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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관의 시집 '봄에게 길을 묻다' 작품평

긍정적 도시인의 일탈과 자연친화적 공동체의 회복을 담아

이길연 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2011/01/08 [14:20]
1. 도시적 일상의 일탈과 그림자, 조영관은 왜 시인가?

  조영관은 경제인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공부를 마친 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도 경제 분야 금융원에 종사하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경제 관련 저서를 출간한 바 있으며, 그의 저서가 시중에서 절찬리 판매되고 있다. 그런 그가 시를 쓰고 있다.

  필자는 종종 말하곤 한다. 문학은, 시는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하는 놀이라고. 특히, 소외된 자가 혼자서 하는 놀이라고 강조한다. 마치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혼자서도 놀 수 있는 공기놀이와 같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조영관은 경제 전문가로서 무뢰한 일상도, 궁핍한 환경에 처해 있지도 않다. 그의 천성 또한 지극히 긍정적이요, 낙천적이며 이웃과의 화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가정에는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몸을 기댈 수 있는, 지극히 사랑하는 처자가 있다. ‘선녀탕 맑은 물에’ ‘치마 무릎 위로 올려 잡고, 첨벙 뛰어’들어 ‘물속에서 ’잉어 두 마리 되어’(-<선녀탕에서>) 뛰노는 두 딸은  “보석처럼 빛나고/ 딸기처럼 윤이 나는/ 어여쁜 /나의 소중한 보물”(-<딸기 아빠>)인 것이다.
 
▲ 조영관  시인   ©브레이크뉴스

  그런 딸들에게 “놀이공원 간다고 약속하고선/ 갑자기 중요한 일 생겼다고 연기하고/ 집에 일찍 오겠다고/ 엘리베이터 타면서/ 말하고 선 회식 약속/ 생겼다고 늦게 오고/ 학교 공개수업/ 오겠다고 새끼 손 걸고/ 저녁 늦게 케익 하나/ 사가지고 오”면서 “선생님, 아나운서 되라고 하더니 이제는 가수가 되라”(-<아빠는 욕심쟁이>)고 요구한다. 그에게는 또한 “시간 없다고/ 식탁에 안지 못하면/ 그릇 들고 쫓아다니며/ 입에 넣어 주고//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 먼저 나가서 버튼 누르며” 잡아두는 아내가 있다. 그는, 그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도시의 일상인이자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행복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시를 쓰는가? 그는 시를 쓰지 않고도 한 세상을 훌륭히 살아갈 능력이 있으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는 현대 도시인의 모범적인 생을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은 결국 홀로 걷는 길이요, 다양한 형태의 삶을 영위해야 할 지난한 여행길이다. 그렇기에 현대인의 도시적 삶은 화려한 직장과 단란한 가정, 성공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삶의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아파트 거실 문을/ 열자마자/ 한 두 걸음 걷다가/ 쓰러졌네// 성공의 꿈 -(중략)- 세상과 가정을/ 사이에 두고 몸을 반쯤 걸친 채/ 나는 가쁜 숨 몰아쉬네.”(-<아빠의 비애>)서 엿보듯이, 화려한 현대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명암을 형상화하고 있다. 경쟁사회가 보여주는 일상인들의 애환이다. 세상과 가정 사이에서 몸을 반쯤 걸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야 하는 현대 도시인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박한 현대인들의 삶 가운데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누구인가? 되묻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앞만 보고 질주하는 현대인들은 불현듯 자신의 자화상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물음에 대해 “대답 대신 내게 묻는 담쟁이// 왜 하필/ 햇빛도 멈춰 서 버린/ 회색빛 건물 속에 갇혀 살며/ 힘들다고 불평하는가”(-<담쟁이에게 묻다>)라는 되물음 받게 된다. ‘햇빛도 멈춰 서 버린 회색빛 건물 속에 갇혀 사는 것’이 결국 현대 도시인들의 삶의 방식이요 현주소이며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도시적 정서를 형상화하는 그의 작품이 조명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도시인들은 자신만의 일상적인 일탈을 꿈꾼다. 일상적인 일탈이란 드라마 속의 삼각관계만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처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며 정립할 수 있는 일상인들의 심리적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연한 기회에 일상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데, 어릴 적 가슴 태웠던 짝사랑의 희억이 이미 기억 저편 아스라이 사라졌다가 우연히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년은 아카시아 꽃 가지를
소녀에게 건네며 손을 잡아본다.
“나쁜 짓하면 가시로 찌른다”
소녀는 토라지며 말한다.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담긴
아카시아 나무들이
꽃잎은 떨구었어도
나는 그 향기를 보낼 수 없었다.
                             (-<아카시아 꽃 향기> 일부)
 
