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정윤회 스토리는 결코 그침도 없고 끝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보매체들은 물론, 조선일보, 이제는 동아일보, 채널A조차, 정윤회 그리고 그가 세월호 사고 날 만난 이 모 역술가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고 있다. 진정으로 낙담스러운 일이다. 고로 오늘 나는 큰 마음 먹고, 이러한 짓거리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쓰기로 작심하였다. 즉, ‘정윤회’에 관련된 루머라는 ‘총알’을 빼내고자 시도하겠다. 깊이 박힌 총알을 빼내는 수술처럼 아픈 대목들도 있을 것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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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무총리, 부총리들, 법무장관, 미래창조과학부장관 등 주요장관들, 일부 차관들, 그리고 김기춘 비서실장과 모든 수석비서관들, 그리고 300명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 명의로 등기우편을 여러 차례 보내왔다. 물론 모든 그 서신들을 박근혜 대통령도 읽었다. 특히, 아래 첨부한 검찰 고소장 자술서 59항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청와대 수석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등기로 보내었다: “(검찰 귀중:) 저는 청와대 수석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편지에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님의 경우 육영수 여사님이 측근들의 건방진 행위 혹은 잘못된 짓들 등을 은근히 제어하셨는데, 현재 독신이신 박근혜 대통령님의 경우, 내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정식으로 통보했습니다.” 그 자술서는 www.박통.kr에도 게재되어 있다.
아래 첨부한 검찰 제출 자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10여 년 전 박근혜 의원은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님을 위한 주필’ 역할을 제안하였고, 당시 사양하였다가 3년 전 뒤늦게 이를 수용하면서 나는 그 명칭을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으로 바꾸었다. 그 후 3년 간 300여 개의 칼럼을 브레이크뉴스 등에 게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은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직함이다. 그 것이 확실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바가 있다. 그 역할을 맡은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성형되어온 바가 있지만, 아직도 모호한 바는 남아있다.
아래 자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님과 박근혜 영애, 즉 두 박통과 나의 인연은 순전히 ‘글’을 통해서였다. 나는 한국 나이로 지금 71세인데, 1970년에 미국에 유학 가서 30여 년 미국 국방과학연구소 등에서 근무하다가 환갑 넘어서 귀국하여 지내온 터이므로, ‘글’ 이외의 다른 인연은 있을 수도 없었다. 그 두 박통은 나의 글, 즉 나의 사고기조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3년 간 내가 느낀 점으로는, 작은박통은 나에 대하여 가족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신뢰를 보여왔고, 실제로 가족 내의 연장자를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한다고 생각된다. 40년에 걸친, 뿌리가 깊은 신뢰심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박정희-육영수 가족의 연장자인양 스스로 생각하고 있고, 시체 표현으로 간이 부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청와대 수석들에게 상술한 바와 같이 “내가 육영수 여사가 하시던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편지를 돌리게 만든 것이다.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일체 가타부타 의견을 내색하는 적이 없고, 그러므로 나는 의기양양하여 박정희-육영수 가족의 연장자인양 행세를 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3년 간 매주 등기우편으로 박근혜 의원/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와 같이 간덩이가 부은 결과, 서신에서 박정희 대통령님과 육영수 여사를 ‘아버님’, ‘어머님’으로 부른다. 그뿐 아니라, 그 두 분들이 맏딸을 나무라실 사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하게, 박근혜 대통령을 힐책하는 적도 있다.
아마 수십 년 간 윗사람 없는 공주 비슷한 신분으로 살아온 연유로 인하여, 나처럼 가족 내 연장자 역할을 해주고, 쉬운 표현으로 야단을 쳐주는 그러한 존재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만 군도 나의 칼럼들을 접한 듯하고, 나에게 항상 호의적인 것으로 나는 느꼈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사신에서 하거나 www.박통.kr에 미리 게재하므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작은박통은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서거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대변인’ 명의로 국무총리 이하 장차관들, 국회의원들, 수석들에게 별별 이야기 다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는 바가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언론매체들과 기자들에게도 이상하게 생각되므로 기사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상한 짓거리를 막을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 하나인데 대통령이 막지 않으므로, 그저 구경만 하는 듯하다. 나의 추정으로는, 작은박통은 앞으로도 나의 ‘집안 어르신’ 역할 내지 짓거리를 막을 의사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1974년경부터 지금까지, 수천 개의 칼럼들과 나의 저서 ‘백만 명 먹여 살리기’ (도솔, 1976)을 읽으며 쌓인 나에 대한 신뢰가 그 정도로 크고 깊다는 나는 추정한다.
