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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석이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점은?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9/01 [10:31]

필자는 오랜 세월 다양한 인물들을 연구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증조부가 되는 박승석은 필자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 언론사로는 최초로 2012년 1월 16일자에 증조부를 소개하는 칼럼이 게재되었으며, 2014년 8월 17일자에 2회가 게재된데 이어서 본 칼럼은 3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가 근본적으로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그렇다면 먼저 박승석이 관심을 가졌던 두창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두창의 발원지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서기 572년 경부터 이디오피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고 동아시아에도 파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질병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경로는 흉노의 침입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서역으로부터 천산산맥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하여 결국 중국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두창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경로는 요동반도와 산동지방으로부터 황해를 건너서 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두창집요(痘瘡集要)에 두창이란 병명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두창의 치사율은 높았으며, 특히 어린이들중에서 희생자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두창을 예방하는 방법에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는데, 인두법은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의 공동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초정이 1798년 영평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포천에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이종인에게  그 방법을 전수한 이후에 이종인이 의종금감(醫宗金鑑),난대궤범(蘭臺軌範),종두신서(種痘新書) 등의 서적들을 참고하여 종두법을 공부한 이후 직접 경향각지에 종두시술을 실시하여 당시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우두법과 관련하여 흔히 조선에 우두법을 최초로 보급한 인물로 송촌 지석영을 거론하는데, 필자가 요새 두창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미 송촌 이전에 다산도 우두법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다산의 저서인 “마과회통” 부록(附錄)에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1828년 스탄튼이 우두법을 소개한 내용이며, 다산이 이 책을 입수하여 우두법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언제 마과회통에 수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28년 ~ 1835년 사이로 추정을 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산이 일본이 우두법을 소개한 1841년 이전에 조선에 우두법을 최초로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하여 볼 때 우두법을 조선에 널리 보급한 송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야 겠지만 그 이전에 우두법을 최초로 소개한 다산의 업적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다산과 송촌의 우두법과 관련된 부분이 알려진데 비하여 본 칼럼에서 논하고자 하는 종두인허원으로 활동한 박승석에 대하여는 그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출생연도가 1865년인데, 그해는 다산이 타계(他界)한지 29년이후이며, 더불어 송촌이 출생한지 10년후가 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기도 연천 출신인데 문제는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청년시절까지의 행적과 관련하여 일가되는 집안에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한 것이외에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그의 공식적인 첫 행적은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그의 나이 49세가 되는 1913년 3월 8일에 종두인허원으로 등록하였다는 것인데, 어떤 과정에 의하여 종두인허원으로 등록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사실상 49세 이전까지의 그 흔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 통탄스러운 심정 이루헤아릴 수 없다.

 

필자는 늘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가 종두인허원으로서 활동한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종두인허원의 길을 걷게 된 것인지 여부를 더 중시한다.

 

여기서 종두인허원이란 종두를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의료인이라 할 수 있는데 종두시술이란 것이 결국 두창을 에방하기 위한 시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근본적으로 그가 종두인허원이 되기 이전에 과연 어떤 계기에 의하여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출발점을 알고 싶은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집안의 재당숙을 통하여 박승석이 우두시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최초의 동기부여가 되어 어느 덧 그의 행적을 연구한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20년 내내 그의 행적만 오로지 연구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서도 필자의 가슴속에 그의 존재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필자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덧 세월은 흘러 다가오는 2015년은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된다는 사실이다.

 

박승석의 후손으로서 탄생 1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심을 많이 하였다.

 

사실 마음같아서는 그의 행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일대기도 간행하고, 더불어 기념비석도 세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법, 내년이 탄생 150주년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건이 안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이러한 두가지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필자의 능력안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본 칼럼의 제목에 있는 바와 같이 그가 근본적으로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점을 밝혀 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그의 행적연구에 있어서 핵심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의 역량부족으로 현재까지 이 부분을 규명하지 못하였다.

