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40대의 어느 날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했었다. 나는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며 벌떡 일어났다. 온 가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노력한끝에 27년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miss안나', '도보여행가', '실버스타' 등으로 불리는 위풍당당 69세 황경화 할머니. 그녀는 실수9단이다. ‘앗 나(안나)의 실수’를 읽다보면 눈에 눈물이 나도록 웃지 않을 수 없다. 때론 걱정될 만큼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인생은 즐겁고 당당하기만 하다.
시사주간지 <사건의 내막>은 지난 3일 <내 나이가 어때서?>와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작가이자 종횡무진 산악인, 인생 강연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황경화 할머니를 만났다. 굽이치는 세월 속에서 넘어지고 소리 없이 흐느꼈던 사연, 희로애락의 실수담, 소소한 꿈이 담긴 안나 할머니의 인생 보따리를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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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황안나 할머니와의 일문일답>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담이 있다면.
▲한번은 옛날 학부형을 길에서 만났는데 나를 보자마자 크게 웃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옛날 담임인데 나를 저렇게까지 반가워하나’하며 으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머리에 헤어롤을 꽂은 채 그대로 나왔던 것이다. 그로인해 나와 학부모는 한참동안 웃고 말았다.
그냥 재미있는 실수가 아닌 매우 창피한 실수를 한 적도 있다. 내가 단골가게에서 감자를 고르는데 있었던 일이다. 한 남자가 보기 민망할 정도의 바지를 입고 와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나 역시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가게 됐고 '왜 저렇게 입고 왔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 생각을 하다가 주인에게 감자를 달라고 말해야하는 것을 나도 모르게 ‘불알하나 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말았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키득 거렸다. 사람이 하나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그 단어가 떠오르기 마련. 나 역시 민망한 그 모습을 보다보니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단골가게 근처에 얼씬도 못하고 있다.
실수 때문에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열무김치를 하던 날 생강이 없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나는 황급히 집을 나왔다. 고무줄 늘어난 몸뻬바지에 주황색 셔츠, 끈떨어진 검정 신발을 신은 일하던 차림 그대로였다. 백화점 식품부에서 한참동안 이것저것 구매하고 나니 시장가방은 터질 것만 같았다. 무거운 가방을 끙끙대며 백화점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어떤 노신사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낯이 익어서 자세히 보니 처녀시절 나를 좋아해서 따라다녔던 사람이었다.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깔끔하게 잘 입고 다니는데 하필이면 그런 때 마주친 것이다. 속상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나이가 들어서도 한때 나를 알던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여자의 마음인가보다.
이런저런 실수를 하면서 "왜 이럴까"생각하며 나를 꾸짖게 된다.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고 금전적인 손해도 많이 봤다. 하지만 어리바리한 나로 인해 '나만 그런 게 아니다'며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을 독자들이 사랑해주는 이유도 내실수담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운 경험담을 글로 옮기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뿌듯해진다.
-보통 실수담하면 유쾌한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마음을 아프게 한 실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20만원을 급히 송금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내가 즐겨보는 책 사이에 얼른 끼워 넣고 은행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화기를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나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한 뒤 또다시 은행으로 향했다. 헌데 내 손에 들려있어야 할 책이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급히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지만 나의 책과 20만원은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금전적인 것을 잃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30대 시절의 일이다. 6학년 담임을 맡았던 그 시절, 우리반에 도벽이 있는 아이가 있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실험실에 다녀온 어느날 내 돈이 사라졌다. 분명 30만원을 가방에 넣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인해보니 가방에 없는 것. 문도 걸어 잠그고 열쇠를 창문에 끼워 놓았기에 외부인의 소행은 아니었다. 순간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왔다 갔다 하던 그 아이가 떠올랐다. 물증이 없어 드러내놓고 야단을 치지는 않았지만 나도모르게 의심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아이를 대했고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은 모두 졸업을 했다. 아이들이 졸업을 한 이후 책을 정리하던 어느날 나는 크게 당황했다. 실험수업이 있던 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돈이 책 사이에서 나온 것이다. 순간 나는 머리가 멍했다.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괜한 의심으로 그 아이를 경계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방을 알아봤지만 소년원을 갔다 왔다는 소식만이 전해질뿐이었다.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혹여 내가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닌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파온다. 평생 자책하게 만든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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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이 책으로 출판돼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을 2004년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아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을 보다 우연히 내 블로그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처음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는 '남은 인생 즐겁게?맛있게 살자'로 정의하고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방치해 놓고는 3개월 후에 들어가 보니 ‘뭐이래? 빈집이잖아?’라는 답글이 적혀있었다.