  동구밖 아카시아나무 아래서 그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은 두근거리고 다가온 그에게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난다. 소년이 건네준 꽃은 역시 화려하지 않은 아카시아지만 향기는 정신을 혼돈케 하는 사랑의 매체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우리 문학사 가운데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가 기억난다. 소녀를 향한 순백의 짝사랑이다. 그러나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은 다소 엉뚱하다. “꽃가지를/ 소녀에게 건네며 손을 잡”는 기지를 발휘한다. 소녀 역시 만만치 않아 “나쁜 짓하면 가시로 찌른다”며 응대하는 그야말로 호락호락하지 않는 성질이다. 어찌 보면 <소나기>에 등장하는 순박한 짝사랑보다 훨씬 현대적이다. 이들의 성격은 보다 입체적이고 진화되어 있다. 이런 아카시아꽃을 배경으로 어릴 적 풋사랑을 묘사하는 형상화가 이채롭다. 

  시인의 일상적 일탈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감지된다.
 
요란하게 떨어지는 비는
차창을 두드리다
흩어진다

이태리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
‘그대와 함께 떠나라’는
노래가 비 되어
가슴으로 젖어 든다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며
그대를 누를까
맘 졸였지

창 밖의 와이퍼가
나를 향해 안부 전하며
이별의 손짓을 하네
                    (-<그대와 함께 떠나라> 전문)
 
  문학작품 가운데 등장하는 ‘비’는 특별한 기능을 한다. 눈보다도 비는 등장인물들에게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작가는 비가 오는 날을 통해 사건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거기에 음악을 더하면 사건을 진전은 더욱 가파르게 진행된다. 인용 시 <그대와 함께 떠나라>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킨다. 노래 ‘그대와 함께 떠나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일상을 파괴하고도 남는다. 노래는 어느새 가슴을 파고들어 비가 되어 젖어든다. 누가 이런 무드에 반기를 들겠는가. 어느덧 휴대폰에 그려진 그대의 얼굴에 눈, 코, 입 하나씩 번호를 누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화자는 “휴대폰 만지작거리며/ 번호를 누를까 말까/ 맘 졸”이며 결국은 현실을 탈출하지 못한다. ‘창 밖의 와이퍼’만 내 대신 손을 흔들지 나는 여전히 현실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인이 영위하는 삶의 방식으로, 소시민의 애환만이 빗물 되어 차장을 흘러내리는 것이다.
 
별이 총총 보이는
어두운 밤
아파트 콘크리트벽 넘어 들려오는
우리 가족 웃음 소리에
반가움이 밀려왔지.

기쁜 마음에 헛기침하며
거실문을 들어서니
바퀴벌레처럼 각자의 방으로
모두 사라지네

사람은 있으나
반겨 주는 이 없고
웃음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어느 중년은 아직 온기가 있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네
                      (-<어느 중년 남자의 위기> 전문) 
 
  ‘아파트’는 현대인들의 도시적 삶을 표상한다. 도시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아파트는 자연 친화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더욱이 공동체적 공간으로 인간 본성의 그리움과 소통을 충족시켜주는 장소와는 거리가 멀다. ‘콘크리트 벽’이 표상하듯 사람과 이웃을 이어주는 공간이 아닌 단절의 공간이며 소외의 공간이다. 이러한 삭막한 도시의 일상적 삶에 지친 시적화자가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며 ‘기쁜 마음에 헛기침하며/ 거실문을 들어서’지만 가족들은 ‘바퀴벌레처럼 각자의 방으로/ 모두 사라지’고 만다. 물론 여기서 ‘바퀴벌레’란 재빠르게 도망간다는 속도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빛을 두려워하고 음습한 곳에서 서식하는 부정적인 바퀴벌레를 시적 용어로 사용한 것은 개인적인 시적 모티브를 넘어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소외와 단절의 일상적 이미지를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뒤이어 “사람은 있으나/ 반겨 주는 이 없고/ 웃음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구절 가운데서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어느 중년은 아직 온기가 있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네”라는 구절은 한 개인의 인간적 소외를 넘어서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권위 상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결국, 시적화자가 처한 이런 현상은 현대사회의 자기중심적 삶의 패턴으로 말미암아 가정으로부터 아버지의 격리와 부재 현상을 극렬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조영관은 이러한 개인과 가정적인 소외현상을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시켜 조망하고 있다.  
 
식당 앞에 놓인 찜질방 할인 쿠폰
눈에 띄어 집어 들고
나그네와 함께 묵는 우리 집 만들었지.

