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 비화

<비화 공개>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김연수 기자 | 기사입력 2013/09/25 [15:18]
[브레이크뉴스 김연수 기자]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지킨 일본 여인 이마사코 여사의 회고록이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지식공작소)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마사코 여사의 한국 이름은 이방자. 이마사코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의 딸로 일본 황태자비 물망에 올랐으나, ‘한·일 융화’라는 미명 하에 고종 황제의 세 번째 왕자 영왕(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부인이 되었다. 이방자 여사는 열여섯 살 때 조선 황태자와의 혼약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 정도로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고, 끝없는 역경 속에서 살다가 1989년 작고했다. 이 회고록에는 뼈아픈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일본인이자 한국인으로, 황족에서 평민으로, 애틋한 아내이자 애끊는 어머니로,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살아온 이방자 여사의 파란의 삶이 진솔하게 기술되어 있다.

▲ 이방자     ©브레이크뉴스
이마사코, 즉 이방자 여사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의 딸로 일본 황태자비 물망에 올랐으나, ‘한·일 융화’라는 미명 하에 고종 황제의 세 번째 왕자 영왕(영친왕) 이은의 부인이 되었다.
 
자신의 혼약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된 운명의 여인 이마사코는 뼈아픈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일본인이자 한국인으로, 황족에서 평민으로, 애틋한 아내이자 애끓는 어머니로,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파란의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강용자 지음, 김정희 엮음, 지식공작소 간행)라는 제목의 회고록은 자전기록이 많지 않은 대한제국 황실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직접 증언이다. 특히 일본의 지나친 우경화가 우려되는 요즘, 망각해서는 안 될 우리 과거사의 한 단면을 증언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자신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영왕 부부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우리 민족 근세 수난사의 일부이며 미래의 한국인과 한일관계에 던지는 소리 없는 질문이 되고 있다.
 
영왕 이은과 이마사코에 대하여
 
대한제국 말기는 격랑의 소용돌이였다. 1863년 열강의 각축 속에 대원군은 고종을 즉위시켜 정권을 잡았다. 외세 침략의 틈바구니에서 민비와 대원군은 정치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을 갔고, 이를 도운 엄 상궁은 승은을 입어 귀비가 되었다. 1897년 고종은 대한 제국 황제에 즉위했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지 8일 만인 10월 20일, 엄 귀비의 아들 이은이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순종의 후계자로 이은을 영왕에 책봉했다. 마지막 황태자 이은은 7년 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볼모로 일본으로 끌려간다. 그때 열한 살이었다.

영왕은 1910년 한일 합병 이후 일본 황공족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나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 제51사단장, 제1항공군사령관을 거쳐 군사참의관을 끝으로 2차 대전 후 평민이 되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일본 군인으로 보낸 것이다. 그는 따뜻한 성품이었으나 말수가 적었다.

일본이 패망했지만 환국의 꿈은 깨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1963년, 휠체어에 실려 56년 만에 환국했으나 뇌일혈로 말을 잃었다. 1970년 5월1일, 영왕 이은은 6년 6개월을 투병하다 73세로 서거했다.

사실 대한제국 황실을 증언하는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이 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고종과 순종 황제, 순명효황후(윤비) 등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 놓인 황실 인물을 직접 겪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의  마지막 황실 연구 자료로서 그간 나온 여러 가지 회고록의 오류를 바로잡고 인간 이방자의 생생한 고백을 통해 역사 속의 인간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내 남편이 묻힌 곳이 나의 조국”
 
이마사코는 1901년 11월4일 메이지 천황의 사촌인 나시모토미야 모리마사 친왕과 나베시마 이쓰코 여왕 사이에 장녀로 태어난 황족이다. 열여섯 살 때 조선 황태자와의 혼약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하면 흔히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방자 여사와 영왕은 그렇지 않다. 이방자 여사는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 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다. 험하고 암담한 인생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애틋한 사랑을 토로하고 있다.

피차 불행한 조국의 몰락하는 왕족이라는 동지적 입장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바탕이 된 것 같다.  

