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범제 화백(57세)은 11월 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시 강동구 풍납동 아산병원 로비 내에 있는 '갤러리 서울아산병원'에서 16번째 개인 전시회를 연다. 이 전시회에는 금강산을 주제로 그린 그림 20점과 정물화 10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는 금강산으로 그림을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금강산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스케치해 왔다.
한국 화단의 중견인 조 화백의 전시회는 언제나 특별한 데가 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치열하게 작품을 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가난이 그의 친구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늘까지 내달렸다.
그의 예술적 삶은 한 마디로 '치열', 그 자체였다. 미술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 10여년 머물면서 그림공부를 했다. 그림공부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고 한다. 음식점 접시닦이, 사무실 청소, 잔디깎이, 세탁소, 풀장 청소, 벽돌쌓기, 건축 아르바이트 등 안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미국 생활 내내 미술 공부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혁대가 땀으로 절어 있었습니다.”
귀국해서 결혼을 했으나 스스로를 거세, 후손을 갖지 않았다. 예술적 삶에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처절하게 시간과 싸우고, 고독과 벗하면서, 삶의 시간들을 작품을 위해 마모하고 있다. 이 처럼 고된 수학과정을 거친 화가 조범제는 처절한 고독의 과정을 거치며 창작 작업에 몰두, 환희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로 성장했다. 그의 작업실은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에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부근이다.
“나는 매일매일 처절하게 시간과 싸운다. 하루 세 시간 이상 잠들지 않는다. 나에겐 시간을 아무렇게나 허비할 여유가 없다. 늘 깨어서 작품을 한다.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고, 덧칠하고, 계속해서 색을 입힌다. 매년 60-70여점의 작품을 한다.”
5세 때 누나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52년간 화가로서 외길을 걸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전시회 때마다, 매번 화풍을 바꾸어 16회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한 번도 동일한 화풍의 전시회를 가진 적이 없었다. 매 전시회 마다 화풍을 달리했다. 60세가 넘으면 내 화풍에서 공통분모들 발견, 그때 나의 대표작을 남기고 싶다.”
그는 매 전시회마다 주제를 달리했기 때문에 작품 만드는 것을 힘들어 했다. 피카소가 이 세상에 다시금 살아온다 해도 조범제의 작품을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은 피카소를 어찌 산 조범제 화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조 화백 작업실을 두 번 방문, 그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작업실 정면엔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조시원의 얼굴이 담겨진, 정부에서 제작한 이달의 인물 팜프리트가 걸려 있다.
독립운동가 가족이라서인지 가난한 과거였지만, 국가관 나라사랑에 대한 방법이 남 다르다.
조 화백은 미술평론가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제대로 작품 평을 해주는 평론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을 바라다보면 섬세함과 더불어 환희로운 아름다움이 늘 함께하고 있다. 시간과 싸우며 작품을 해온 그의 작업실에는 온통 작품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작업실이 아직도 세상으로 나가지 않은 작품들의 창고(?)로 변해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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