매일 밤 옆 사람 바꿔가며(?) 잠 잔다고
좋다할지 모르지만

낯선 사람 코골이 소리에
뒤척이다 보면 어느 새
내 옆 자리 비어 있네
                     (-<버팀 경제> 일부)

  인용한 작품은 사업에 부도난 시적화자가 평시 알고 지내던 지인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찜질방에 기거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실상, 찜질방의 용도가 일상적인 노동의 피로를 회복하고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종종 숙박의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타지에서 출장 온 직장인들이나 여행객들에 의해 애용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삶의 여유가 제거된 채 사업에 실패한 극단적인 처지에 내몰린 화자가 기거해야 장소인 것이다. 시적화자는 ‘매일 밤 낯선 사람’과 동거해야 하는 처지로 ‘코골이 소리에/ 뒤척’여야 하는 공간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비어 있는 옆 자리’를 확인하며 소외와 단절을 인식해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imf라는 사회적 위기를 모면한 바 있다. 사업체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치며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않게 불어 닥친 쓰나미 현상에 가정은 붕괴되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공원의 빈터에 텐트를 치고 생활해야했고 직장인들은 거리로 내몰린 채 서울역이나 다리의 난간 밑에서 기거해야 했던 아픈 기억들이 있다. 이러한 우리의 뿌리 뽑힌 일상과 단절된 삶의 실상을 천착하여 작품을 통해 형상화하는 조영관의 사회의식은 돋보이며 반면, 우리에게 또 다른 경종을 울리고 있다. 
 
  2. 농촌사회의 혈연적 공동체와 퇴락한 고향의 회복 

  매스미디어 정보화시대의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극은 자연과 고향의 상실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본연의 고향인 것이다. 도시적 삶의 출발점이자 도시인들의 정서적 정착지는 역시 자연이다. 자연은 결국 도시적 일상과 정서 가운데 상처 받고 내몰린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조영관의 의식 저변 가운데는 자연을 향한 강렬한 희구와 붕괴된 고향에 대한 복구를 소망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작품 가운데 어릴 적 고향에 관한 체험의 재구성으로 나타난다. ‘큰 가위질 소리’에 “할머니 고무신과/ 수주병을 들고 뛰어나가는”(-<엿장사>) 묘사나 ‘작두 펌프/ 위에’ 조롱박 물 채워지면 “작은 물은/ 큰 물을 불러 오느라/ 괴로워 신음하는(-<마중물>) 체험은 잊혀진 고향을 불러일으킨다.     
       
시골 마당 한켠
우리 가족과 누렁소까지
모기를 막아주는 모깃불이 그리워지네요.

여름날 초저녁 마당에는
모깃불 쑥대 향기가 나고
아버지는 지게 위
젖은 소 깔 한 뭉치 내려
모깃불 위에 덧 입혀
긴 밤 오랫동안 가게 합니다.

고향의 젖은 풀향기는
잔잔하게 초가집을 에워싸고
내 마음 속 쑥 향기 모깃불은
아직도 솔솔 피어납니다.
                       (-<모깃불> 일부)
 
  위의 인용문 가운데 ‘쑥대 향기’ 피어나는 모깃불은 적어도 60-70년대 농촌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낯선 시어들이다. 농촌의 마당 한 가운데 피어오르는 쑥 향기 모깃불은 흑백 영화나 tv문학관을 통해서나 엿볼 수 장면들로, 에프킬라나 전자모기향에 익숙한 세대들에게는 먼 옛이야기에나 나올 법만 이야기다. 조영관은 이런 시골의 저녁 풍경을 “지게 위/ 젖은 소 깔 한 뭉치 내려/ 모깃불 위에 덧 입혀”라는 묘사를 통해 성장기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단어의 배열이 아닌 구체적인 토속적 시어를 통해 정감어린 농촌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나간 기억 속 “고향의 젖은 풀향기는/ 잔잔하게 초가집을 에워싸고/ 내 마음 속 쑥 향기 모깃불은/ 아직도 솔솔 피어”나는 그리움의 전형으로 되살리고 있으며, 이는 아직도 시적화자의 현실 가운데 진행형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시각화를 통한 농촌사회의 정서적 재현은 현대 도시인들의 심정 가운데 이미 붕괴된 고향을 재구해 내는 모티브와 토양이 되고 있다. 특히, 문학적 장치로써의 후각적 묘사를 이렇게 성공시키기는 좀처럼 흔치 않는 일이다. 

  이러한 고향에 관한 그리움과 정서는 다른 작품에도 나타난다. ‘장독대 앞 봉숭아와 채송화는/ 자연스레 화단을 이뤄’ ‘검게 그을린 부엌 아궁이 속/ 솔잎 타 들어가는 소리와/ 밥 익어가는 냄새’(-<앵두나무>)에서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고향을 재구성하고 있다. 또한  “여름날 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대청마루 위에/ 동네에서 맨 처음 새로 산/ 이장님 댁 다리가 네 개 달린/ 흑백 금성 텔레비전 앞에/ 동네 사람들 하나씩 모여든다.”로 시작되는 작품은 서술로써 구체성을 확보한다.
 
