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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성찰,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것인가?

권기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3/28 [10:49]

▲ 권기환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죽음은 생명체의 소멸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는다. 특히,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일종의 운명과도 같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다른 생명체와 달리 죽음에 대한 일종의 공포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선뜻 죽음을 받아들기보다 ‘난 할 일이 아직 많은데 왜 지금 죽어야 하지’하면서, 스스로든 주변 사람들이든 원망하기도 한다. 누구든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갑작스럽게 닥친 사형선고와 같은 죽음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예외 없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충분한 명예와 풍족한 부를 가졌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기 마련이다. 평상시에는 아무도 죽음에 관해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현장을 보고 나서는 누구든 죽음에 관해 한번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불의의 참사로,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자기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화를 당한 사람들의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갈린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서로 구별된다. 나의 죽음은 나라는 주체가 소멸하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죽음 직전에 잠깐 알 뿐, 그 이후로는 나의 죽음이란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실로 나 자신의 죽음은 나의 존재 자체가 전부 무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존재하는데, 내가 없으니 그 세계가 있어도 전혀 알지 못하니 실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염려와 적정 그리고 불안과 공포심을 갖는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인간은 무병장수(無病長壽) 혹은 불로장생(不老長生)과 같은 소망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과 다른 것은 나 자신이란 없고, 오로지 타인들에 의한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때 왜, 언제, 누가, 어디에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한다. 그런데 타인의 죽음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타인의 죽음을 내가 2인칭의 시각으로 보면, 2인칭의 죽음은 나와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죽음이다. 그 때문에 그 죽음에 관한 한, 각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내거나 슬픔과 비탄에 잠기거나, 혹은 한탄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반면에 3인칭의 죽음은 나와 무관한 죽음이다. 이것은 그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자칫 죽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쉽다. 대규모 참사에 의한 희생자들에 관해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기보다 ‘나는 그럴 일이 없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어느 순간 2인칭의 죽음과 마주했을 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논어』 선진편에서 계로(季路, 기원전 542-기원전 480 : 노나라의 정치가)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공자는 죽음 자체에 대해 매우 애통해했다. 비록 가난했고 불우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덕망이 높았던 안연(顏淵, 기원전 521-기원전 491)이 일찍 죽자, 공자는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자는 너무 슬퍼서 곡까지 했는데, 공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애통해한다고 하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지나치게 애통해 한다고? 이런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 죽음보다 삶을 강조했던 공자였지만, 아끼는 제자가 일찍 죽었으니, 공자가 이를 애통해하는 것, 그것은 바로 2인칭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아마도 공자가 첫 번째로 거론되는 제자여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유교는 현세종교이기 때문에, 죽음보다 삶에, 현실적 삶과 도덕적 실천을 더 중시한다. 이와 반대로 내세종교인 불교는 삶과 죽음을 완전한 단절로 보기보다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생사불이(生死不二)를 강조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생사윤회(生死輪廻)에 근거한다. 생사윤회는 모두 인과법칙에 의한 연기설로 이어진다. 연기설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원인을 뜻하고, 바로 이것들로부터의 벗어나면 해탈(解脫)의 경지인 열반(涅槃)이 된다. 불교는 생사의 극복, 이로 인한 번뇌와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삼는다. 그 때문에 불교의 핵심교리는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이고, 이를 위한 수행방법은 팔정도(八正道)다.         

 

필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지나치게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현세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사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태어난 것이 중요하기보다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죽은 자가 말할 수 없으니, 죽은 자와 관계되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름이나 업적으로 회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필자에게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부고 소식을 듣는다. 필자가 독일 유학 중에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었거나 조언을 해주었던 많은 분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작고하셨다. 이들 중에는 직접 만나서 조언을 해주었던 분들도 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저술과 논문으로만 아는 분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일 유학 전에 학문적으로 영감을 주었던 은사님을 비롯해 학술 모임에서 서로 만나 솔직한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필자는 그때가 좋았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현재 삶이 멈추는 일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스스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단지 죽음에 대해 한 번이라도 성찰하는 정도면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공포심을 갖는 것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현재의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가치 있게 삶을 구현하는 것은 죽음을 마주하거나 직면했을 때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거기에서 죽음이 무엇인가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 비록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법이다. 영원한 삶도 영원한 죽음도 없다.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에서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자기 자신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듯한 주관적 감정에 기인하는 것일 뿐, 오히려 자살 이후에 효과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더욱이 자살의 방식은 삶을 변화시키지도 않고 고통 자체를 경감시키지도 못한다.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변할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문제는 자살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책임감으로 인해, 혹은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면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대체로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외부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버리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쌓아 놓은 모든 것을 한순간 매장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 두려움은 개인의 경우에 그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 직면할 것인지, 어떤 태도로 죽음과 만나야 하는지와 연관된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다. 거기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소중하고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jgfichte@naver.com