아마 나와 가장 비슷한 존재로서는 ‘최필립’이 있을 것이다. 그 양반은 그러나 가신 혹은 충신이었고, 나처럼 가족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님과 육 여사를 지칭하여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필립 그 양반은 그러나 할 이야기는 다 하는 성격 같았다. ‘최태민’에 대하여 한 인터뷰에서 “가짜 목사에게 박근혜 영애가 속아서…”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는데, 너무 예뻐서 안아주고 싶었다.
나도 최태민 등, 작은박통이 가까이한 많은 사람들을 안 좋아한다. 우선 관상들이 ‘군자 형’이 아니다. 나는 군자 형이 아닌 사람은 거의 무조건 싫어하고 배척한다.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사람들에게 해로운 짓을 할 수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으로 정윤회도 내가 좋아하는 군자 형은 아니다. 친박들 중에도 군자 형이 아니면 나는 노상 긁는 편이다. 정치 분야에는 오직 군자들만이 들어와야 한다고 믿는다. 로마제국의 철인들과 중국 성현들도 100% 그와 같이 굳게 믿었는데, 거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작은박통이 군자 형이 아닌 자들을 가까이 한 것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해를 하는 편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여성비하에서 금메달 감이다. 그러므로, 작은박통의 경우에도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서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들을 통하여야 했다. 군자들은 자기 스스로 일을 벌이기는 해도,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의 심복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사절한다. 그나마 손발처럼 뛰어줄 사람들은 고로 군자 형이 아니게 된다. 그 것이 최태민에서 정윤회,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많은 정치인들이 내 마음이나 최필립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이다. 내가 마음에 드는 형은 예를 들어 이한구 의원인데, 전혀 녹신녹신한 타입이 아니고, 같은 말을 해도 우악스럽게 하는 편이다. 다른 정치인들은 박근혜에게 가까이 하려고, 눈이라도 맞추려고 야단인데, 이한구는 뻣뻣하기가 동구 밖에 서있는 천하대장군 같다.
그러므로 작은박통이 수족처럼 부리던 사람들을 둘러싸고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나의 분석과 여러 자료들 등을 종합해 볼 때, 박근혜는 최태민, 정윤회 등 등 충성을 받칠 용의가 있는 자들을 단지 이용 내지 활용을 했을 뿐이다. 항상 적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연인이었다느니, 애까지 있었다느니 하지만, 내가 3년 간 풀타임으로 작은박통을 분석하고 연구한 결론은, 작은박통은 아직도 처녀의 몸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작은박통은 사람이라기보다 로봇이다. 로봇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작은박통을 분석하면 로봇 연구개발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커터 칼 테러로 수술을 받은 후 수술에서 깨자 집도한 의사에게 “의사 선생님은 제가 성인이 된 후 제 얼굴을 만진 첫 번째 남자이시네요!”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오래 동안 인터넷에 떠있었고, 나는 그 발언을 믿는다. 성격 상 수술에서 깨자마자 거짓말을 할 그런 능력이 없다.)
로봇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예를 들어서, 그 놈의 ‘4개 외국어’가 있다. 그 중 영어, 불어, 스페인어는 처녀 시절 방학 때면 연애도 안 걸고 공부한 결과이다. 어머님께서 언젠가 필요할지 모르니 배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으셨고, 그래서 연애도 안 걸고 그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대통령이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한 것,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 사신에서 종종 씹는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정말로 한심한 사실로서는, 중국어는 국회의원 시절 출퇴근 길에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인간이 로봇이 아니고서야, 나이 50줄에, 그 것도 국회의원이, 어떻게 중국어에 상당히 능통할 수준으로 출퇴근 길에 독학을 하느냐? 누가 그런 여성에게 장가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말리겠다. 사람이 아니라 로봇에 가깝다.
큰박통은 항상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하는 맏딸을 찾았다고 한다. 큰박통은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데가 있는 성향이시다. 그러므로 육 여사에게 기대고 살았고, 그 후에는 맏딸에게 기대고 살았다. 내가 맏딸이라면 그런 아버지를 위하여 좀 가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추정으로는, 아버지보다 맏딸이 더 바쁘게 돌아간 듯하다. 하여간 일 벌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대선후보 때나 지금이나 하여간 일을 엄청 벌이는 타입이다.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기운도 장사다.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비서실장은 잠자는 큰 영애를 깨우라고 지시한 후 고개를 떨구고 울기만 했다고 그 비서실장이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황을 짐작하고 큰 영애는 오히려 위로하면서, “전방은 괜찮나요?” 뭐 그랬다고 한다. 로봇다운 한 마디였다. 육사에서 급히 돌아와 2층 자기 방에서,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는 지만 군도 큰누이의 로봇 성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냐고 물었더니, “새로운 사실을 하나 하나 알아 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 있니?” 그랬다고 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하나도 재미 없거든! 그 로봇성은 그 때부터 중국어 독학, 그리고 둘째 조카도 아직 안 보고 청와대에서 일만 하는 오늘까지, 변함이 없다. 유전적인 요소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신에서 내가 단골로 하는 이야기들에 속한다. 미국에서 이따금 뉴스에서만 듣다가 지난 3년 간 풀타임으로 연구하고 분석해보니 흉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작은박통이 아직도 처녀라고 믿는다. 구제난망의 꼭맥 로봇성 때문이다. 4개 외국어 대신 3개만 하고 처녀시절에 연애도 좀 걸고 그래야 했다. 뭔가 정상이 아니다.