오늘은 김일 선수가 레슬링 하는 날
사각의 링 안에서 일본 선수의
반칙으로 거의 패할 즈음
박치기로 상대를 제압해
역전을 시킨다.

승리의 함성소리로
멍석 위 사람들은 난장판이 되어
서로들 박치기 흉내를 내다가
이빨이 부러져 피가 나도
툴툴 털고 일어난다.

인심 좋은 주인댁에서
준비한 빠알간 수박 나눠 먹으며
그렇게 농촌의 여름밤은
시원하게 익어간다
                    (-<멍석 위에서> 전문)
 
  근대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문화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물론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텔레비전이다. 대중매체로서의 텔레비전은 여러 가지 생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혁명을 유도했다. 놀이문화가 궁핍한 당대의 텔레비전 등장과 함께 국민적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레슬링이었다. 특히, 레슬러 김일 선수는 그야말로 당대 국민적인 영웅이었다. 프로 레슬링의 특성상 경기 운영에 관한 특성이야 어떻든지 간에 당대 국민들의 정서와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대리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링에 올라와 불법과 반칙을 일관하는 무법자를 징치하거나 특히, ‘일본 선수’를 응징하는 그의 박치기는 대중들에게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을 한 순간에 해소시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했다. 이로써 모든 국민의 이목과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승리로 말미암아 “멍석 위 사람들은 난장판이 되어/ 서로들 박치기 흉내를 내다가/ 이빨이 부러져 피가 나도/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모든 감정을 용해시킬 수 있었고 서로에게 관대했다. 더욱이 “인심 좋은 주인댁에서/ 준비한 빠알간 수박 나눠 먹으며/ 그렇게 농촌의 여름 밤은/ 시원하게 익어”갈 수 있을 만큼 하나의 농촌공동체를 이뤄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공동체의식은 이어 혈연적 공동체로 발전해 나간다. 
 
엄마 손잡고
이른 새벽 교회 종소리 들으며
걷던 때가 그리워진다.

불록 솟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세월의 흔적을 역력히 남기고
마른 손 위로 튀어난
핏줄의 헐떡임이
내 가슴에 요동쳐 온다.

이 모습 그대로도 좋으니
오래 사시며
자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소서.
                   (-<자식들의 버팀목> 일부)
 
  시적화자는 어렸을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외할머니 댁을 방문한 모티브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흰머리에 등 구분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할머니는 저런 모습이구나.’하는 생각이 어린 마음 가운데 각인되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때의 젊은 어머니가 이제는 등 구분 할머니가 되었고 이제는 “마른 손 위로 튀어난/ 핏줄의 헐떡임이/ 내 가슴에 요동쳐”오는 것이다. 어머니 손 위 핏줄의 헐떡거림이 내 가슴으로 전달된다는 표현에서 시적 대상인 어머니와 시적 주체인 화자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세월 앞에 점차 부식되어 무너져가는 어머니에 관한 정서가 가슴에 요동쳐 애잔한 마음을 일궈내는 것이다. 이러한 혈연적 합일은 그의 종교관으로도 이어진다. 작품 가운데 “엄마 손잡고/ 이른 새벽교회 종소리 들으며/ 걷던 때”의 행간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어머니와의 혈연적 합일은 이런 신앙적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신앙적 이미지로는 “세월의 각질 앞에서/ 부끄러워/ 처음엔 뽀얀 손을/ 거부했나 보다”(-<세족식> 부분)의 시적 모티브로써,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성서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가 하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경쟁과 질투 속에 미움이 가득찬 친구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내가 먼저 손 내밀고 싶’다는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결국, 어머니는 이미 늙고 노쇠했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지켜주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희구하는 신앙의 합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런 혈연적 공동체의식은 <민둥머리 아버지>에서도 나타난다. 이웃마을 행사에 참석했다가 “차가운 빵 하나// 먹지 않으시고/ 손자를 위해서 남겨오”시는 하얀 도포 입으신 할아버지, 검은 머리가 갈색을 지나 이제는 흰머리로 변해가는 아버지가 어느덧 그런 할아버지와 일치가 되어 시적화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혈육에 대한 다양한 형상화는 농촌 공동체의식의 회복을 도모하여 현대사회의 메마른 정서를 새롭게 부활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며칠 동안 부산했던 자리
자식들은 떠났지만
크고 넓기만 한 안방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다.