 

 *필자/권기환

철학박사. 동국대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지겐대 제 1학부(역사-철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Dr. phil.)를 취득했다. 경희대, 경기대, 명지대, 상명대, 강남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는 가천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독일 관념론, 독일 초기 낭만주의, 프랑스 현상학, 해석학, 동서 비교 철학 등이다. 한국 헤겔학회, 한국칸트학회, 한국해석학회, 한국 현상학회(전 정보이사), 서양 근대철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Death is the extinction of life. All living things are born and die. In particular, for humans, death is a kind of fate. Unlike other living things, humans do not readily accept death because of a kind of fear and fear of death, but rather resent themselves or those around them, saying, "I still have a lot to do, why should I die now?" Anyone can have the same feeling. In the face of the reality that death, such as a sudden death sentence, is unprepared and must be accepted as it is, no one is exceptional. No one, no matter how capable they are and have sufficient honor and wealth, is helpless in the face of death. Usually, no one talks or thinks about death. However, after seeing the scene of death, anyone is bound to think about it. The most regrettable thing is the death of people who were angry while saving others through self-sacrifice, a sudden disaster. 

 

 However, there are two different views on death. My death and the death of others are distinct. I only briefly know that the subject of my death is extinguished, that is, I die right before my death, and after that, my death has no meaning. Indeed, my own death removes everything from me because my existence itself turns into nothing. The world exists as it was before and now, and without me, it is truly hopeless to not know anything about it. There we are, anxiety, fear, appropriate, and anxiety about death. Perhaps for that reason, humans may have the same wish as 病 without 老 or eternal life. 

 

The difference between my death and the death of others is that I do not have myself, only the emotions of others remain. However, the death of others has a strong emotional effect on all of us. Furthermore, we think about why, when, who, and where it happened at this time, and what life is through the death of others. However, the death of others depends on each person's perspective. When I look at the death of others from the second person's perspective, the death of the second person is the death in the closest relationship with me. As far as death is concerned, each will reveal the most painful emotions, grieve and grieve, or voice lamentation. On the other hand, death in the third person is a death that has nothing to do with me. This is just to see it as one of the events that occur every day. However, this view is likely to lead to indifference to death. People who lack empathy for the victims of large-scale disasters take an attitude as if they are watching the fire across the river, thinking, 'I don't have that happen' or 'they did something wrong' rather than thinking, 'I can be like that.' However, at some point, when such a person faces the death of the second person, he collapses without hesitation. 

 

 In the advanced edition of 『The Analects』, when Gye-ro (542-480 BC: a politician of Lu Dynasty) asked Confucius about death, Confucius replied, "How can one know death when one does not even know life?" (未, 焉) However, Confucius lamented very much about death itself. Confucius said, "Ah! The sky is abandoning me! The sky is abandoning me!" (噫, 喪予, 喪予) when Anyeon (521 BC-491 BC), who was poor and poor, died early. Confucius even sang a song because he was so sad that Confucius said that those who follow him mourn too much, so Confucius asked back. "You mourn too much? Who would you do it for if you don't mourn for such a person?" (慟乎? 夫? Confucius emphasized life rather than death, but Confucius mourned it because it was the death of a second person. Or maybe it is even more because Confucius was the first disciple mentioned in the official 孔 十哲. 

 

 Since Confucianism is a secular religion, it places more importance on life, real life, and moral practice than death. On the contrary, Buddhism, the next religion, emphasizes the 二 of life and death, which identifies life and death rather than seeing life and death as a complete disconnection. This is fundamentally based on the 輪廻 of life and death. All life and death reincarnation leads to the theory of smoke based on the law of causality. The theory of smoke refers to the cause of all suffering and anguish, and if you get away from them, you become nirvana (涅槃), the state of liberation (解脫). Buddhism aims to overcome life and death and to relieve suffering from anguish and suffering. For this reason, the core doctrine of Buddhism is 苦集滅, which is the Four Holy 諦, and the way to practice it is 八.         

 

I don't think you need to have too much fear and fear of death. All humans die. However, that doesn't mean that anyone who thinks that life in this world is meaningless because it is a life to die anyway is nothing more than taking their own life lightly. Life is important to everyone. In fact, what kind of life you lived and died after that is more important than when, where, and from whom you were born. However, since the dead cannot say this, it is just becoming a conversation by name or achievement by the remaining people related to the dead.

 

I also receive obituaries through various channels. While studying in Germany, many of the people who helped me or gave me advice academically also died for various reasons. Some of them met in person and gave advice, but others only knew about writing and thesis without meeting in person. In Korea, there were also people who met each other at academic meetings and had honest conversations, including my teacher, who was an academic inspiration before studying in Germany. At that time, I often thought that I liked it. However, that will not stop my current life and will not.

