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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 한강에간 친구9명을 살려낸 이야기

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내 삶은 감동 감격 감사로 점철...

이상헌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9/28 [13:55]
나의 삶은 아픔으로 출발했지만 하루 하루 기쁨 고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통장에 포인트가 쌓이듯 작은 기쁨이 누적되어 커가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힘든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감기 일기'를 써오고 있다. 감기란 감사와 기쁨을 합성한 글자다.
▲ 이상헌     ©브레이크뉴스

이 일기는 그날 생긴 힘들고 어려운 일도 기쁨과 감사의 시각으로 5개씩을 60년 넘게 써오고 있는데  아픔 시련도 나에게는 값진 선물로 남는다. 살아서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건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하루에 40명씩 자살을 한다. 견디기 힘들었다고 유서를 써 놓았지만 힘든 것은 힘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으면 순국이요 종교를 위해 죽으면 순교가 되고 사랑을 위해 죽으면 순애가 되지만 자살은 개죽음일 뿐이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산다'는 속담은 있어도 사람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는 속담은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떠나야 할 사명이 있다. 나는 그동안 죽겠다고 한강에 간 친구 9명을 살려냈다. 이 친구들은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나에게 끌려 온 것이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전화 목소리를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쉽게 알 수 있다.
"자네 자살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어디야?"
그러면 금방 울음이 터진다.
"지금 한강에 나와 있습니다."
"죽는 건 아무 때나 죽어도 돼. 어쨌든 와서 한잔하고 가야지. 소주 몇 병하고 오징어 사가지고 와라."
 
나의 주량은 소주 반병이다. 그러나 이럴 때는 반병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된다. 서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면서 내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준다.
       
내가 돌이 지낫을 때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은 것이 양잿물이어서 집안이 난리가 났다. 시골에는 병원은 커녕 차도 없던 시절에 장정들이 나를 거꾸로 들고 읍내 병원까지 20리를 달려가는 동안 목이 덜렁덜렁하며 좌우로 흔들리면서 경추의 연골의 모두 닳아 없어져 지금도 머리를 흔드는 습관이 남아있다. 완충작용을 하는 연골이 없어 뼈끼리 맞닿다 보니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 자동으로 흔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어지러움증이 나를 따라 다닌다. 요즘 두뇌개발훈련으로 도리도리가 유행이다. 그렇게 하면 기억력 투시력 예지력까지 생겨난다는데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나는 지금도 5~60년 전에 만난 사람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주변에서 나의 머리가 가장 크다. 20리 길 달리면서 평생 하고 남을 도리도리를 그 때 다했기 때문이다.그  뿐만이 아니다. 다리를 거꾸로 들고 달릴 때 성장판이 늘어 난 탓인지 형제 중에 내가 가장 크다. 그러나 양잿물 때문에 혀가 손상되어 심하게 말을 더듬었는데 내가 말하는 직업을 갖게 되어 지속적으로 훈련한 결과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419 때 군에 입대를 했다. 영장이 9번이나 나왔지만 제대로 걸을 힘도 없어 불응했더니 마지막으로 출두명령서가 우송되어왔다. 안오면 잡으러 가겠다는 통고서다.  할수 없이 훈련소에 갔지만 훈련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정도의 체력이라는 것을 알고 열외로 분류가 되어 구경꾼 역할을 하다가 자대 배치되었다. 어느 날 피를 토하는 바람에 경주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폐병 3기환자로 분류되었는데 아침마다 한 두명씩 들것에 실려 나갔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다.
 
그러던 5월 26일 아침 구내방송을 듣게 되었다.
 
"아침 10시 병원 안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오니 참석하여 은혜 받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이날이 나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가겠다는 옆병상의 친구를 억지로 끌고 갔는데 나나 그 친구나 교회는 처음이다. 남들이 하는대로 섯다 앉았다 노래하고 설교 듣고 하는데 있는 힘이 다빠져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은혜고 뭐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나고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더니 헌금액수와 이름을 써내라는데 정신이 아찔했다. 이 무렵 2등병 월급이 130원으로  월급날은 자장면 한 그릇 사먹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데 괜히 교회 왔다가 은혜는 못 받고 돈만 뺏긴다는 생각이 들어 난감했는데 번개처럼 스쳐지 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래 가명을 쓰자. 이름을 쓰는 난에 홍길동이라고 썼다. 이제는 액수만 쓰면 된다. 홍길동이 째재하게 130원을 쓸 이유는 없다. 돈 액수 중에 가장 높은 숫자를 생각해 보니 100만원이 떠올랐다. 이 무렵 '만약에 100만원이 생긴다면은....'이란 유행가가 있어  금액란에 100만원이라고 써서 통에 넣자 같이 간 친구는 초조한 듯 자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너는 을지문덕이라고 쓰고 돈은 100만원이라고 써라."
 
전방에서 환자들이 계속 후송되는 바람에 침상 하나에서 2명씩 자게 되자 치유가 힘든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의병제대를 시켜 죽어도 집에 가서 죽으라는 혜택이 주어졌다는데 나도 그 중에 끼게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이미 저명인사가 되어 방송 신문 잡지 연재 강연 등으로 일요일도 없이 뛰었는데 갑자기 홍길동 100만원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약속은 약속이라는 생각으로 비서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 내면 된다는 것이다. 때마침 원고 청탁온 친구는 자기 교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데 이왕이면 잘되는데 가져다주는 것이 은혜라며 다투는 것을 보고 그 분은 힘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가장 힘든 사람을 위해 써야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무렵 이인수 교수는 주로 교도소를 방문하여 먹을 것도 사주고 좋은 얘기를 하고 있어  물었다.
 
"한번 가는데 돈이 얼마나 듭니까?"
"50만원 정도 들지요."
"돈은 있습니까?"
"누가 주면 그 돈으로 하기도 하고 없으면 아내 패물 팔아서도 해요."
 
나는 이 교수에게 100만원을 전달하고 나니 하느님에게 진 외상값을 다 갚았다는 생각을 하니 홀가분했는데 얼마 후 갑자기 '이자는?'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세상이라고 이자가 없겠나 더구나 20년 세월의 연체이자라면 한 두푼이 아닐텐데...'
 
 나는 이때부터 소득의 90%는 힘든 이웃을 위해 쓰고 우리 가족은 풍요속의 빈곤을 겪다 보니, 그 때문에 아내와 수시로 충돌했다.
 
"당신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팽개치고 뒤늦게 고생하고 있어요."
"나는 지금이 평생 중에 가장 건강하고 행복해."
"하긴 그래요. 40세를 못 넘길거라고 진단했던 의사들도 다 죽고 당신은 점점 좋아지고..." 
 
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나의 삶은 감동 감격 감사로 점철되어 있는데 3감은 기적을 만드는 신의 선물이요 살아있는 날은 축제의 날이다. 나의 집필실을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건 함께 노래를 부른다.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인데 찬송가에는 '기뻐하며 경배하세'로 나와 있는데 스님들도 즐겁게 부른다. 그래서 나는 축제 노래로 정한 것이다. injoyworld@hanmail.net
 
*필자/이상헌. 시인. 방송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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