안방구석에 주인 잃은
꽃 양말 한 짝 굴러다니고

마당에 쌓인 눈 헤집고
다닌 자동차 바퀴 자국은 휑하게
남아 있다.

만나는 기쁨보다
보내는 아쉬움 커지고
먹다 남은 찰떡만이 접시 위에 굳어져 가네.
                                        (-<텅 빈 고향집> 일부)
 
  위의 인용된 작품은 명절을 맞아 자식들이 시골집을 다녀간 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각 단락마다 독립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크고 넓기만 한 안방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데 ‘주인 잃은/ 꽃 양말 한 짝 굴러다니고’ 눈 쌍인 마당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 휑하게/ 남아 있’으며, 보내는 아쉬움이 커져 ‘먹다 남은 찰떡만이 접시 위에 굳어’가는 장면이다. 결국, 이와 같은 장면들을 담고 있는 ‘텅 빈 고향집’은 결국,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는 우리 농촌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이미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인 농촌은 ‘꽃 양말 한 짝 굴러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편리함의 상징인 자동차가 마당에 쌓인 눈을 헤집고 바퀴 자국을 남기듯이, 개발이란 명목으로 우리의 농촌과 자연은 파헤쳐지고 훼손된 지 오래다.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결국 자신의 생명줄인 자연을 파헤치고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혈연적 가족공동체를 구가하는 조영관의 시의식은 <텅 빈 고향집>과 같은 작품의 형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녹이 슨 축구 골대는/ 하얀 칠 벗겨지고/ 낡아서 찢어진 그물/ 바람에 흔들린다.// 이름 모를 풀들/ 황량한 운동장을/ 채우고/ 뛰놀던 아이들을 기다린다(-<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확장되고 있다. 결국, 텅 빈 농촌은 ‘하얀 칠 벗겨지고/ 낡아서 찢어진 채 바람에 흔들’린 채, 생명과 번영, 성장의 상징인 아이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영관의 현실의식은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절박함을 더해주고 있다.   
 
  3. 긍정적 계절의 순환론과 자연친화적 세계관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자연과 인간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나? 우매한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도교적 발상의 해답이 아니어도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자연 앞에 누가 자유스러울 수 있는가? 되짚어 자연 앞에 누가 자유스럽지 않을 수 있는가? 역시 우매한 질문이다. 분명한 것은 자연과 인간이 불가분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조영관의 시세계는 지극히 긍정적이고 따뜻하다. 계절의 순환론과 자연의 질서 앞에 지극히 순종적이다. 이러한 질서 앞에 온화함과 순조로움이 깃든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다른 계절보다 봄을 노래한 시가 많이 엿보인다. ‘아직도 북쪽 바위 절벽엔/ 하얀 얼음 그대로/ 겨울을 붙잡고 있’(-<봄은 흐르고>)어도 봄은 오고 있고, “세찬 찬바람에도/ 외롭다 아니하고/ 겨우내 떨어지지 않은/ 잎새 흔들며 반가워”한다. “숲과 나무들은 봄비에 젖어/ 갈증을 해소하고/ 봄은 잉태를 시작”(-<봄을 기다리며>)하는 것이다. 특히, ‘하얀 얼음이 겨울을 붙잡고’ 있다는 묘사나 ‘봄은 잉태를 시작’한다는 의인화는 자연에 대한 그의 시적 직관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자연의 질서 앞에 순종할 때 겨울의 시련을 극복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봄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계절에 관한 시간적 순환론은 ‘갈증을 해소’함은 물론, “경기 불황도/ 봄 소식에는/ 이기질 못하고/ 마음은 노오란 꽃망울을/ 벌써 터뜨”리고(-<남촌 마을에서 전해주는 봄 소식>)에서 엿보듯이 힘든 경제마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봄을 알리는 노오란/ 산수유꽃을 시작으로’ “시차를 두고 출발한/ 아름다운 꽃은/ 바턴을 건네주고/ 봄 선수는 굽은 길 마다하지 않고/ 달리기를 시작한다.”(-<봄꽃의 향연>)에서는 화신(花信)이 북상하는 것을 의인화를 통해 마치, 남도에서부터 릴레이 마라톤 경주라도 하듯이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개화에 관한 형상화는 또 다른 형태로도 나타난다. “산수유꽃 선발대가 되어/ 노란 깃발을 세우니/ 연분홍 진달래와/ 노오란 개나리가/ 행군을 시작한다.” -(중략)- “준비된 봄의 전사들은/ 나를 따르라// 겨울이 지나간 자리/ 봄은 소리 없이 메꾸어 가며/ 북쪽으로 전진해 간다.”(-<준비된 봄은 나를 따르라>)의 착상은 마치 유아들의 병정놀이나 군대의 진격 장면을 연상케 한다. 순차적으로 피어나는 꽃을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며 북진하는 기세야말로 선봉장을 자임하는 시적화자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의식의 자유로운 발상은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시창작의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세월이 빠르다고 탓하고
세상 인심이 변했다고 머리 흔들고
자연만이 영원한 것이라 생각했다