3년 전에 나는 박근혜 의원에게 나를 오라버님처럼 생각하라고 사신에서 이야기했고, 그 입장에서 세 가지를 당부하였다. 하나는, 워낙 남자관계 모함이 많고 루머도 태산 같으므로, 정윤회와 같이 오해를 일으킬만한 사람들을 무조건 멀리하고 차단하라고 당부 드렸다. (일반적으로, 나의 그러한 당부를 한 번도 어기시는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정윤회가 지난 3년 간 주위에 어른거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다. 그 것은 불가능이다.)
두 번째 당부는, 호텔 미팅룸 사용이었다. 어느 달에는 20번도 더 미팅룸을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보도가 당시 있었다. 나는 국회 미팅룸이건 다른 미팅룸에서 회의를 하고, 호텔 미팅룸 사용은 절대로 피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당부도 그 후 한 번도 어겨진 적이 없었다.
세 번째 당부로는, 당시 저녁에 사람 만나서 식사하는 뉴스가 뜨곤 했는데, 저녁식사는, 공식 만찬 외에는, 집에서 홀로 드시라고 했다. 이 당부도 그 후 한 번도 어겨진 적이 없었다. 대통령 취임 후 이에 대하여 언론들이 반론과 공세를 상당히 취했지만, 아직도 고수를 하고 있으시다. 물론 나의 당부를 떠나서 스스로 그러한 방침을 고수하는 바도 있겠지만, 어쨌든 위의 두 당부들의 경우처럼, 3년 전 당부 드린 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작은박통이 나를 정말로 부모님 대신, 혹은 큰오라버님처럼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아래 첨부한 고소장 자술서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친박측근들과 비서관들에게는 나의 존재는 뜻밖이었던 듯하다. 자신들을 가장 가까운 존재들, 심지어 가족과 같은 존재들로 스스로 자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건 어디서 굴러온 돌이 진짜로 가족처럼, 오라버님처럼 노니까 낙심스러운 바가 있었지 않나 싶었다. 나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여실하였다.
반면, 나는 나대로 그들 대부분을 배척하였다. 그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이, 군자 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군자 형 아니면 거의 무조건 싫어한다. 산에 굴 파고 들어가 혼자 도인으로 살 팔자인지 모르지만, 내 성벽이 그렇다.
그래서 거의 노골적인 반목이 생겼다. 지만 군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뉴스에 떴지만, 나는 작은박통이 최측근으로 청와대에 데리고 들어간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에 해롭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박근혜이지 지만 군이나 내가 아니고, 대통령은 자기 판단대로 할 수 있어야 했고, 그만큼은 나도 이해를 했다.
아래 진술서 49항에서 54항까지를 복사하자면:
49. 대통령 취임 후, 사무실 전화번호도 모르고, 비서들 휴대폰 전화는 알고 있지만 저를 경계하는 눈치여서 전화 하기를 예전에 그만 두었고, 오직 편지만 매주 한 번씩 보내드렸습니다.
50. 그러나 7월 말경, 저는 저의 편지가 중간에서 채뜨려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1. 그래서 박지만 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구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52.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다음 주, 휴가에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참모진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53. 그 후, 대가 센 신임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사이에 긴장 설이 떠돌고, 이에 대응하여 문고리 권력들 일부가 대적하는 의미에서 정윤회를 끌어드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들이 언론에 떴습니다 (시사저널 등).
54. 그러므로, 아무 실질적 증거는 없지만, 결국 저 때문에 그들이 대통령도 모르게 정윤회를 끌어들이고,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누가 끼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혼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www.박통.kr 에 모두 게재되어 있습니다. (인용 끝)
그 사건은 실제로 큰 사건이었다. 작은박통은 이 오라버님이 무슨 이유로 편지를 끊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박통 지키기 칼럼들은 계속 썼으므로 완전히 삐친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이유로 내가 편지 보내는 것은 그만 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한 주도 편지를 안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가로챈 것이 발각되었다.
일부 수석과 일부 문고리 비서관들 (정호성은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중 가장 신뢰할만하다)이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굴러들어온 돌인 나에게 밀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 자술서에 보이듯이, 나의 인연은 197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박정희 대통령님은 내 글을 정말로 좋아하셨다).