 

While living a given life on my own, I would only need to reflect on death once. Rather than being afraid or afraid of death, cherishing one's present life and realizing one's life valuefully through the death of others is more helpful when facing or facing death. From there, how to die will come naturally rather than what death is. Anyway, it is human destiny to live a given life, even if life is painful and difficult. If there is life, there is death. There is no eternal life, no eternal death. No one can escape it. Some are born in the passage of time, and some die. The same goes for other living things. 

 

People commonly think of death as a way to escape the pain of life. However, that is not the case at all! In general, suicide is only caused by a subjective feeling that one's own pain can be escaped, but rather, after suicide, the effect adds to the pain of others around oneself. Moreover, the way of suicide does not change lives or alleviate the pain itself. Isn't it possible that the world will change just because one person dies! The problem is that suicide still exists. Some people end their lives without being able to bear the pressure, self-isolating themselves out of responsibility or guilt. In this case, it is usually caused by the fear that one's existence is completely excluded from the outside world, receiving no help, and that everything one has accumulated may be buried for a moment. This fear is likely to destroy everything in an individual's case.     

 

Reflection on death is related to how we face death and how we must meet it. However, death itself has no meaning. Rather, through death, we discover the meaning of life again. As long as we are alive there, every moment is precious and meaningless.

권기환 칼럼니스트
jgfichte@naver.com
철학박사. 심리상담사. 노바 토포스 회원. 가천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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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cmaca 2024/03/29 [03:50] 수정 | 삭제
  • 죽음에 대한 공자님의 생각은, 젊은 제자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분야니까, 체험을 거쳐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바라는 형이상학적인 가르치이십니다. 유교사회에서는 天(하느님,하늘)을 두려워하고, 공자님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따르며, 법치국가의 틀내에서 군자의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공자님께서 하늘(天,하느님)에 죄지으면 빌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공자님이 天[하늘(하느님),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아 깨달으신 天命,天德(공자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으신 德)에 의해 가르치신 도덕과, 인의예지신, 공맹의 가르침에 근거한 삼강오륜등을 생활화하고, 法(공자님도 한때 대사구란 형조판서격 재판관의 공직도 수행하심, 한나라의 율령은 이후 한국 고대사회에 수용됨)에 근거한 유교전통 계승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불교Monkey일본 항복후,조선성명복구령, 한국은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으로 복구되었고, 학교교육도 유교교육이 주류입니다. @공자님이나 맹자님의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하면서, 후대에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성인들의 행적을 재단하면 않됩니다. 공자님은 인간을 낳으신 하느님(天, 시경 天生蒸民)과 神明,조상신 숭배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예법과 도를 설파하시며, 중국 천하를 주유하시던 빈객형태의 사상가로 대부분의 삶을 사셨습니다.공자님은 대사구란 벼슬을 하신적 외에는 대부분 천하를 주유하시며 빈객형태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제후들에게 공자님의 사상을 전파하시던 분입니다. @유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게 내세이고, 하느님이 그 혼을 평생의 업적에 따라 받아들이고, 후세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제사하면, 천국에 살게 되는 원리를 가졌습니다.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유교는 이번생, 저번생같은 윤회가 없습니다. 유교나 가톨릭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 인간이 가장 중요할뿐, 불교 Monkey처럼 사람이 동물로 윤회하거나 하는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한번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나면 창조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지, 불교 Monket처럼, 윤회나 전생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유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하늘로 승천하고, 현세에서 죄를 지었으면 그에 맞게 처우됩니다. 유교는 혼이 하늘로 승천하여 하늘나라에 머물사람은 머물게 됩니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개념이겠지요. 최고신이신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후, 인간의 몸에서 하늘로 승천하여 계절을 다스리시는 오제(五帝)가 되신, 계절의 하느님을 하늘나라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그 오제께서 머무시는 魂의 영역이 하늘나라(하늘,천당)인것입니다. 이 오제로부터 조상신 개념이 성립되어, 후손들은 조상신의 반열은 되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을 불러 조상제사를 행해왔습니다(유교는 제천의식, 地神제사, 산천제사, 조상제사, 선성이시자 至聖先師로 추존되신 공자님제사등 다신교 신앙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행한 행동에 따라, 하느님기준.선악의 기준으로, 하느님과 하위 신들이 결정하는 영역중 하나가, 하늘나라로 그 혼을 받아들이는것입니다(하늘나라, 천당에 살게됨). 혼을 하늘나라로 승천시키지 않으면, 그 혼은 갈곳없이 떠돌아, 그게 지옥이겠지요. 한번뿐인 고귀한 인생, 부처 Monkey의 불교처럼 동물로 인간을 비하하지 말고 열심히 사는게 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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