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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처럼 맑은마음의 보시가 '무주상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布施)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하는데...

김덕권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1/07 [16:34]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布施)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하죠.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金剛經)≫에 의해서 천명(闡明)된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하죠.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습니다.
 
▲ 김덕권     ©브레이크뉴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죠. 나와 네가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무주상보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어느 사회봉사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열심히 따라다녔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제가 기대하고 하고 싶은 활동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 산동네에 연탄 한 차를 실어다 줍니다. 그리고 생색이라도 내듯이 현수막을 내 걸고 사진을 찍고 신문 잡지에 요란하게 보도를 하고 난리법석을 떨죠. “아! 이게 아닌데?” 예수님께서도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랑을 늘어놓고 생색을 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엔 얼마 안가 발길을 끊었습니다.
 
남에게 베풀고 선(善)을 행하면서도 선이 더욱 커지지 못하는 것은 베풀었다는 생각, 선을 행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의식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요? 내세우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남에게 베풀고 남에게 말하기 위해 선을 행한 것처럼 온 세상에 떠벌리며 자신이 행한 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으로 시끄러운 사람들,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말들 때문에 좋은 일을 하고도 공덕(功德)이 쌓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업(善業)이 쌓여 힘이 되기도 전에 조금씩 쏟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이렇듯 인간은 쉼 없이 유루(有漏)의 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전혀 베풀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 자체를 자신의 일로 삼는 심보 때문에 선을 더 큰 복덕이나 공덕으로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죠.
 
달마(達磨) 대사를 만난 양무제(梁武帝 : 464~549)가 물었습니다. “내가 오리(五里)에 작은 절하나, 십리에 큰 절 하나씩을 짓고 수많은 승려를 만들어 불사(佛事)를 이루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될까요?” “소무공덕(所無功德)!” 아무 공덕도 없다는 뜻이죠. 자랑하는 마음, 공 치사를 바라는 마음은 비움을 중시하고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본질로 하는 선(禪)의 세계가 아닙니다.
 
《금강경》에 이르시기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면 그 복덕(福德)이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중생들이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방편(方便)으로써가 아니라 실로 무주상보시를 해야 헤아리기 어려운 복덕을 받을 수 있는 이치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베풀고, 주는 물질이 크고 작음에 구애 없으며, 선행이라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입니다. 어찌 여기에 자랑이나 과시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죠. 남을 돕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보다 남을 돕는 일이 우선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정말 바라는 바 없이 남을 돕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선을 행합니다. 그러고는 그 선행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주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지 못하고 무주상보시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업(業)’이 됩니다. 상(相) 없이 선업을 쌓아 가노라면 결국 그것이 무루(無漏)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우리의 마음을 어느 곳에 주(住)하고 마음을 일으켜야 할까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무두 허망하다 하셨습니다. 물질로 행복을 얻으려 하거나 권력이나 명예로 행복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보리 행(菩提行)을 실천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청정히 하려는 것이 보리 행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씻는 것이 보리 수행이고, 자신의 허물을 정화(淨化) 시키는 것이 참회기도입니다.
 
그리고 인연 따라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역시 무주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착하고 상을 내고 하는 인연은 결코 아무리 잘해도 상생의 선연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연을 지어가되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습니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기 때문이죠.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재물이던 명예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오면 미워하되 머무는바 없이 해야 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무주상보시>로 만 냥의 황금을 얻는 것보다도 큰 공덕이 아닐는지요! duksan4037@daum.net
 
*필자/김덕권.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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