연푸른 새순이 숨어 있는 나무를
알지도 못하고
꽃망울 터트리려는
철쭉꽃도 스쳐가면서
나는 봄에게 길을 물어 보았지

봄은 내게 말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게 없다.
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도
사랑하고 픈 사람이 있고
눈부신 햇살이 있는 것만으로
살만한 이유가 있다
                  (-<봄에게 길을 묻다> 일부)
 
  인용된 작품은 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 가운데는 조영관의 자연관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는 시공을 제한 받는 한 자연인으로서, 유수 같은 세월을 탓하고 조석으로 변하는 세속을 원망하면서 오로지 자연만이 영원하다고 믿고 있다. 화자는 “연푸른 새순이 숨어 있는 나무를/ 알지도 못하고/ 꽃망울 터트리려는/ 철쭉꽃도 스쳐가면서” ‘봄에게 길을 물어 보’고 있다. 마치 불가의 선문답과 같다. 결국, 자연섭리의 이치를 채 인식하지 못하면서 단지 자연이라고 믿고 있는 봄에게 가야할 인생 항로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봄은 변하는 세상에 순응하라고 말한다. 화자는 그래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눈부신 햇살이 있는 것만으로/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구조를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영원할 것 같은 자연도 결국 변하나 사랑과 햇빛이 있는 세상은 살만하다는 논리다. 시적화자에게 주어진 사랑의 대상은 힘든 세상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일 수도 있다. 햇빛이란 시어 역시 대단히 긍정적인 요소이다. 지상의 물과 함께 생명을 키워나가는 원천으로, 사랑과 상응할 수 있는 요소다. 결국, 시적화자는 우회적인 선문답 가운데 자신이 가야할 삶의 방향과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가운데 계절에 관한 시적 이미지는 봄 외에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오월의 장미>에서는, 진분홍 장미꽃이 ‘단아한 검정교복에 단발머리/ 소녀의 향기가 되어’ 다가오고, <사계절>에서는 봄날의 첫사랑과 여름날의 열정, 가을날의 겸손함과 겨울날의 포옹을 깨닫게 한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서는 ‘먼저 손 내미는 용서’와 ‘상처 보듬는 따뜻한 마음’을 이웃에게 나누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와 같은 계절에 관한 형상적 이미지는 <붉은 노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누가 너보다 더/ 하루를 찬란하게/ 보낸 이가 있는가// 누가 너보다 더/ 붉게 솟았다가/ 지는 이가 있는가// 누가 너보다 더/ 눈물 나게/ 한 이가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작품 가운데 나타나는 삶의 찬란함과 비장함, 인생의 뜨거운 정열과 애잔함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계절에 관한 긍정적 순환론은 조영관의 시세계를 시감각적 공간의식을 확장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계절에 관한 긍정적 순환론과 더불어 자연친화론적 세계관 역시 그의 시의식에 있어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풀벌레 우는/ 시골돌담 위로/ 고개 내민 옥수수 몇 그루’ ‘하늘 향해 까치발 하며/ 나란히 서 있다’(-<옥수수>)에서의 의인화법이나 ‘길 가에 흔들흔들/ 나를 보며 꼬리치는/ 강아지풀’의 사물화 기법 그리고 ‘돈돈 둥근 돈/ 손 때 묻은 황금 돈/ 어디어디 있나/ 마음 속에 있지’(-<황금돈 둥근달>)의 패러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수사법을 활용해 미의식을 완성하고 있다. 또한 ‘마른 삽은 진흙으로 화장하고/ 광문 앞에 기대어 있다’(-<이슬비>)나 ‘바람과 새소리/ 친구 삼아 자연과 호흡하면/ 외롭지 않’을(-<자연과 호흡하라>) 거란 교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사법이 전개되고 있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까치를 위해
나무 꼭대기에 남겨둔 홍시
                     
-(중략)-
나무 위에 매달린
붉은 홍시는
하연 눈에 덮힌 채
붉은 사랑을 키워간다.
                    (-<까치밥> 일부)
 
  추수할 때 들판에 들짐승을 위해 곡식 이삭을 남겨두거나 역시, 나무 꼭대기 홍시 감을 남겨두는 행위는 우리의 토템이즘 사상에 관한 민족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 자연과 함께 상생하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4. 사람의 향기, 시의 향기, 그렇게 한 세상 건너게 하소서