그녀는 볼모 생활 56년 동안 남편의 내면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지지해 주었다. 그녀는 “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늘 말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이해하고 남편을 누구보다 사랑한 그녀는 말년을 낙선재에 기거하며 조선의 황태자비로서 책무를 완수했다. 회고록에는 두 개의 조국, 격랑의 역사 한복판에 끼인 그녀의 눈으로 본 한국과 일본. 역사의 앙금이 남아 있는 양국 관계 속에 ‘경계인’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은·이마사코 부부의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귀국을 거부한 대한민국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귀국에 냉담했다. 이승만 정권은 영왕의 귀국을 반대하고 황실재산도 국유화 하는 등 조선 왕실의 맥을 단절시키려고 했다. 영왕 부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호의로 1963년에야 환국한다.

이들 부부의 국적 회복과 귀국에 적극 나선 사람은 1950년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언론인 김을한씨다. 김씨는 영왕에 대해 “인자하고 성실하며 욕심 없고 담백한 사람으로 파란이 중첩된 민족의 운명을 안고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손발이 묶인 생활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 부부의 삶을 “한은 끝이 없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고 압축한 바 있다.
 
지은이 강용자씨가 경향신문에 회고록을 연재할 당시, 일부 독자들이 “그 일본 여자 얘기를 왜 쓰느냐?”, “일본 황족의 딸이고, 우리의 피를 더럽히고, 영왕을 망친 요물 아니냐?”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연재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 “역사를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기록했다. 
 
조선 왕실의 후계자
 
고종 황제(1852∼1919)는 슬하에 9남 4녀를 두었다고 알려졌는데 성장해서 혼인까지 한 아들은 명성황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순종 척 (拓 1874∼1926),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의왕 강(堈 1877∼ 1955), 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영왕 은(垠 1897∼1970) 세 명뿐이다. 고종은 명성황후 이전에 귀인 이씨에게 완친왕으로 알려진 이선(아명 이육)을 두었으나 13세에 요절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영왕은 이복 형님인 순종이 즉위한 1907년 황태자가 됐다. 최연장자이던 이복형님 의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것은 그의 어머니 순헌황귀비가 명성황후 사후 비(妃) 중에서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영왕은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이라고 불리며 이왕가의 적통은 고종→순종→영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후 영왕은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왕가를 잇게 되는데, 첫째 아들 진(晋)은 생후 8개월 만에 사망하여 둘째 아들인 구(玖)가 황세손이 됐다.
 
황실의 후손 이구의 불행
 
1931년 12월29일 일본에서 태어난 이구는 이마사코 여사가 1922년 첫째 아들 진을 잃은 뒤 여러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고 9년 만에 낳은 둘째 아들로 황세손이 되었다. 이구는 1950년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 MIT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 뉴욕에 있는 중국계 아이엠페이(IMPEI) 건축사무소에 입사, 1959년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3살 연상의 우크라이나와 독일계 미국인 양친을 둔 줄리아 멀록 (1928∼ )과 결혼했지만 환국 후 이혼을 종용하는 종친의 압력과 사업 부도 등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70세에 시작한 사회복지 사업
 
70세에 남편을 잃은 이방자 여사는 윤대비, 덕혜옹주, 아들 부부와 함께 낙선재에 기거했다. 넉넉지 않은 정부 지원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홀대받던 장애인에게 ‘홀로 설 수 있는 재활과 직업교육’이라는 진보적인 생각을 앞장서 실천하는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귀국 후 구황실재산법에 묶여 재산도 없어졌으며, 시어머니 엄 귀비가 세운 숙명학교마저도 반대 데모로 잃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장애인 복지사업에 매진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복지재단을 세우고 발로 뛰어 재원을 마련, 시설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명휘원이 그곳이다.

‘참을 인(忍)’ 한 자를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간 남편과는 달리 그녀는 ‘조화로울 화(和)’ 한 자로 모든 고난과 슬픔, 불행을 감싸 안았다. 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뒤로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움에 발 벗고 나선 말년은 황태자비 이상의 숭고한 인간애의 실천으로 존경받았다. 한일 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방자 회고록의 결정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는 1984년 5월14일부터 10월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후 황손 이구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2005년까지 조선 황실의 근황을 정리하여 보완했다. 또한 일반인에게 생소한 대한제국 황실을 이해하기 쉽도록 조선왕실 가계도와 당시 양국  궁궐 지도, 이방자 연표, 참고문헌 등을 꼼꼼히 정리했다.

