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내 주관을 강하게 담은 칼럼들을 써왔다. 그 칼럼을 읽은 분들 가운데는 내 생각에 찬동을 하는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동의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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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간 백편 이상의 시를 써왔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내용의 시들이었다. 내가 쓴 시를 혼자서 읊조리기도 하고, 사적 모임에서 낭송하기도 했다. 또는 시인들의 시 낭송회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다수 매체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간 저술활동도 해왔다. 쓴 책들이 30여권에 달하니 다작을 한 셈이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디지털 콤팩트 카메라로 백령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찍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저런 활동들은 결국 문화라는 공간확장을 위한 일들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생에도 허허로운 벌판이 있다면, 그 벌판의 한 가운데 외로이 서서 인생을 반추한다면, 나는 나의 벌거숭이 몸에 줄곧 문화의 옷을 입혔다는 생각을 할는지 모른다. 그 벌판에 서서, 내가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벌거숭이 그대로 일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라면, 문화란 손에 잡히지도,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는 무기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어찌하여, 내 몸에 문화라는 옷을 입히려고 발버둥을 쳤을까?
산과 집과 거리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은 볕과 물과 공기와 토양 속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 나무들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무언가 먹고 키를 키우고 가지를 뻗으며 자라듯이, 사람도 정신적 물질적 그 무언가를 섭취하며 삶을 영위해 간다. 정신적 그 무언가가 문화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시장주의 사회이다. 필자가 지향하는 문화는 자본주의니까 자본을 먹고 자랄 것이다. 문화란 독창적이어야 한다. 문화란 아름다워야 한다. 문화란 고통스러워도 고귀해야 한다. 삶의 진한 액체가 녹아들어 역사와 함께 어우러진 게 진정한 문화이다. 문화란 미래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동력이다.
시내 공원을 배회하는 일부 노숙자들의 옷에서는 자주 빨아 입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난다. 내가 나에게 꾸준하게 입혀 온 문화라는 옷에서도 그런 퀴퀴한 냄새가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은 문화는 곧 양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으나 시대의 양심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몸에 옻이 올라 가려워서 긁적거린 적이 있다. 긁을수록 시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긁어댄 붉은 피부에 새 살이 돋는다. 원래 기자란, 신문 발행인이란, 세상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글쟁이로서 세상의 가려운 곳을 계속 긁어댈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문화라는 새 살이 돋아나게 하는데 힘을 보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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