나의 분석으로는, 그래서 그들은 정윤회 이름을 끌어들인 것이다. 자기들 편으로서 가장 중량감 있는 이름이 ‘정윤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신임 비서실장에게 인사관련 권한 등을 빼앗기자 그에 대적하기 위하여 정윤회에게 S.O.S.를 쳤다”는 기사가 떴었다. 그리고 정윤회가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하였다는 추측성 기사도 떴었다. 나는 이를 전혀 믿지 않았고 지금도 전혀 믿지 않는다. 연막작전으로 분석하였다 (이 점은 지금이라도 기자들이 취재하여 알아보기 바란다. 나 자신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알고 싶다).
그리고, 정윤회가 시켜서 지만 군을 미행하였다는 뉴스도 떴다. 나는 대뜸 정윤회의 이름을 그들이 팔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지만 군에게 편지로 전하였다. 지만군과 나의 기를 죽이기 위한 위장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그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같이 이야기하였고, 그 기자는 수긍하는 기미였다. 정윤회는, 스스로 주장하듯이, 그럴 이유도, 그럴 힘도 없었다. 다분히, 그의 이름이 도용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수사도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점은 지금이라도 기자들이 취재하여 알아보기 바란다. 나 자신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알고 싶다).
나는 이런 분석에서 틀리는 적이 거의 없다. 정윤회는 거의 청천하늘에 날벼락 맞듯이, 이름을 도용 당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작은박통 최측근들이 뭐 작은 편리를 보아주면서 정윤회를 들뜨게 만들고 호기를 부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정윤회의 컴백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 ‘얼굴마담’ 역할로 정윤회를 이용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윤회 이름은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고, 그가 컴백한 것 아니냐, 대통령과 연인 관계 아니냐는 등의 추측이 많이 떠돌았다. 이 면에서 그 대통령 측근들은 불충의 죄가 막대하다. 아무리 내부적으로 싸움이 붙어도 주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진실로 소인배의 짓거리이다.
그러던 참에 세월호가 터졌고, 그 측근들이 불을 지핀 “정윤회 컴백 설’, ‘정윤회 연인 설’은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고 싶은 세력들에 의하여 큰 산불로 증폭되었다. 그들의 불충이 야기한 대형사고이다.
정윤회 자신도, 대통령과는 여러 해 연락조차 없었고, 대통령 당선 직후 받은 인사 전화가 유일한 연락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전과 이력이 있는 그 역술가는 자기 자신이 박근혜 대통령과 자주 통화한다는 거짓말은 했지만 정윤회가 대통령과 연락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 역술가는 사정당국에서 수사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정윤회가 “억울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수긍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그는 이용 당한 것으로 분석되며, 그 점이 백만 배 부풀려져서 여름 내내,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정윤회는 박근혜의 숨은 연인이다”, “장인에 이어 사위까지…” 이러한 참담한 이야기를 수백 년 이상 이어갈 것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이므로 모든 것을 참고 인고할 마음일지 모르지만, 나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어쨌건 박정희 대통령님-육영수 여사 가족 내에서 어르신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역할을 중지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 하나뿐이다. 그러나 3년 간 중지시키지 않았고, 중지시킬 조짐이 아직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참담한 상황을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나 자신 알고 싶은 것은, 그 싸가지 없는 대통령 측근들이 퍼뜨린 루머대로 정말로 1) 2013년 가을에 대통령이 정윤회를 독대하였는지, 그리고 2) 지만 군을 미행시킨 자가 정말로 정윤회인지, 알고 싶다. 나는 정윤회의 이름을 그들이 팔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들을 위에서 열거했지만, 이 두 사안에 관해서는 나 자신 권한이나 수사권도 없으므로 증명할 도리가 없으며, 언론과 수사당국이 이를 밝힐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고대한다.
고소장에 기록된 심상근 박사 자술서
고 소 장
(생략)
1. (생략)
2. (생략)
3. (생략)
4. 본 고소장의 기본 주제는, 과연 본 고소인 심상근이 “이상한 사람”, “수준을 드러내는” 그러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에 보도되는 기사들을 통하여 그러한 평가가 내려진다는 것은 당사자 저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불명예이며 모욕이 됩니다. 본 고소인이 고발한 사안에 대하여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정당한 반응이지만, 본 고소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5. 더욱이, 제1 피고발인의 경우, 이전에 고발된 사안(대검찰청 접수번호 #725: 2104. 10. 16.)에 대하여 자성하기는커녕 본 고소인의 인격을 말살함으로써 그 고발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이는 극히 중대한 범죄라고 생각됩니다.
6. 피고소인들의 주장대로 본 고소인이 법적으로 “이상한 사람”, “수준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법적 기준이 무엇인지 본 고소인은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학적 판단이 필수일 것이며, 본 고소인은 검찰이 요청한다면 의학적 진단을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7. 그와 별도로, 본 고소인이 “이상한 사람”, “수준을 드러낸 사람’이라는 평가를 수용할 그러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아래 본 고소장의 지면을 모두 할애하겠습니다.
