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그 의미도 생소한 종두인허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던 증언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당시 집안의 재당숙으로부터“증조부가 방골에서 우두를 놓으셨다”는 증언이 필자의 증조부가 되는 박승석 선생의 행적을 알게 된 최초의 단서였던 것이다.
흔히 우두하면 대표적으로 송촌 지석영 선생을 거론할 수가 있는데 증조부가 1865년생이니 연배로는 송촌보다 10년 연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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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의 행적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안점을 두었던 부분은 과연 어떤 계기에 의하여 우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여부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대목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2가지 항목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첫째.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부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서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 났을 때 강진으로 유배가게 되어 18년 동안 머물면서 3대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하여 500여권의 저술을 후세에 남긴 대학자라할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은 우두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저술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서(醫書)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1797년 저술한 것이며 내용은 마진(麻疹)의 치료에 관한 것인데, 필자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우두에 대하여도 자세히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증조부가 우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 혹시 다산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산이 1836년에 타계(他界)하였으며, 증조부가 1865년생이니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는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그 정신만큼은 계승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사하였으나 결국 다산과의 관련성 여부를 밝혀내지 못하였다.
둘째. 송촌 지석영 선생과 관련된 부분이다.
송촌 지석영 선생은 1855년생으로서 연배로는 증조부보다 10년 연상이 되는데, 흔히 송촌하면 조선에 최초로 우두법을 보급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점에 착안하여 증조부가 우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 송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조사하였으나 결국 이 부분도 관련성을 규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다산과 송촌과의 연관성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관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나 증조부와의 관련성을 규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조부의 행적연구에 있어서 마침내 중요한 전환점이 생기니, 그것은 2009년 1월에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증조부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어느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9년 1월 12일 증조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게재가 된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나온 기사에서 종두인허원이 최초로 등장하였으니 필자가 종두인허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기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기록이 발견된 의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2009년 이전까지는 증조부가 우두접종을 하였다는 여러 증언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가 발견되지 않아서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가 없었는데,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공식적인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실로 증조부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종두인허원이란 무엇인지 그 역사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역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 보기 전에 종두인허원의 개념부터 정리하기로 하겠다.
종두인허원이란 1895년 10월 7일에 제정된 종두규칙에 의하여 규정된 종두를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의료인을 말한다.
이러한 종두인허원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시기는 1899년이었으며, 이는 당시 한성 종두사를 법령에 의하여 제정할 당시에 각 지방의 종두세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의 종두인허원은 각 지방의 관찰사와 종두위원의 합의에 의하여 각 군에서 2 ~ 3인이 선발되었는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종두인허원이 종두위원의 감독을 받았다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종두위원과 종두인허원의 관계는 일종의 상하복명(上下復命) 관계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
종두위원은 1895년 법령에 근거하여 종두의(種痘醫) 양성소가 정식으로 설립되는데, 당시 과정은 1개월이었으며 졸업한 이후에 정식으로 종두의(種痘醫) 자격증을 부여 받았으며, 그 이후 종두의(種痘醫)를 전국적으로 파견하였으며, 이때의 명칭은 종두사무위원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종두인허원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니, 관찰사와 종두위원의 합의에 의하여 선발되었던 종두인허원의 위상이 격상되어 종두위원같이 정식으로 양성소의 과정을 이수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더불어 군(郡) 차원에서 범위가 확장되어 도(道) 단위로 2 ~ 3인이 임명되는 것으로 변모하였으니 확실히 초창기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도 오래가지 못하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기존의 종두사무를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가 담당하면서 종두인허원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종두인허원이 기존의 임명에서 면허를 인가받는 것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사례를 증조부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1913년 3월 8일부로 박승석이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시대에 양성소에서 과정을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었던 종두인허원이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종두인허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 본다면 1914년에 1,248명이었는데 1940년에 이르러서는 2,216명으로 증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은 그동안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종두인허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국내에 종두인허원을 주제로 한 논문이 1편도 없는 것을 통하여 종두인허원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필자의 전공은 이 분야와는 관련이 없지만 20년전 증조부의 행적과 관련된 증언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로지 증조부의 연구에만 전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후손으로서 증조부의 행적을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2009년에 종두인허원 관련기록이 발견된 것이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어 국내언론사로는 최초로 브레이크뉴스 2012년 1월 16일자에 증조부를 소개하는 칼럼이 게재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
오랜 세월 증조부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어서 여기에 그 사연을 소개한다.
필자가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증조부 기록을 발견한 이듬해인 2010년 3월 연천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주민은 1930년생인데 6세에 증조부로부터 우두를 접종받은 사실을 증언하였으니 실로 증조부로부터 우두접종을 받은 최초의 인물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1935년 증조부가 연천에서 우두를 접종하였다는 것인데 1937년 향년 73세에 타계(他界)하였으니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증조부는 고희를 넘기어 71세가 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두접종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사명감(使命感)이 없이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증조부가 49세가 되는 1913년에 종두인허원의 면허를 취득하고 당시 연천군 군내면 상리 방골이라는 마을에서 최초로 우두접종을 시작하였다고 볼 때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두접종을 하였으니 후손으로서 백성들의 생명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증조부의 의술정신(醫術精神)에 숙연한 심정 금할 수 없다.
필자는 역사속에 잊혀진 존재가 된 종두인허원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당시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였던 증조부의 존재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증조부가 어떤 계기에 의하여 종두인허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증조부가 1865년생이시니 돌아오는 2015년 12월 19일은 탄생 150주년이 된다는 것인데, 현재 증조부의 행적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 관보 기사 이외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더불어 증조부의 유품도 소장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후손으로서 비통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그동안 다른 연구를 하는 관계로 증조부에 대하여 소홀한 점이 있었는데, 이제 증조부 탄생 150주년을 앞두고 20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규명하지 못한 증조부의 행적에 대하여 혼과 정성을 다하여 조사할 생각이며, 특히 브레이크뉴스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