그 글을 본 후부터 조금씩 블로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때 컴맹이었지만 신문사설이나 시를 워드로 작성하는 등의 노력으로 컴퓨터 사용이 능숙해져 인터넷 다음 카페에서도 활동했다. 인터넷 다음카페에 들어가서 하나둘씩 글을 올린 것을 내 블로그에도 올리면서 시작하게 됐다. ‘안나의 실수’코너를 만들어 그날그날 겪은 실수를 기재했고 그 후 사람들이 점차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 사진과 우스꽝스런 음악이 가미돼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실수담이 큰 인기를 끌면서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블로그와 책에 실린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은 어떤 차이가 있나?
▲블로그에서는 내 실수의 흔적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신발을 짝짜기로 신은 모습, 달걀을 터트려 엉만이 된 주방, 시커멓게 태운 냄비 등을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 그에 맞는 우스꽝스런 음악도 곁들여 재미가 더하다. 블로그와 책은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것을 먼저 접했고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재미도 달라진다. 나같은 경우는 블로그를 먼저 시작했기 때문인지 블로그가 사람들에게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남편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들이 기타를 치는 모습 뒤로 녹슨 책상이 담긴 사진을 글과 함께 올렸을 때 가난한 시절을 엿볼 수 있어 좋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책을 재미있게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책은 언제어디서든 꺼내볼 수 있고 독자 스스로 상상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이나 블로그 모두 같은 내용이지만 각자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방송 프로그램 <안나의 실수>와 연관이 있나?
▲방송 프로그램 중 '안나의 실수'가 있어서 혹시 내이야기가 아닌가 물어보는데 내 얘기는 아니다.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내가 아는 지인은 ‘안나 라는 이름이 실수를 잘하는 이름인가 봐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안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실패와 실수를 통해 성숙한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며 하나씩 깨달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놓인 끝없는 화두를 풀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실수를 반복하며 울고 웃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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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실수를 하나?
▲요즘에도 실수를 자주 한다. 얼마 전에는 생방송으로 인터뷰가 있어 서둘러 집을 나왔다. 여의도 기독교 방송 cbs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늦지 않기 위해 미리 가서 서 있었다. 여유롭게 간 터라 마음 놓고 있는데 시간이 임박해 오는 것이었다. 순간 전화벨이 울렸고 pd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홀에 서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내가 서있는 곳은 cbs가 아닌 sbs방송국이었다. 결국 난 pd의 손을 잡고 급히 뛰어야했다.
다행히 시간 내에 도착해 방송을 무사히 마쳤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가끔 이렇게 대형 사고를 칠 때가 있지만 책을 읽다가 행선지를 지나치거나 신문을 보다가 음식을 태우는 일이 대부분이다. 주위 사람들은 ‘치매 아니냐’며 병원에 가보라고도 한다. 가끔 나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럴 때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나는 상기한다. 천재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실수의 대부였다는 사실을!
한번은 kbs 모 프로그램에서 ‘나이든 여자는 뻔뻔하다?’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나이든 여자는 뻔뻔한 것이 아니라 당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실수만 해도 그렇다. 젊은 사람이 했으면 흉으로 비쳐졌을 말실수도 나이든 사람이 할수있는 것은 더 많은 인생경험을 통해 당당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내가 도보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이를 거론하며 신기하게 바라본다. 60대 여성 혼자 전국을 돌아다는 것이 걱정스럽다는 눈빛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즐길 자신이 있는 당당한 여자이기에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안나’가 본명인가? 이름 외에도 별명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
▲내 세례명이 ‘안나’인데 평소 ‘미스안나’로 불린다. 전북대학의 고홍석 교수님께서 지어주신 별명으로 영국의 유명한 젊은 탁구선수 ‘안나’처럼 실수를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물론 실수를(miss) 많이 한다는 의미도 포함돼있다. 처음 그 별명을 들었을 때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하며 좋아했었다. 지금도 이 별명이 나에게 여러 가지 색깔을 부여해주는 것 같아 듣기 좋다.