8. 본 고소인은 1944년 서울 생으로서, 창신초등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1962년 입학, 1963-66 공군사병 복무, 1969년 졸업, 1970년 미국 유학, 1975년 말에 버클리 (가주대학교 버클리)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9. 영주권이 없었으나 미국 국방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훈으로 인하여 워싱턴 수도 소재 미국 해군과학연구소에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잠수함 탐지 기술연구에 종사했습니다.
10. 후에 실리콘밸리 교외에 위치한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 (LLNL) 국방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서, 핵무기 확산 방지 및 미국 정보기관들을 위한 각종 기술 개발에 관련된 연구에 종사하였고, 그 연구소의 모든 탐지기술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근무하였습니다. 상기 연구소는 일만 명 규모로서, 핵무기 개발 및 핵무기 안전기술 개발, 그리고 핵무기 확산방지, 미국 정보기관들 지원, 그리고 핵융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국 최대, 최고의 국방연구소입니다. 본인은 비밀문서 취급권한을 가졌었고, 미국 대륙탄도미사일 기지 벙커, 정보기관들, 백악관 안보실 등을 방문하거나 연관을 갖고 활동을 했었습니다.
11. 또한 수십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20여 개의 발명특허들을 미국에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2. 두 국방연구소에 근무 외에 본인은 피츠버그 주립대학교 교수, 그리고 록크웰인터내셔널 통신회사 광통신개발 매니저 등을 잠시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3. 그러므로, 본 고소인은 미국 이공계 분야에서 상당히 알려졌었고,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Marquis’ Who’s Who 인명사전들 중, 미국 인명사전, 세계 인명사전, 미국 내 이공계인 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되어 있었고, 아마 한국계로서는 거의 유일한 케이스였을 것입니다.
14. 또한 일만 명 규모의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의 북가주(북 캘리포니아) 지부장을 여러 번 역임했고, 그러한 신분으로 이해찬 당시 교육부장관, 설훈 의원 등과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는 지역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한나절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5. 본 고소인은 민주평화통일위원회의 해외자문위원으로 여러 해 위촉되었었고, 동료 위원들과 본국에 들려 청와대 방문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6. 본 고소인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미국 방문 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대통령 리셉션에 초대 받아 참석했었습니다.
17. 본 고소인은 상기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의 편집장, 전기전자분야 평의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18. 본 고소인은 한국 내 재벌기업들과 과학기술총연합회, 과학재단 등으로부터 1980년 중반부터 거의 매년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와서 세미나를 열고 국책 프로젝트 해외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 위에서 본인은 이공계인으로서의 활동을 기술하였습니다. 본 고소인의 가슴은 그러나 이공계에 있지 않았고, 이공계는 머리로만 종사했습니다. 저의 가슴은 항상 대한민국의 장래에 있었습니다.
20. 고로 고2 때까지는 법과지망이었으나, 부정부패 없이 청렴하고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너무 버거울 것 같아서 고3 올라가면서 이공계로 지망을 바꾸었습니다. 저의 집안은 엄청 가난했고, 저의 일가들도 엄청 척박한 경기도 파주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춘궁기에는 끼니가 떨어지는 위기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집안을 두고 나 혼자 청렴할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공계로,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저의 심 씨 친척들 중에는 지금도 그러한 저의 결정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면에서 본 고소인의 일생은 완전 유배생활이었고 방황이었습니다.
21. 본 고소인은 젊은 시절, 박정희를 이를 갈며 미워했습니다. 독재로써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며, 고로 유학생활 중에도 “독재국가에서 온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것에 대하여 극히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자유의 메카 버클리에서는 그러한 규정은 백인들에 의하여 비아냥으로 이어졌습니다.
22. 유학 시절,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은 제가 보낸 글들을 상당히 좋아했고, 대문짝만하게 그림과 함께 게재하였으며, 1975년 1월 1일자에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신년인사를 제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사설에서 저를 거명하며 칭찬한 적도 있습니다 (식자 하는 분이 ‘심상조’라고 이름을 바꾸는 실수를 했지만).
23. 1975년 초,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극한대치로 치달릴 때 저는 성금을 동아일보에 보내어 광고를 했습니다.
24. 그 즈음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문자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이를 목도한 저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선우휘 씨에게 ‘대국민 호소문’을 보냈습니다. 한 지면 전체를 차지하는 긴 글이었습니다. 요지는 “이번에는 독재자 박정희에게 져주자!”였습니다. 국내적으로 대치를 할 시기가 전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5. 이틀 후 동아일보는 박정희 반대하는 기자들을 모두 해고시켰습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저를 빗대어 코멘트를 했고 이는 기사화되었습니다: “가난하게 큰 사람은 남의 사정을 잘 안다.” 아마 저의 집을 좀 알아보신 듯합니다.