 

이제 그러한 결심을 한 이후 필자는 특히 조선후기 두창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할 생각인데 이런 과정속에서 그가 왜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출발점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사실 박승석의 생애를 뒤돌아 보면 다산과 송촌에 비하여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동안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소개한다.

 

그는 1865년 12월 19일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상리 방골에서 출생하여 1937년 12월 28일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 도신리(현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에서 향년 73세로 타계(他界)하였으니 한마디로 70평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출생한 1865년은 조선후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가 타계(他界)한 1937년은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접어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분석하여 보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행적을 거의 알 수 없다는 점인데 그나마 유일하게 알려진 사실은 그가 어린 시절에 양자(養子)를 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종두인허원의 길을 걷게 되는 1913년이전까지의 삶은 사실상 공백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1913년은 대한제국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원구단이 일제에 의하여 철거된 불행한 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에 박승석은 종두인허원 경기도대표로 등록을 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나이 49세때의 일이었다.

 

종두인허원은 당시 종두를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의료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왜 종두시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연원(淵源)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연천 주민들의 증언과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부분을 함께 소개한다.

 

필자가 오래전에 인터뷰한 연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석이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를 시술하였으며, 군민들 사이에서 “우두박생원(牛痘朴生員)”이라는 호칭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이와 더불어 집안에서는 “우두박사(牛痘博士)”로 알려 졌으며, 전국적인 명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점 밝혀 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때  박승석의 호칭은 “우두박생원(牛痘朴生員)”과 “우두박사(牛痘博士)”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통하여 그가 우두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필자가 지난 2010년 연천에서 인터뷰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1935년 가마를 타고 당시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서 우두시술을 실시하였다는 것인데, 특히 이러한 인터뷰는 박승석으로부터 직접 우두시술을 받은 주민의 최초 증언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935년이라면 그의 나이가 71세가 되는 고령(高齡)이라 할 수 있는데 그때까지도 우두시술을 한 것을 통하여 볼 때 평소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였던 숭고한 의술정신(醫術精神)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후가 되는 1937년 향년 73세로 타계(他界)하는데, 종두인허원으로 등록한 1913년을 시작으로 1935년까지 우두시술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20년이상 우두시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결코 짧은 세월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의 구체적인 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의 증조부가 근본적으로 왜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 그 출발점에 대하여 알아 보았는데, 필자는 특히 다산과의 관련성을 주목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결정적인 단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편 필자가 증조부의 행적을 초심으로 돌아 가서 다시 연구하기로 결심한 이후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신청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8월 12일에 신청하였는데, 정상적인 절차에 의하여 접수가 되었으며, 더불어 담당과(擔當課)까지 배정이 되어서 회신을 기다리고 있던 중, 뜻밖에 배정이 취소되어 다시 신청으로 돌아 온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가 그동안 증조부이외에 다른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정부 관련 부서에 민원을 신청한 바 있었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민원 담당 공무원과 통화를 하였는데, 보건복지부에서 필자의 민원과 관련하여 여러과에서 고심하고 있으며,그래서 아직 최종적인 담당과(擔當課)를 결정하지 못하였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필자로서는 이런 답변을 들으면서 민원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려는 보건복지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러한 과정속에서 결국 최종 담당과(擔當課)가 결정이 되어서 기한내에 회신을 받았다.

 

비록 필자의 민원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보건복지부에서 민원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였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과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덧붙여서 이번 민원과 관련하여 보건복지부에서 필자가 별도로 신청하지 않았던 경기도청에도 의뢰하여 현재 경기도청에 담당과(擔當課)가 배정이 되었으며,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번 민원과 관련하여 최선을 다하여 준 민원담당 공무원을 비롯하여 담당과(擔當課) 공무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20년 전의 증언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증조부의 행적을 연구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을 감개무량하게 생각하며, 증조부가 종두인허원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두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 출발점을 규명하기 위하여 관련 책을 읽고 더불어 자료조사를 병행하다 보면 결정적인 단서가 도출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증조부 탄생 150주년을 기다릴 것이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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