  조영관은 시를 쓰지 않아도 될 사람이다. 경제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시를 쓰지 않아도  그냥 시인이다. 그에게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아니 그는 시를 닮아 시의 향기가 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연단이요,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의 시 가운데는 끊임없는 자기 모색의 길이 담겨 있다. ‘핏발 선 눈에/ 앙칼진 목소리로/ 나밖에 모르는 말은/ 생나무에 도끼질하는 것이’(-<상처 준 말 한 마디>)라는 구절에서 암시하듯이 양심의 눈을 번뜩이며 가혹하리만큼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준엄하면서도 주변을 향해서는 자애가 묻어난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는 보육원 아이들을 돌봐주게 된다. “네 살 박이 아이를 안고 보육원으로 향하였다.// 다음에 또 데리러 올께/ 말하니 피식 웃어버린다/ 싱거워졌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가 보다”(-<남자 아이 셋>)에서의 시적화자는, 그동안 체험을 통해 알아내는 어린아이의 표정에서 자신의 빈 말이 들켜버렸음을 깨닫는다. <같은 서울 안에서>는 ‘ 고성과 같은 저택이 천막촌과 공존하고 있는 서울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부의 마음’으로 ‘봄을 꿈꾸고’, ‘까치밥’을 남겨 두며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부자의 생각>)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가진 것을 나눌 것’이며 ‘내미는 손에 고개 돌리지 않’고 차라리 손해 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새해에는 손해 보게 하소서>) 어찌 보면 경제 전문가답지 않은 처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나눔과 위함의 공동체의식으로 더 큰 경제와 삶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는
지금 어떤 나무인가요. (-<이런 인생이 되어라> 일부)

목적지로 가는 나의 여행길은
행복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두 종류의 사람> 일부)
 
  위의 인용한 작품 <이런 인생이 되어라>는 문맥상으로만 본다면 시적화자가 독자에게 권유하는 글이지만, 사실은 화자 자신이 삶의 화두로 삼고자 하는 명제이다. ‘향기로운 아카시아나무’, ‘비바람을 견뎌내는 대나무’, ‘허기진 자를 채워줄 감나무’와 같은 삶을 살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다짐 가운데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나무’인지를 되묻고 있다. 여기서 어떤 나무라는 의미는 어떤 종류를 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실천하고, 어떤 인격과 수양을 갖췄는가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삶을 뜻한다. 그런가 하면 <두 종류의 사람>에서는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의 이분법적인 논리보다는 주어진 여건에 얼마나 감사하며 긍정적인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삶이 결정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길이란 결국,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해 되묻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선택의 기로를 맞게 되는가? 삶 가운데 ‘3퍼센트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기쁨만을 생각하고/ 기쁨만을 외치’며 ‘언젠가는 기쁨의 세상이 오리라’는 신념으로 모인 단체, ‘기쁨세상’에 시인은 참여하고 있다. ,
 
기쁨의 씨앗을 황무지 가운데 뿌리고
한 해 두 해 손을 맞잡고 걸은 지 어언 열두 해
벌써 올곧게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네.

이제는 머리 곱게 딴 예쁜 얼굴에
여드름 하나씩 송송 오른
열두 살의 소녀처럼 순수함과 싱싱함이 묻어 난다.
                                              (-<열두 살의 기쁨세상> 일부)
 
  ‘기쁨세상’은 시인이자 칼럼리스트인 이상헌 회장을 중심으로 모여진 단체이다. 이 모임이 다른 사회단체와 변별성을 갖는 이유는 경제적 이익 집단이거나 정치적 성격을 띤 인적교류의 모임이 아닌, 단지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인간 본성의 하나인 기쁨을 추구하고 기쁨만을 추구하는 단체인 것이다. 방송작가이기도 한 이상헌 회장은 그간 방송을 비롯한 수많은 언론에 칼럼을 기고해왔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평상시 일상인이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기에 등장한 인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임을 형성하여 이제 개인의 심성 회복은 물론 사회 정화운동에 기치를 올리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이 모임에 관해 형상화하며 ‘머리 곱게 딴 예쁜 얼굴에’ 순수함과 싱싱함이 묻어나는 소녀, ‘여드름 송송 맺힌/ 열두 살’로 묘사하고 있다.
  