26. 물론 박근혜 퍼스트레이디 대행도 아버지와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7. 독재자 편을 들었다는 자책감에 저는 한동안 글을 안 썼습니다.
28. 1979년부터 당시 미주동아일보에 매주 두어 번씩 ‘심상근 칼럼’을 썼습니다.
29. 광주사태가 발생하자 저는 “신군부 장성들은 언젠가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고 썼고, 저의 칼럼은 타의로 닫혔습니다.
30. 그 동네 엄 박사로부터 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망명 중의 김대중/이휘호 두 분은 함께 친필로 서명하여 신년 인사카드를 제게 보내왔습니다.
31. 미주동아일보가 물러간 후 그 기자들이 주간현대와 계약을 맺고 미국판 주간현대 주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저는 ‘심상근 박사 칼럼’을 매주 두 번 정도 썼습니다.
32. ‘현철 사태’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한 저는 ‘백만 명 먹여 살리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도솔, 1996).
33. 그 책을 이회창 씨에게 보냈었고, 저는 그의 원거리 측근이 되었고 한국 방문 때마다 독대하였습니다.
34. 대통령이 되면 비자금 수사하여 처벌하겠다는 이회창 당대표와, 이인제, 이수성 등을 선호하는 듯한 김영삼 대통령 사이에서, 동시에 두 분에게 미국에서 속달등기 편지를 보내어, 비자금 수사 의지 철회하고, 비토 의중 거두는 협상을 하였습니다. 고흥길 특보가 중간에서 저의 편지를 토대로 실제 협상에 임했고, 양쪽 모두 동의하였고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보도된 ‘비선 인물’이 저였습니다.
35.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그 약속을 어기고 김대중 후보 비자금을 고발하자 저는 이회창 후보와 관계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발하면 지지율 10% 정도 떨어질 것이라고 열 번도 더 주장했으나 나머지 참모들은 오히려 올라갈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하루 사이에 근 10% 떨어졌고, 만회 다 못하고 낙선하였습니다,
36. 어쨌든 낙선 후 방미한 이회창 전 후보를 위해 화동 둘을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데리고 나가서 영접하여 교포환영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포신문에 매일 대문짝 만하게 보도되었습니다.
37. 박근혜 영애가 정치계 입문의사를 밝히자 저는 이회창 총재에게, 나가서 맞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하라고 부탁했습니다.
38. 그 때쯤은 저는 완전히 박정희 광팬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엘리트이므로 경제부흥 없이도 먹고 살 수 있지만, 90%+ 민초들은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부흥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엘리트로서 오만했고 90%+ 민초들의 심중을 존중하지 않았던 위선자였습니다.
39. 그래서 저의 대한민국 역사관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박정희 장군의 거사 이전에는 남한보다 더 잘살던 북한은 박정희의 경제부흥이 남북 간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우려에 방해하기로 결정했다고 저는 분석합니다. 김신조 공비 사태가 한 증명이고, 문세광의 테러가 다른 예입니다.
40. 6.25때나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남한의 극좌세력을 동업자로 삼고 있다고 저는 분석합니다. 그 동업자들은 박정희 경제부흥을 막으려고 온갖 책동을 다 했고, 그들의 본심을 모르던 수많은 대학생들은 독재를 반대하는 충심으로 데모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여중생 장갑차 시고 때나 세월호 사고에서, 극좌파들은 남한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세력은 아주 크고 뿌리가 깊다고 분석합니다.
41. 저의 글과 책을 박근혜 의원 등 지도자들에게 별도로 항상 보냈습니다.
42. 약 십여 년 전쯤, 서울사대부고 14회 홈페이지에 ‘Blue House’ (청와대)라는 ID를 가지고 들어와서, 저에게 ‘박정희 대통령님을 위한 주필’이 되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같이 읽게 된 동기들은 받아들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저는 사양했습니다: “독립적인 글쟁이로 남고 싶으며, 다만 언젠가 대통령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썼습니다.
43. 신익희 선생님의 손녀인 한 동기 여학생은 당시 저를 상당히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웃습니다.
44. 당시 저는 아직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정년퇴직 후 암으로 아내를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한국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현금 1억 4천만원을 신한은행을 통하여 들여와 ‘외국인투자기업’을 세웠습니다. 한국 실정에 맞는 발명을 하여, 벤처투자를 받을 계획이었습니다.
45. 그러다가 3년 전 안철수라는 정체불명의 모호한 사람이 출현하여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릴 때 저는 그를 대한민국을 망하게 만들 사람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믿는 것이 별로 없고, 이름을 남기겠다는 평소 좌우명이 그를 움직인다고 분석했습니다.
