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는 지난 2월22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979년의 문서들을 중심으로 모두 1270여 권(18만여 쪽)의 제17차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소련, 10·26 미국 배후說 언급 소련 정부 고위인사가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암시하는 언급을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에게 한 것으로 밝혀졌다. 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휘류빈 소련 외무차관은 박 전 대통령 서거 사흘 뒤인 1979년 10월29일 모스크바에서 우어모도 소련주재 일본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독재자가 살해된 이번 사건은 소련을 놀랍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kcia(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말했다. 휘 차관은 이어 “소련으로서는 북한의 평화통일 정책을 지지해 왔다”면서 한국이 평화통일을 거부해 왔다”고 덧붙였다고 같은 달 31일 당시 주일본대사가 서울 본부에 보낸 전문은 기술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역시 박 대통령의 암살 배후로 미국을 지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오사카 총영사도 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오사카 총련이 같은 달 31일 “박 대통령의 죽음은 체제 내부에서 미국과 협력하에 미리 저지시킨 것”이라며 반미투쟁을 호소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당시 주홍콩 총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의 <인민일보>는 같은 달 30일 “박 대통령 시해사건은 권력쟁탈이라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큰 배후와 의도에서 나온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12·12에 불쾌한 미국 미국은 당시 신군부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으며 정치적으로는 한국의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12·12 사태와 관련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홀부르크 차관보는 쿠데타 발생 이틀 만인 14일 오후 5시(현지시각)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를 초치,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는 미국 내에서 한국에 불리한 여론이 크게 대두될 것”이라며 “군 체제가 너무 급격하게 변동돼 군 지휘 체계가 동요될 수 있어 김일성이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도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3일 최규하 대통령,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난 데 이어 19일 박동진 외무장관을 면담해 “한국군이 미국측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히 “미국 군부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이러한 불만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며 “미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민간정부와 상대할 것이며 민간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hundred percent support)”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당시 외무부는 김용식 대사에게 훈령을 내려 △(정승화 육참총장 체포와 관련한 군내 동요) 사태가 잘 수습됐으며 △정치발전 체계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최규하 정부의 입장을 홀부르크 차관보에 전달하도록 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라”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가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국의 인권, 유신체제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겪은 사실도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카터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인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북한 도발의 실질적인 억제력으로 작용해 왔으며, 주한미군 철수 시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과 전쟁억제 전력이 약화되어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한·미 정상회담 때 제기할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내용은 외교통상부가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이 경과해 2월22일 공개한 1979년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외무부는 당시 카터 대통령의 방한(1979년 6월30∼7월1일)을 앞두고 국방부 등과의 정책협의를 위해 작성한 한·미 정상회담 의제 관련 문건에서 “주한미군 지상군의 한국주둔은 북괴도발에 대한 실질적인 억제 전력 역할을 수행해 왔고, 한국은 미국을 반공보루의 혈맹으로 가장 신뢰하고 있다”며 “북괴로 하여금 군사, 정치적 오판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정책 시까지 철군을 중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부는 카터 대통령 방한 시 열릴 한·미 경제장관 회담에서도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집중 제기하는 한편, 카터 행정부의 유신체제 비판이나 한국의 인권개선 문제에 대해선 남북특수상황에 따른 것임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한·미 경제장관 회담을 위해 준비된 외교문건에는 한국 인권문제에 대해 “한국은 미국과 같은 정치 목표를 추구하고 있으나, 북괴의 집요한 군사위협에 직면해 국가안보를 보전하고 국민복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유신체제에 대한 미국의 비판에 대해선 “유신체제는 한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 여건에 가장 부합하는 체제이고, 극소수의 종교인이 절대다수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생각함은 극히 부당하다는 점을 역설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뒤, 1977년 7월 10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 최초 철군일정이 합의되면서 표면화했다. 이후 1978년 4월21일 카터 대통령은 당초 철군계획을 조정,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1978년 제1진 3400명이 1단계로 철수했다. 그러나 1진 2단계 2600명(1979년까지), 2진 9000명(1980년 말까지) 철수계획은 박 대통령의 서거 이후 미국의회와 군의 반대에 막혀 무산됐다. ▲김대중 석방 문제로 신경전 정상회담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사이러스 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같은 해 7월1일 오후 신라호텔에서 정상회담 결과를 주제로 연 기자회견에서 “한국측에 억류자 명단을 전달했으며 이들을 조사해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면서 “(한국정부가)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석방을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고려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밴스 장관은 ‘한국의 인권문제가 어떻게 논의됐느냐’는 질문에 대해 “카터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 인권문제를 자세히 토의했으며 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점을 명확하게 설명했다”면서 이같이 답했다. 그는 이어 “(정치범) 명단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가 작성한 것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작성한 것 등 2가지로 대사관에서 작성한 것은 명단이 길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짧다”면서 “이를 내가 직접 박동진 한국 외무장관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밴스 장관은 “(두 명단에 들어간 인사들은) 100명 이상”이라면서도 ‘김대중씨가 명단에 포함됐느냐’는 질문에는 “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면 전부 다 거명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답하지 않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박정희 서거 후 조의 쇄도 외교부가 2월22일 전격적으로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조의 표명이 쇄도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각국 정상들은 박 대통령 서거 후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에서 대부분 박 전 대통령이 18년간의 집권기간 이룩한 경제업적을 칭송했다는 것. 오히라 마사요시 전 일본 총리는 “박 대통령은 1960∼1970년대를 통해 우수한 지도력으로 한국의 발전을 이끈 인물”이라며 “일·한 우호관계 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박 대통령은 미국의 확고한 친구이자 협력자였다”며 “그가 한국 경제를 놀랄 만큼 발전시킨 역할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박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을 떠나면서 박 대통령의 국가와 국민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박 대통령 서거는 한국민에 커다란 손실이며 한국의 경제사회적 발전이 계속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제3세계 국가들의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경제부문의 업적에 집중됐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역동적 리더십은 한국인에게 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일으키게 한 능력과 열망을 불어넣었다”며 “박 대통령의 통치기간 이룩한 한국의 발전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톨버트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박 대통령은 한국의 중대한 경제발전과 제3세계 국가들 간 협력을 증진시켰다”며 “그의 부재는 아시아 및 세계의 손실”이라고 평했다. 이와 관련,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당시 20대의 나이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앞으로 온 조전도 눈길을 끌고 있다. 멜리 당시 주한 터키대사는 외교사절단을 대표해 박 전 대표에게 “당신의 추앙받는 아버지인 박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에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며 “박 대통령에 대한 외교사절 및 외국인 사회의 애도가 큰 위로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한편, 당시 외무부가 서거 이후 11월19일까지 재외공관에 접수된 조의현황을 파악한 결과 모두 3만3742명이 빈소를 찾은 가운데 조전 289건, 조의서한 349통, 조화 224매, 조의카드 16매, 조시 10건, 추도식 및 추도 예배 51회, 조의전화 118회, 부고 관련 신문광고 1건이 접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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