대한제국 황실을 증언하는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이 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고종과 순종 황제, 순명효황후(윤비) 등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 놓인 황실 인물을 직접 겪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의  마지막 황실 연구 자료로서 그간  나온 여러 가지 회고록의 오류를 바로잡고 인간 이방자의 생생한 고백을 통해 역사 속의 인간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방자 사후 조선 황실 이야기
 
잊혀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노라면 의왕 이강과 덕혜 옹주, 이건, 이우 등 왕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함께 만나게 된다. 엄청난 왕가 재산의 행방과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비난 속에 살아온 몰락한 왕가 후예들의 행적도 담았다. 내용 중 사실 관계가 부정확하거나 오늘날 읽기에 불편한 점은 바로잡고 주석으로 보충하여 당시의 증언을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풍부한 사진도 근현대사의 한복판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회고록이 끝나는 1984년부터 이방자가 타계한 1989년, 황손 이구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2005년까지 조선 황실 후손들의 근황을 정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대한제국 황실의 산 증언
 
영왕 부부의 일생은 한일 양국 황실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히로히토 황태자비 물망에 올랐던 이방자의 불임설과 일본 황실의 간택 비화는 일본 궁중의 권력 투쟁을 엿보게 한다.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영왕의 드러나지 않는 조국애와 의친왕 이강의 독립운동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는 망국의 멍에를 진 조선왕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해방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왕을 불편하게 생각해 환국을 못하게 한 정황과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 육영수 여사의 지원 등도 흥미롭다. 구황실 재산 몰수에 따른 조선 왕실의 몰락과 영왕의 생모 엄비가 세운 숙명여대를 데모로 포기하게 된 사연 등 왕가 재산을 둘러싼 증언도 귀중하다.

그밖에 윤비, 덕혜옹주, 요절한 이우에 대한 증언과 아들 이구의 한국생활 부적응에 대한 안타까움 등 회고록이 아니면 풀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오늘날의 양국 국민은 가까운 현대사를 오히려 잘 알지 못한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은 망각해서는 안 될 우리 과거사의 한 단면을 증언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자신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영왕 부부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우리 민족 근세 수난사의 일부이며 미래의 한국인과 한일관계에 던지는 소리 없는 질문이 되고 있다. 각종 망언을 일삼고 있는 작금의 일본을 볼 때 더욱더 바로 알아야 할 우리 역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에 숨어 있는 비화
-“육영수 여사 다정한 마음씨 잊을 수 없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씨가 대통령이 되자 전하는 이제는 귀국하고 싶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전주 이씨로 왕실의 종친이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 온 애국자인 만큼 그가 대통령이 되어 민주정치를 베풀면 조국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은 전하는 주일 대표부를 통해 여러 번 귀국 희망을 전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한국의 국유재산이므로 주일 대표부 건물로 쓰도록 내어 놓으라는 훈령을 보내왔다. 이 집의 집세로 겨우 연명하는데 그것을 내놓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육영수 여사는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대통령께 여러 번 부탁 드려 1971년에 우리의 생계비를 월 60만 원으로 올려주었다. 참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상이었다. 육 여사는 또 자행회 사업에도 무척 관심을 가지고 나를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자행회에는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이 늘어나는데 수용할 시설이 없었다. 이들을 위한 학교와 훈련시설이 필요했다. 육 여사는 1971년 자행회 부설 자혜학교 건립 기금으로 1000만 원을 내놓았다. 1000만 원이면 지금은 1억 원도 넘는 큰돈이었다. 이 기금과 은행에서 융자받은 1500만 원을 합쳐 1972년 10월, 경기 도 수원시 탑동에 자혜학교를 건립했다. 갈 곳이 없던 수십 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신축한 학교에서 뛰어놀고 공부하고 훈련받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도록 기쁜 것이었다.

육 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우리의 행사에 참여하고 도와주려고 애써 주었다. 불우한 어린이나 정신지체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주었던 육 여사의 인품과 다정한 마음씨를 나는 지금도 존경하고 잊을 수가 없다.
 minju419@dreamwiz.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