46. 그래서 박근혜 의원에게 등기우편을 보내어, 십여 년 전에 제안한 ‘박정희 대통령님 주필’ 역할을 맡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명칭을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이라고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47. 그 후 3년 간 저는 풀타임으로 박정희/박근혜를 위한 이론 정립에 받쳤고, www.breaknews.com 에 매주 두 세 개씩, 도합 300여 개의 칼럼을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 입장에서 쓰는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48. 화이트 데이 그런 날에는 박근혜 의원에게 쵸콜렛과 인형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이 것이 측근 비서들과 측근 정치인들에게 경계심을 일으킨 듯합니다.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죽을 때까지 모실 가족 같은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는 듯한데, 이건 굴러들어온 돌이 매주 편지를 보내고 쵸콜렛도 보내고 그러니까 적대적 분위기가 조성됨을 느꼈습니다.
49. 대통령 취임 후, 사무실 전화번호도 모르고, 비서들 휴대폰 전화는 알고 있지만 저를 경계하는 눈치여서 전화 하기를 예전에 그만 두었고, 오직 편지만 매주 한 번씩 보내드렸습니다.
50. 그러나 7월 말경, 저는 저의 편지가 중간에서 채뜨려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1. 그래서 박지만 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구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52.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다음 주, 휴가에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참모진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53. 그 후, 대가 센 신임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사이에 긴장 설이 떠돌고, 이에 대응하여 문고리 권력들 일부가 대적하는 의미에서 정윤회를 끌어드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들이 언론에 떴습니다 (시사저널 등).
54. 그러므로, 아무 실질적 증거는 없지만, 결국 저 때문에 그들이 대통령도 모르게 정윤회를 끌어들이고,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누가 끼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혼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www.박통.kr 에 모두 게재되어 있습니다.
55. 저는 정윤회 같은 자는 결코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하시라고 3년 전에 말씀 드렸고, 저녁 식사는 반드시 홀로 드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56. 그 후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 박정희 대통령님 때, 그리고 장갑차 사고 등에 걸쳐, 항상 나라를 뒤집으려는 극좌파들이 준동한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57. 그 여파에 결국 정윤회와의 7시간 밀회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저의 억측이겠지만, 혹시 저 자신이 정윤회 설 부상에 관련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우려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초콜렛을 보내지 말아야 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58. 정윤회 사안 외에도 제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고 방해하는 예는 이따금 있으며, 실제로 대통령보다 더 쎈 자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숨은 권력은 대통령 권력을 이길 때가 있습니다.
59. 저는 청와대 수석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편지에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님의 경우 육영수 여사님이 측근들의 건방진 행위 혹은 잘못된 짓들 등을 은근히 제어하셨는데, 현재 독신이신 박근혜 대통령님의 경우, 내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정식으로 통보했습니다.
60. 그리고 국회의원 전원에게도 팩스를 보내어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 입장에서 쓴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www.박통.kr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61.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미디어오늘이 기사에서 저를 ‘자칭 박정희 대통령 대변인’이라고 하는 자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3년 간 그 명의로 300개 이상의 칼럼을 썼고, 상기 홈페이지에 온갖 이야기들을 게재하고, 고소고발을 하고, 그러는 것이 허경영 식의 짓이라고 생각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된다면, 저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는 박정희/박근혜 대통령님들을 보호해야 하는 저의 임무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62. 대통령님은 매일 저의 사이트에 들어 오십니다.
63. “이상한 사람”, “수준이 낮은 사람”, “자칭 박정희 대통령님 대변인이라는 사람”, 이는 저의 역할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줄 표현들입니다.
(중략)
본 고소장에 기재한 내용은 고소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모두 사실대로 작성하였으며, 만일 허위사실을 고소하였을 때에는 형법 제156조 무고죄로 처벌받을 것임을 서약합니다.
2014년 10 월 24 일*
고소인 심상근 (인)*
※ 고소장.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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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장 증거서류 3:
상기 고소장의 증거서류 3으로서 보내드리니 그 고소장에 첨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소인 심상근 드림
이미지3-1
번역:
합동참모본부
워싱턴 수도
1990년 9월 14일
심상근 박사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우편함 313
우편사서함 808
캘리포니아 리버모어 우편번호 945550
경애하는 심 박사님께
심 박사님께서 9월 12일 개리 커틴 준장을 위하여 시연한 탁월한 기술데모에 관련하여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얼마 시간도 드리지 않고 당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타 광섬유 명찰을 워싱턴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갔었을 것이며, 데모를 그와 같이 스무스(smooth)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안 보이는 노력들이 있었을지는 저 자신 알고 있습니다.