현재 '도보여행가'로도 불리는데 쑥스럽다. 단지 걷는 것이 좋아 시작한 것을 거창하게 표현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일산에서 뽑은 전국에 있는 희한한 사람 12명에 속해 ‘실버스타’로도 불리고 있다. 두 가지 모두 내가 잘 걷고 이곳저곳 잘 돌아다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인 듯하다.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
▲나는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즐겼던 나는 늘 '문학소녀'로 통했다. 학생백일장에도 빠짐없이 참가해 늘 상을 휩쓸곤 했다. 춘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 작가가 되기 위해 국문과 진학을 희망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꿈을 키워가던 고3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와 우리 5남매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나는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대학을 포기했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사로 취직했다. 춘천에서 친한 친구 두 명과 함께 서울로 시험을 보러가기로 약속했던 날, 나는 친구들을 배웅하며 눈물을 삼켜야했다. 설움과 눈물을 머금은 채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때 꿈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누구보다 좋은 곳에 가리라 믿었던 나의 확신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교단에 선 이후에도 대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신입생 모집 시기가 되면 몸살을 앓았다. 캠퍼스 생활을 즐기는 친구들에 대한 동경과 내 꿈을 향한 미련이 응어리처럼 남아있어 종종 울곤 했다. 23살 때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가난하게 살아오면서 내 꿈은 잊혀진 듯했다. 그런데 ‘꿈을 꾸는 사람만이 그 꿈을 이룬다’고 했던가. 산전수전을 겪으며 머나먼 길을 돌아 왔지만 나는 기어이 내 꿈을 실현하고 말았다. 블로그를 통해 인기를 끌게 된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실리게 됐기 때문이다.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고 기회가 오기 마련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면.
▲23살에 시집을 와서 24살에 큰아이를 임신했다. 그 시기에 남편 사업이 망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월급날이면 채권자들이 집에 찾아와 빌린 돈을 갚으라며 난동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월급 때마다 봉급의 전액을 그들에게 내어주었고 늘 빈곤한 생활을 해야 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친정에 가서 누룽지를 얻어 오는가 하면 생활을 충당하기위해 과외지도를 했다. 찬방에서 두꺼운 담요에 의지하기도 했고 방학 때면 수입이 없어 끼니를 굶기도 했다. 생활이 너무도 어려워 친정어머니께 돈 이야기를 꺼냈던 때도 있었다.
친척을 찾아가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 아팠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채권자들은 ‘일수표’를 만들어 채무자의 이름과 갚은 돈의 액수를 적어놨었다. 몇 년에 걸쳐 모조전지 크기로 된 모눈종이 표에 이름이 기재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매일이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과연 나에게도 밝은 날이 올까’하는 의문조차 들었다.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했나?
▲냉방에서 살고 끼니를 굶는 일이 많다보니 파도 밀려오듯이 시련이 찾아왔다. 빚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40대의 어느 날 죽음을 결심하고 바다근처에 갔었다. 죽으러 갔던 바닷가에서 한참동안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니 가족들의 얼굴과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한참동안 파도의 움직임을 보던 순간 ‘그래 파도처럼 시련도 밀려왔다가 밀려 갈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힘겨운 나날도 언제고 추억이 된다고 느낀 것이다. 한참동안 앉아있던 나는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채권자 명단에서 사라지는 날이 있겠구나‘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 후로 늘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하며 악착같이 빚을 갚아나갔다. 온 가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노력한끝에 27년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내 스스로 인생을 되돌아본 그날을, 내 자신을 한껏 성숙하게 만들어준 그 파도를.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굴곡진 역경을 이겨냈다"
역경
“내인생길에서 70까지 살아오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고 굴곡진 나날도 많았지만 목표를 가지고 생활한 끝에 지금 이렇게 활기찬 노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나의 인생과 닮아있는 역경을 이겨내며 목표지점까지 무사히 도착했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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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도보여행가가 되었나?
▲1998년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교직 생활을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동안 빚을 갚느라 여유를 갖지 못했던 나는 내 시간을 가지게 됐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특별히 할일 없이 빈둥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난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고 결심하고 근처에 있는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에 3시간씩 부지런히 산을 다니다 보니 3년이 지나서는 부쩍 체력이 붙었다.