하얀 파도가 용두암에
부딪혀 일렁일 때마다
우리의 가슴 속에 간직된 꿈은
용솟음쳐 올라간다
-(중략)-
검푸른 어둠과 거센 파도를 헤치고
천 백 리를 뱃길로 달려온
신한카드 가족들의 도전정신과 열정을
꽁꽁 닫아보아도 숨기지 못하리라.
                               (-<힘찬 출발 신한카드> 일부)
 
  인용한 작품은 시인이 자연인으로 종사하는 ‘신한카드’에서 직접 카드 설계사들을 제주도에 인솔하고 갔을 때의 감회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억겁의 세월을 파도가 밀려와 부딪쳐도 굴하지 않고 하늘로 치솟는 용두암의 기개와 같이 ‘천 백 리’ 뱃길을 달려온 오늘 우리도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새롭게 부활하자는 의지와 다짐을 묘사한 작품이다.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용두암으로 치환하여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한편, 자신이 종사하는 신한카드에 관한 애정과 더불어 자부심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아래
자리잡은 긴 나무의자

힘들면 쉬었다 가고
쉬면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긴 나무의자

자연과 인간을
만나게 하는 쉼터가
있는 공간이다

비가 오면 젖고
해가 뜨면 다시
깨끗하게
다음 손님을 맞이한다

바람은
긴 의자 사이로
비껴 가지만
나무의자는 한 장의
흑백사진과 그리움을
기억한다.
           (-<숲 속의 긴 나무의자>    )
 
  인용된 시는 조영관 시인의 등단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 가운데는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단면을 엿볼 수 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우선 작품에 나타난 전경은 나무 아래 긴 의자, 벤치가 놓여있고 그 벤치는 쉼터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단순한 쉼터가 아닌 “자연과 인간을/ 만나게 하는 쉼터”인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은 자연에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자연과의 만남은 인간 본연의 자아를 엿보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이란 긴 여정 가운데 늘 앞만 보고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내 자신의 정체성을 반추해 보고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삶이, 인생이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적 물음이 아니더라도 자연과 주위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삶의 일부일 것이다. 최근 들어 ‘느림의 미학’이 각광받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결국 조영관의 공간의식은 이런 본질적인 관계에서 볼 때 현실적인 공간의식을 넘어서 ‘다음 손님을 맞’기 위한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손님이란 결국 일상적인 행인이 아닌 다가올 다음 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나무의자는 한 장의/ 흑백사진과 그리움을 기억”하는 풍경은 흑백사진이란 역사적 산물과 그리움이란 애환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결국 조영관의 시의식은 이런 자연과 그리움으로 대변되는 자연친화적 공동체 의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작가 연보>
 
1967년 전북 익산 출생, 시인, 경영학 박사
1994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2005년 kdi 국제정책대학원 경제정책과정 수료
       한성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졸업논문: 디지털 시대의 청소년 경제교육의 방향과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2010년 교육인적자원부 행정학사(사회복지전공졸업)                                    호서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박사학위 수여
       졸업논문: 문화콘텐츠 산업정책이 애니메이션 산업발전에 미치는 영향
현재 신한금융그룹인 신한카드 부부장
                                                     
2008년 서라벌문예원 시 부문으로 등단, 신인상 수상
2010년 창조문학신문사 특별상수상
2010년 청계천백일장 심사위원
2010년 월간 한국문단과 계간 한국문예광장 이사
1992년 미국선물거래사(ap)
2003년 ja korea 최우수자원봉사상
2003년부터 신용/경제교육 120회 이상 교육실시
2004년부터 어린이동아일보에 5년간 연재
2005년부터 저서 씽아의 경제탐험, 생생라이브경제, 경제초보자가 알아야 할 경제지식 105 외 7권이 있음          
2006년부터 경제관련 방송 다수 실시(kbs1 어린이경제쑥쑥나라 인터뷰4회, cbs라디오 방송 4회 출연)
2006년부터 월간 행복한 동행, 2007년부터 월간 신용경제 다년간 경제칼럼 기고 중
2006년 디지털경제대상
2008년 아웃소싱지도사1급 자격 취득
2009년 사회복지사 자격취득
2009년 출간한 경제저서의 수익금 100%를 월드비젼과 한국시민자원봉사회에 기부, 작지만 나눔을 손수 실천
2009년 사)한국시민자원봉사회 청소년 의회식 토론대회 심사위원 활동 중
2009년 한국디지털정책학회 우수 학술논문상
2009년 삼성그룹 온라인 매거진 ‘생활속의 경제’ 5회 연재
2010년 금감원 사보 연재 3회, kdi 클릭경제 연재 3회
2010년 ing생명 인터넷 웹진 12월호 기고 및 동영상 강의
2010년 사)한국시민자원봉사회 청소년 un총회 본부장  
2010년 1기 tesat 강사 양성과정 인증서(한국능률협회&한국경제신문사 공동주관)
2010년 한국능률협회 경제교육위원회 전문위원
2010년 3기 서울시민기자 활동 중
2010년 한국문단 수여 녹색 ceo 대상 수상.
leegy4712@empas.com
*필자/문학평론가(문학박사).고려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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