군축에 임한 우리의 상급 대표들이 이러한 군축조약 검증에 관련된 하드웨어(물품, 물건)을 직접 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과장해도 충분하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커틴 장군은 참으로 유용한 기회였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박사님의 노력과 그리고 박사님의 데모를 위해 애쓴 분들에게 저의 개인적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데비드 괴웰
미국 해군 준장
국제 조약 차석 부소장
서신 복사 수신자: 엘렌 레이버 박사
상기 고소장에 관련하여 본 문서를 증거자료 3으로써 제출합니다.
본 고소인이 밝히려 하는 바는, 본 고소인은 “이상한 사람”, “수준이 안 되는 사람”, “홍위병”, “자칭” 박정희 대통령 대변인이라고 혼자 떠들고 다니는 사람, 그러한 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명예훼손적 발언을 한 사람들에게 한 치도 밀릴 이유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상기 고소장에서 여러 사항들을 밝힌 바 있습니다만, 미국 국방연구소 근무에 관하여 한국 측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면도 있을 것이므로 이 문건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위에 게재된 이미지 3-1은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탑재한 대륙간탄두미사일의 수효를 줄이자는 노력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를 START라고 부르며, 이에 대한 위키사전을 아래 인용합니다: https://www.atomic.or.kr/atomica/read.html?chapter=13-4-1-8
스타트 조약
START(전략무기감축협정) ( 13- 04- 01- 08)
번역자 :조 만 (1999-03 갱신년월, 2002-05 번역년월)
개요
START(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 전략무기감축협정)은 1982년 미소간에 교섭이 개시된 전략핵무기를 주체로 한 군비관리조약으로, START-1(제1차 전략무기감축협정)과 START-2(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의 두 조약으로 이루어진다. START-1에 대하여는 1991년에 미소간에 서명되었으나, 그 후의 소련붕괴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을 협정대상국으로 하여 1994년에 발효하였다. 이 조약에서는 7년간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의 전략핵무기는 모두 러시아로 이송하고,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핵탄두의 총수를 각각 6,000 개 이하로 감축하게 되어 있다.
다음 단계인 START-2에 대하여는 1993년에 미국과 러시아간에 서명되고, 미국에 대하여는 1996년에 비준되어 있다…
위에 게재된 핵탄두미사일 감축에 관련되어, 한 이슈는 감축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상호 검증할 수 있는 방안과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감축한 후의 모든 미사일에 이름표를 달기로 미소 양국은 합의하였습니다. 이름표를 주어진 수효대로 만들어 부착하고 나머지 핵탄두 미사일들은 모두 폐기하자는 방안입니다.
미국 소련의 기술능력으로서 위조를 못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 이름표를 개발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임이 저에게 떨어졌고, 수년 간 본인은 책임연구원으로서 연구조수들을 데리고 이 명찰 개발에 집중하였습니다. 이 문건 첫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 3-1은 당시 개발 중인 이름표를 미-소 핵무기 감축 협상실무자 (제네바에 거의 상주하는 미 육군 장성)에게 제 자신이 시연(데모)을 해준 후, 미 합참 사무실의 해군 제독이 저에게 그 육군 장성을 대신하여 감사의 뜻을 표한 서신입니다. 그 해군 제독은 감축협상에 필요한 기술적인 면을 총괄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으며, 성격이 쨍!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소련은 당시 재정상황이 힘들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개발한 이름표를 그대로 수용하여 사용하기로 협의하였습니다.
이 임무에 관련되어, 본 고소인은 미국 내 대륙탄두미사일 제조공장들, 미사일 사일로 등을 모두 방문하였고, 합참본부는 필요한 문들을 모두 열어주었습니다. 미사일의 보관, 이동, 장착, 정비, 발사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야 하며, 그 명찰이 하등의 지장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얼씨구,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름표 달 시간 없다, 그 연구는 중단해라, 그 대신 xxx 프로젝트를 시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소련 장성들과 우리 연구소의 대척점 (counterpart)에 있는 소련 핵무기 연구소의 당사자들이 핵무기들, 그리고 핵무기 관련 기술들을 제3세력에게 밀매할 가능성이 아주 커졌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판국이며, 당시 소련인들은 엄청 가난했으므로, 장성들과 연구원들이 한 몫 챙기려는 마음이 생길 우려가 컸습니다.
이름표 개발 대신, 그 우려를 감소시키는 프로젝트 XXX가 가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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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이미지 3-1에서 미국 핵무기 개발연구소 이름 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소재)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이유:
그 국방연구소는 핵무기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에너지부의 소유이지만, 워낙 규모가 방대하므로 (1990년대 기준으로 인원 1만명, 예산 년 1조원+), 편의 상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소재)에 행정적 운영(건강보험 등 후생 관리, 회계 정리 등)을 위탁하고 예산의 몇 퍼어센트를 수고비로 주는 형식으로 운영함. 단 임무는 행정적인 것에 국한하고 연구활동은 일체 정부가 직접 관장함. sheem_sk@naver.com
*필자/심상근. 미 버클리대 박사.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