그렇게 체력이 붙은 상태에서 2003년에는 혼자의 몸으로 국토종단을 했다. 처음 혼자 가겠다고 했을 때는 반대가 있었지만 모두 나를 믿고 보내줬다.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일주도 했다. 그 후 나는 60대의 나이로 국토를 종단한 특이한 할머니가 되었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렇게 도보여행을 하는 동안 이곳저곳 다니며 공짜 밥도 많이 얻어먹고 공짜 잠도 많이 자봤다. 내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편하게 대해주고 응원해준다. 늙는 다는 것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어디든지 다닐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건강이 따라주는 도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도보여행은?
▲‘길은 어디에도 있다.’ 지금까지 국토종단에 스페인여행, 등산 등을 해왔지만 해안일주가 제일 어려웠다. 밤낮 길을 잃고 헤매며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바다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걷고 또 걸었고 그러다보니 길이 나왔다. 숱하게 길을 잃고 헛걸음을 쳤지만 결국 임진각까지 찾아서 도착했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반드시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인생길에서도 70까지 살아오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고 굴곡진 나날도 많았지만 목표를 가지고 생활한 끝에 지금 이렇게 활기찬 노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나의 인생과 닮아있는, 역경을 이겨내며 목표지점까지 무사히 도착했던 여행이었다. 그러하기에 더 애착이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등산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2003년 11월에는 지리산 종주를 했었다. 콘도를 예약 해놓고 혼자 떠났는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종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경비아저씨가 붙잡지 않았으며 큰일 날 뻔했다. 폭설주의보가 내려진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 당시 그것을 몰랐던 나는 고민끝에 경비아저씨를 따라 들어갔다. 산장안에 들어가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알고보니 우리집에서 전화로 한 아주머니가 오면 붙잡아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경비아저씨가 일부러 나와서 기다렸던 것이었다. 다음날 폭설이 그치고 사람들을 따라 산을 올라가려는 때 모두가 나를 말렸다. 아이젠이 없이는 산에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 결국 나는 중산리까지 와서 아이젠을 사신고 다시 올라갔다. 가방에 사과와 초코파이만을 챙겨갔던 나는 꽁꽁 얼은 사과와 두개의 초코파이를 먹고 하루종일 걸었다. 무사히 종주를 마쳤지만 준비성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산행을 하는데 있어 배워야한다고 느낀 나는 ‘아름다운 산악회’에 가입해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이 외롭거나 두렵지 않은가?
▲2004년에는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 가입해 현재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강을 따라 걷기도 했었고 금강을 따라 걷기도 했다. 금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걷고 돌아오는 것. 금년 봄에는 원주에서 '울트라 걷기 대회'에 참가했다. 5월 3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출발해 다음날 오후 5시까지 100km를 걷는 코스였다. 6군데의 체크포트에 들러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밥을 먹고 쉬는 것을 포함해 2시간을 빼고는 거의 22시간 내내 걸었다. 75km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을 좀 했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후 8월에 달빛걷기대회 등 걷기대회가 성행했다. 이번 10월에 완주에서 또 한번의 걷기대회가 있는데 초청을 받은 상태다. 작년 금년 통틀어 여자 60대가 걸은 것은 나 혼자라 그런지 초청이 많이 온다. 나는 현재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내 주어진 임무에 책임을 다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길을 떠날 수 있다. 내 지난 인생에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과 싸워도 보고 부둥켜안아도 본 나로서는 혼자라는 사실이 결코 두렵지 않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60년 이상 살아온 내가 무엇이 무섭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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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가족'이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삶의 희망이다. 가족이 있으니 지금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 기대고 아껴주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 그것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이다. 평소 며느리들과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한번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스페인에서 2달 넘게 여행을 했다. 그 시간동안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싸우고 하다 보니 어느새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됐다. 서로 대화를 시도하고 이해하고 신뢰하면 고부간의 갈등은 사라지는 것 같다.
나는 가족 중에서도 특히 남편에게 고맙다. 내가 무엇을 하든 믿고 따라주고 힘을 준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세상의 남편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내의 일탈을 막지 말라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격려하며 도와주면 그만큼 감동하기 마련이다. 아내가 4개월간 나가있는데 걱정하지 말고 갔다 오라며 보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이가 들면서 살아가면서 무덤덤해지고 매일이 똑같이 느끼게 되는 부부관계다. 하지만 나는 도보여행을 하면서 남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의 굴레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연애시절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게 됐다.
