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정축(1457년) 6월 22일 기록이다.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 현 광진구 화양동)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상기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뜨인다. 노산군(단종)이 유배를 가면서 자신의 죄를 일개 환관에게 스스로 자백하는 내용이다. 흡사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당연시 한 듯한 발언으로 여하튼 단종은 4개월 후인 동년 10월 24일 영월에서 사사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층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가서 자규루에 올라 지은 글 중 일부다.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말하노니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상기의 글을 살피면 단종은 분명하게 춘삼월을 언급했다. 즉 봄 3월에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회한을 글로 풀어냈다. 이뿐만 아니다. 역시 자규루에 올라 지은 시 중 일부를 살펴보자.
소리 끊기고 새벽 봉우리에 남은 달 희어지니
봄 골짜기에 피 흐르듯 떨어지는 꽃 붉네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이 시에서도 春, 봄을 언급했다. 아울러 상기의 두 글을 살피면 단종은 1457년 봄에 영월에 있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6월 말에 영월로 귀양 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영월에서의 단종의 행적에 대해서도 모순이 드러난다. 정설로 굳어진 기록에 의하면 단종은 애초에 청령포로 적소가 정해지고, 홍수로 그곳이 물에 잠겨 동헌인 관풍헌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사사되고 시체를 청령포에 버렸다고 한다.
너무나 어설프다. 비록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가지만 당시의 신분은 노산군, 즉 왕자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를 절해고도로 표현되는 청령포에 수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애초에는 그의 직급에 걸맞게 영월의 관풍헌으로 적소가 정해진다.
그러나 여름, 6월말에 다시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인의 입장인 만큼 더 이상 관풍헌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으로 이 시기에 청령포로 이배된다.
그리고 10월 24일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곳에 시체가 방치된다. 여기서도 주의를 요해야 할 사항, 관풍헌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면 굳이 시체를 청령포에 버리지 않았다는 점, 역적의 시신은 그냥 최후를 맞이한 지점에 방치했다는 당시의 사실을 적시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일도 그러하지만 역사 역시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단종의 최후를 정리하면, 단종은 조정에서 내치자는 공론이 극에 달했던 1457년 1월 말 경에 영월로 귀양가며 관풍헌에 적소가 정해진다.
그곳에서 봄을 보내고 여름이 되어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인으로 전락하며 청령포로 적소가 바뀌고 마침내 그곳에서 사사되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cleanercw@naver.com
*필자/황천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