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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2>

머리스타일과 옥 절풍의 고유성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1/13 [13:35]
▲ 박선희  교수   ©브레이크뉴스
중국인들은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고 있다. 대표적 문화로는 후기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와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이다. 홍산문화는 1930년대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적이 있었고, 1970년대 이후 중국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 초기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가 황하문화로 부터 전파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화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고 규모가 매우 큰 유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에 있어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만주지역의 선사문화를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띤 문명권으로 인정하고 이를 총칭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 이러한 명칭을 붙였다고 하여 만주의 고대문화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문명적 요소가 규명될 수 있어야 한다. 
   

▲ 남인상     ©브레이크뉴스
요하문명이라는 용어에는 이 지역의 문화들을 황하 유역의 황제문화에 포함시키기 위한 중국인들의 계략이 자리잡고 있다. 요하문명이라는 명칭에는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일본열도 등의 고대문화를 황화문명의 변방 문화로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요하문명의 성격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필자가 연구해 온 홍산문화의 독창적인 복식양식과 장식기법, 염색기법 등이 절제 있게 복합된 복식양식은, 이후 고조선으로 이어져 전통기법을 이루며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홍산문화가 고조선이 출현한 초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발전했고, 다시 고조선 비파형동검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로 발전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황하문명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선사문화는 요하라는 하나의 강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으며, 요하문명을 황제 문명에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요하문명을 황제문화에 포함시킬 수 없는 근거를 홍산문화의 성격을 근거로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복식과 예술에 나타나는 한민족문화의 기원과 정체성을 해석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홍산문화의 복식유물과 종교예술에 동반된 유물들은 종류와 성격에서 다양성을 보이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특히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종래에는 중국과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문화적으로 공통된 요소가 발견되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파되어왔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황하유역이 동아시아문명의 발상지였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발굴과 그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반도와 만주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왔을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와 만주의 신석기시대 시작 연대는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일찍이 문화가 전개된 것으로 알려진 황하 유역보다 앞섰던 것으로 나타난다. 
    
▲ 청동마구장식     ©브레이크뉴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고, 이 시기 남녀모두 귀걸이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압록강에 위치한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에서는 춘천 교동 혈거유적과 김해 옹관이나 김해 무계리의 지석묘 등 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에서 管玉이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중국에서는 곡옥을 비롯한 옥기들이 위의 동북지역보다 약 1,000년 정도 늦게 만들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신석기시대문화는 황하중하류지역, 양자강중하류지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황하중류유역의 서기전 5,000년기의 앙소문화에 속하는 남정현 용강사유적에서 옥제품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문화의 옥기제작기술이 가장 발달한 것은 양자강 하류유역의 양저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이다. 양저문화는 이보다 앞선 서기전 3,000년기에 속하는 마가빈문화와 절강성의 하모도 3·4층 문화(서기전 5,000∼서기전 4,000년기)로부터 발달된 것으로 이들 문화층에서는 다양한 옥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근거하면 오히려 옥기 등의 문화가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여 중국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와 같이 동아시아의 모든 문화가 황하유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는 선입관이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흥륭와문화 이후 발굴된 요령성 서부 부신에 위치한 사해문화유적(서기전 5,600년경)에서도 흥륭와문화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양식의 옥귀걸이와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옥기는 옥귀걸이, 옥구슬 등의 장식품과 실용공구인 옥도끼와 옥칼, 화살촉, 새김무늬 질그릇 등이었다. 사해유적은 흥륭와문화가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옥기가 출토된 지역이었다. 이 문화는 홍산문화 보다 앞선 문화로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한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이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이 유적들에서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이들 유적지에서는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 후기의 요령성 건평현 부근에 위치한 우하량 여신묘유적(서기전 3,500년)에서는 큰규모의 돌무지무덤과 흙으로 만든 신상이 출토되었고, 중앙에 있는 석관묘에서 많은 량의 옥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옥기 가운데 비파형동검을 옥으로 만든 것이 출토되어 고조선문화와의 관계를 입증해준다.  
   
이처럼 한반도와 만주의 전 지역에서는 중국보다 앞서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다양한 옥제품이 생산되었으며 이 옥기들이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양식과 같은 계통의 것으로 고조선 문화로 지속됨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에 근거하면, 오히려 옥기 등의 문화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여 중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홍산문화의 복식유물과 종교적인 예술활동과 관련된 유물들을 해석하고 이를 고조선문화와 관련해 고찰한 선행연구는 없다.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를 밝혀보기로 한다. 
      
  
▲ 가면     ©브레이크뉴스
첫 번째로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 가운데 속발(束髮)과 관련이 있을 옥 절풍의 고유양식이 고조선 문화와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까지 지속되었음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의 우하량 1호 적석총 M4와 M15유적에서 옥고가 한 개씩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옥고의 출토위치가 두개골 아래 혹은 정수리 아래쪽 일 것이라고 밝히며 머리를 틀어 묶고 이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옥고는 속이 비스듬히 드러나 보이는 원통형으로 윗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약간 넓으며, 아래 부분의 양쪽에는 각기 1개의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머리꽂이를 꽂는 것이 가능하다. 발굴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고 옥고가 이를 덮었을 것인데 무게로 인해 미끄러지므로 머리꽂이로 고정시켰을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이 옥장식이 머리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의 구실도 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머리양식은 틀어 올려 진 상투머리양식이고 맨상투 위에 옥고와 유사한 것을 덮어씌워 매무새를 갖춘 두발 모양이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같은 시대 북방지역 석인상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것과 구별된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의 유적들에서는 머리를 틀어 올리면서 꽂았을 머리꽂이가 골고루 출토되어진다. 신석기시대의 머리꽂이는 주로 새의 뼈와 뿔 등 가벼운 재료로 만들었고, 옥이나 돌, 토기조각으로도 만들었다. 머리꽂이는 주로 문양이 없이 밋밋한 것이 대부분인데, 간혹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점 또는 선을 누르거나 그어서 문양을 새긴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양은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문양과 같은 양식으로 이후 고조선으로 지속된다.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과 가깝게 위치한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조소품인 남신상에서도 보인다. 발굴자들은 이 인물상이 서기전 3,300년 무렵에 속하다고 했다.