‘할아버지가 보내줬나, 나 같으면 이틀만 자고 온데도 이혼할거다’라고 하는 말을 운전기사에게 들을 때는 내 남편이 더 고맙게 느껴진다. 봄에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다른 남편들 같으면 '언제 오냐'고 닦달 했 텐데 내 남편은 '벚꽃지기 전에 와라. 보고싶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로 감동을 줬다. 차를 바꾸고 얼마 안 있어 내가 사고를 냈을 때도 ‘당신 다치지 않은 것으로 다행’이라고 말했다. 비록 젊은 시절, 남편이 지은 빚으로 인해 고생을 했지만 다정하고 착한 남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젊었을 때 못해준 것을 다 해 주겠다’는 남편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요즘은 주로 어떤일을 하고 지내나?
▲주로 강연을 하러 다니거나 산에 다닌다. 교단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인지 강연이 낯설지 않다. 어떤 때는 매주 강연을 하기도 하는데 요즘에는 시간이 날 경우에만 한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몇 달 동안 병원을 다니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을 병원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돕고 있다. 우리 오남매 모두 일주일에 두 번 병원에 나와서 어머니를 간호한다.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하고 있다.
하루에 수도 없이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등 마사지도 해드리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고운 시절이 있었다. 이런 저런 고생하며 자식들 키우느라 많이 늙으신 우리 어머니... 살아계시는 동안 원 없이 "사랑해"라고 말하며 따듯하게 손을 잡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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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랑을 하고 미워도 하며 살아간다. 인간관계란 것은 화분이나 꽃밭을 가꾸는 것과 같다. 말 한마디라도 따스하게 건네고 신경써주며 쉴 새 없이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파트공원을 잠시 산책한다던지 칼국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던지 일상적인 것을 함께 하면서 표현해 나가는 것이 그 예이다. 소중한 가족에게 가까운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세. 우리 모두 관계의 미덕을 느끼고 행할 때다.
-젊었을 때 꿈이 많았을 텐데,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꿈이 있나?
▲꿈이 없으면 낙이 없다. 이 나이에 무슨 꿈을 갖나하는데 아직까지 나는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지금의 내 나이는 편하면서도 견디는 시기인 것 같다. 나도 나이를 먹은 만큼 아프지만 아픔을 누워서 느끼느니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고관절로 인해 척추가 내려앉아서 허리가 아프지만 이것을 도보를 통해 이겨내는 것이다. 다들 모르겠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함께 할 나의 지병과 같이 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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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견뎌야하는 것이 아픔뿐이겠는가. 자식들은 품에서 떠나 결혼을 하고 남편과 언제까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 감당해야할 외로움과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롭게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캐논 5d를 사줘서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지만 처음 배우는 것인지라 어렵게 느껴진다. 사용설명서도 보고 혼자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견디는 삶에서 보다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는 또다시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노후를 즐겁게 견디는 것. 그게 바로 내 꿈이다.
-좌우명이 있다면.
▲나는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두렵고 겁이 나는 일이 있으면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한다. 사업의 실패로 인해 빚더미에 앉았을 때도 그러한 생각으로 생활하며 이겨냈었다. 나이를 먹은 후 바이킹을 탔을 때도 그러한 마음으로 탔다. 그리고 너그럽게 생각 하며 살아간다. 배신과 난처한 일을 당할 때면 ‘이만하기가 다행’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예전에 동료에게 돈 4000만원을 빌려줬다가 떼인 일이 있다. 예전에 어려운 일을 겪었던 기억이 떠올라 서슴없이 빌려줬지만 돌려주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엔 잠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 난 이만한게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는 털어냈다. 난 늘 생각한다. 누구라도 곤경에 처하고 살길이 막막해도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면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난 언제만나도 편안하고 포근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떠올렸을 때 ‘아! 그 편안하고 재밌는 할머니!’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어리바리하고 실수 잘하는 나를 통해 사람들이 시원하게 웃음 짓기를 희망한다. 또한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 속상한 일 있을 때 불러내서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대해주었으면 좋겠다.
-<사건의내막>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게 있다면.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기원한다. 나도 한때는 세상에 이를 갈며 살았다. 세상이 밉고 원망스러워 하늘에 주먹질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생각을 거듭해 보니 세상과 싸우고자 했던 내 마음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부정은 그늘을 낳고 긍정은 빛을 낳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음을 다잡고 그동안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니 표정이 좋아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적인 생각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독자들도 각자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취재 / 김문수 기자 ejw0202@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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