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9)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2/03 [08:57]
의친왕의 결심을 전달받은 정운복은 예정대로 9일 오후 8시경 공평동 3번지로 갔지만 의친왕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는 비밀히 사동궁을 빠져 나와 이문동에 있는 수완당(修完堂) 김정완 집에서 돈을 그곳으로 받게 하기를 통지하므로 정운복이 수차 왔다갔다하여 오후 11시경에야 의친왕은 차부(車夫) 김삼복을 데리고 왔다.
 
한편 전협과 이재호 등은 술과 요리를 준비하여 의친왕과 정운복에게 대접 하였다.
▲ 의친왕     ©브레이크뉴스

이에 앞서서 전협은 의친왕이 오기 전에 정운복을 특별히 대우하여 조선독립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정운복은 이 말을 듣고 아직 조선독립의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친왕이 왔으므로 전협은 정운복을 별실(別室)로 불러 조선독립에 대한 협력과 자신들의 본심을 이야기 한 즉 정운복은 처음에는 놀랐으나 결국은 그의 제안을 수용하고 의친왕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이 사유를 자세히 이야기 한 이후 “전하 결심하십시오, 결심하십시오” 하고 권유하였으며 함께 있던 전협 등도 공을 모시고 상해로 가겠다는 뜻을 전하니 의친왕도 심사숙고한 끝에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한 사람은 단총을 들고 있었으며, 전협은 준비했던 가방에서 지폐(紙弊)를 꺼내며 의친왕에게 말하기를 이 금액이 4만 5천원인데 이 돈인 즉 어장권을 얻고자 준비한 것이 아니고 독립운동에 쓸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동창진을 불러 1천원을 정운복 집에 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말은 모두 거짓이요, 전협이 가진 돈은 불과 5백원에 불과하였다.
 
이리하여 의친왕의 결심을 확인한 전협은 곧 그를 인력거에 태우고 정운복을 결박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어 역시 인력거에 태워 나창헌.김중옥이 이를 호송하였으며, 의친왕을 모시고 온 김삼복을 감시하였으며, 뒤를 따라서 결국 그 이튿날 새벽 3시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일리 73번지인 산속집에 유폐한 후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 전날밤, 의친왕은 전협에게 “나는 이미 상해로 갈 것을 결심하였으니 숭인동에 있는 수인당(修仁堂) 김흥인과 간호부(看護婦) 최효신을 데리고 고종황제께서 상해 덕화은행에 예치한 채권증서 1백 2십만원과 기타의 비밀서류를 가죽가방에 넣어 흥인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져오게 하고 더불어 이재호에게 편지를 써주며 김춘기의 심부름이라 하고 의친왕비에게 편지를 전하라” 하니 이재호는 즉시 그 편지를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김흥인이 와서 기다린다고 하여 간동(諫洞)으로 가서 차부(車夫)에게 그 뜻을 김흥인에게 전하게 하니 흥인은 보관하고 있던 가죽가방과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김춘기와 최효신과 같이 간동(諫洞)으로 왔는데 이재호는 김춘기의 동행을 거절하고 흥인과 효신을 데리고 은평면으로 갔다.
 
그런데 의친왕이 김흥인과 최효신을 데리고 오라 한 것은 상해에 동행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에 대하여 전협은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라는 뜻을 의친왕에게 전하니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 들여 김흥인과 최효신을 동행하는 문제는 단념하기로 하였으며, 전협에게 2백원을 받아서 그중에 1백 3십원을 김흥인에게 주어 다시 경성으로 보냈다.
 
한편 김춘기는 의친왕이 창의문(彰義門)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동지 1명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급히 달려간 즉 정남용과 이재호는 김춘기가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고자 온 것으로 알고 의친왕을 상해로 모시고 가 임시정부에 옹립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큰 거사인데 당신들은 어찌 이러한 게획을 방해하려느냐? 하면서 김춘기를 쫓아 보냈다.
 
그날 오후 5시경, 정남용.한기동외 한 사람은 의친왕을 모시고 도보로 수색역까지 나와 옷을 갈아 입은 다음 11일 오전 11시 관헌의 눈을 피하여 3등차를 타고 다른 동지 한 사람은 관헌의 수사와 경계상황을 알기 위하여 송세호가 남대문역에서 3등차를 타서 의친왕을 수행하고 한기동은 의친왕의 출발상황을 전협에게 알리기 위하여 개성역에서 내렸다.
 
송세호는 평양에서 관헌의 경계사항을 탐색하기 위하여 차에서 내려 다음차로 가기로 하였고, 정남용과 이을규는 의친왕과 같이 12일 오전 11시에 무사히 단동역에 정차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가 정차중에 내리는 사람들을 일일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친왕을 수행하던 정남용이 체포되었으며, 이을규는 사전에 눈치를 채고 피신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과정에서 의친왕도 그 장엄한 거사를 앞두고 체포되어 경성으로 송환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상과 같이 기존에 알려진 상해망명 탈출사건의 전모를 소개하였는데 이번에 필자가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의친왕이 단동역에 하차할 당시 수행원은 정남용과 이을규였는데 여기서 의친왕과 정남용은 일제의 검문에 결국 체포가 되고 극적으로 피신한 이을규는 단동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의친왕이 단동으로 온다는 첩보를 당시 대동단의 비밀조직으로 부터 전해 들은 최진동 장군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단동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도착하여 의친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통탄스럽게도 거사가 실패로 끝나면서 이을규만 이륭양행(怡隆洋行)으로 와서 의친왕의 밀서를 전달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의친왕의 밀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여러정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볼 때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생각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지만 의친왕의 밀서를 이을규로 부터 전달받은 최진동 장군이 다시 봉오동으로 가서 결국 군무도독부를 조직하였으며, 이러한 군무도독부가 중심이 되어 그 이듬해 일어난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지난 7회에서 “최진동 장군”과 ‘최진동장군연대기“에 근거하여 의친왕과 최진동이 단동에서 직접 회동한 이후 군무도독부가 조직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이 내용은 좀더 정밀추적할 부분이 있는 듯 하여 이러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단동역에서 일제에 의하여 체포된 의친왕은 서울로 호송된 이후 당시 조선총독 관저안에 있는 녹천정(綠泉亭)에서 50여일 연금이 된 이후에 다시 처소인 사동궁으로 돌아 오게 되며, 여기서도 일제로 부터 더욱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의친왕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분수령이 될 수 있었던  상해망명 거사가 실패로 끝난 것은 90년이 넘은 오늘날에 생각해 보아도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으며, 이제 9회를 끝으로 의친왕의 1910년대 항일운동의 매듭을 짓고 10회부터는 1920년대 항일운동의 흔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