   
남신상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매우 특징적인데, 머리 뒤에서 땋아 세 번 돌리면서 정수리로 올려서 끝자락을 이마 바로 위 머리까지 내려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옥문화가 발달하고 머리 장식이 출토되었던 예로 보아 땋은 머리자락을 마무리한 장식은 옥장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보아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러한 머리를 덮어씌웠을 옥고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머리를 틀어 올려 위의 인물상처럼 끝부분을 옥장식으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옥고를 씌우는 머리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으로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은 남신상의 다리를 접고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찾아진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머리꽂이를 사용해 일정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리꽂이는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틀어 올린 머리를 덮는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널리 사용된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홍산문화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는 작은 크기의 절풍 모양 옥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이 옥 장식품이 절풍을 조각한 것이라면, 절풍은 고조선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고는 고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절풍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조선시대의 틀어 올린 머리와 관모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되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로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및 󰡔진서(晋書)󰡕 등에는 고대 한민족이 머리를 틀어 올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韓)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머리양식은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졌을 것이다.  
  초보산유적출토 남인상

고조선시대에는 머리꽂이를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춘추후기에 속하는 요령성 금서 사과둔유적에서는 금으로 만든 18쎈티미터 길이의 머리꽂이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서열이 높은 금속인 금으로 머리꽂이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복식양식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같은 춘추시대에 속하는 고조선의 유적인 오한기 초보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남자상은 머리를 정수리 위에 틀어 올리고 그 위에 절풍과 같은 상투만을 덮는 모자를 쓴 모양이다.
 
중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머리꽂이가 출토되지만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처럼 모든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머리꽂이는 주로 황하중류 유역에서 출토되어진다. 하북성 자산유적에서 뼈로 만든 머리꽂이가 출토되었고, 서안 반파유적에서 돌과 뼈등으로 만든 머리꽂이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같이 황하중류유역에서 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것은 그 지역의 머리양식으로부터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로 감숙성 태안대지만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양식은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이다. 감숙성 임조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모양은 정수리에서부터 S자모양으로 땋아 내려뜨린 모양이다. 청해성 대통현 상손가색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그림의 사람들은 모두 짧은 묶은 머리를 하였다. 이처럼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와 땋은 머리모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황하중류유역에 위치했던 상왕조의 유적인 안양 은허 5호무덤에서는 묘주인 부호의 옥으로 만든 머리꽂이 20여개와 뼈로 만든 머리꽂이 490여개가 출토되어 머리양식이 무척 호화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고학의 출토자료로 보면, 상왕조시대의 남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짧게 땋아 내려뜨리거나 머리 전체를 말아 올렸는데, 그 실제모습이 부호묘에서 출토된 옥과 돌로 만든 사람 조소품에서 보인다. 돌로 만든 사람의 머리양식은 모자 안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야 하므로 머리꽂이를 여러 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머리꽂이의 사용방식은 한민족의 머리양식처럼 상투를 찌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의 선사유적에서 머리꽂이가 출토되는 것과 달리 중국의 선사시대유적에서는 주로 황하중류유역을 중심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요인이 될 것이다. 
  
고조선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변이나 절풍과 같이 상투머리만을 덮는 폭이 좁고 높이가 있는 모자를 썼던 것은 홍산문화시대로부터 형성되어져 널리 정형화된 머리양식이다.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상투머리에 변이나 절풍을 많이 썼음이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출토되어진 유물들로부터 확인 된다. 실제로 부여사람들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에서 지속성을 보이는데, 길림시 모아산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이 같은 머리양식은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것과 유사하다.  
    
같은 머리양식이 유금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와 고구려의 가면에서도 보인다. 길림시 동단산에서 출토된 유금으로 만들어진 입체감 있게 만들어진 가면은 머리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발굴자들이 정수리부분을 그림에서와 같이 점선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면 상투머리 양식이다. 또한 고구려의 유금으로 만든 가면 역시 윗부분이 손상되었으나 정수리부분이 올라간 같은 양식이다.
고구려의 금으로 만든 가면
     
신라초기 토우들의 머리모양도 모두 크고 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여 틀어 올린 맨머리를 변이나 절풍으로 씌워 아름답게 꾸몄다. 경주 황남리에서 출토된 남자 토우들이 대부분 고깔 모습을 한 관을 쓰고 있어 고조선을 이어 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변을 사용했음이 부여에서 출토된 토기편에 보이는 변의 모습에서 확인되는데 양쪽에서 纓을 내려 턱밑에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백성들은 변을 많이 썼는데, 그 실제 모습이 집안에 위치한 우산 2110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인형에서 보인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였고, 홍산문화시기에는 상투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시기로 오면 일반적으로 옥고 대신 상투머리를 덮을 수 있도록 폭이 넓지 않고 높이가 있는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변이나 절풍은 주로 가죽과 자작나무껍질 또는 누에 천을 사용했으나, 이후 금과 은, 금동 등으로 만들어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썼던 관 전체를 금으로 만든 금관의 한부분인 금절풍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 만들어진 금관과 금동관 등도 모두 고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상투머리와 그 위에 썼던 절풍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관의 기본양식은 홍산문화로 부터 비롯된 고조선문화의 전통에서 그 실체와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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