래전 노트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엉켜져 있는 것은 엉켜져 있는 대로, 풀리는 것은 풀리는 대로 나열하기 위하여. 오늘도 붓을 잡고 캔버스 앞에 앉는다.”

 

그 오래된 문장은 오늘날의 윤숙영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서문이다. 여전히 사람을 그리고, 여전히 삶을 포착하고, 여전히 기억과 싸우며, 다만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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