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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12)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2/31 [08:06]
1920년대에 다양한 독립운동에 관련되었던 의친왕에게 1930년대에 커다란 시련이 다가오니 그것은 1930년 6월 1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은퇴란 구체적으로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 부터 받은 공족(公族)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 황손에게 상속한다는 것인데 과연 의친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의친왕     ©브레이크뉴스
이와 관련하여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 나와 있는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참고가 될 것으로 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들이 아버지를 강제로 은퇴시켰을까 ? 이에 대해 나는 늘 궁금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던 어느 날, 마침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김기석(金基奭) 교수가 교육자료 수집차 미국에 오셨다가 “이곳 뉴욕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당신 아버지인 의친왕에 대한 기록을 보았다”고 해 당장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강제은퇴 당하실 때 그들에게 하는 수 없이 써 주신 각서(覺書)였다.
각서(覺書)는 전부 일본어로 되어 있었으며, 내용은 “의친왕은 은퇴를 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큰 아들인 이건(李鍵)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와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한다” 등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국내에서 뵙던 기억이 있었고, 도대체 이 각서(覺書)의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재 강릉에 살고 있는 나의 둘째 언니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시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일본규슈(九州)지방 어느 곳에 수인당(修仁堂:김흥인 여사, 수길 오빠 생모)을 데리고 가 계셨다”고 말해 주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의친왕이 이렇게 갑자기 은퇴를 당하게 된 그 이면에는 1919년 11월 상해망명 탈출사건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독립운동과 관련되니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은퇴를 당하여 일본에 강제로 머물게 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어서 소개한다.
 
그것은 1932년 한중연합군이 쌍성보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를 당시 동경에 있던 의친왕이 전해 듣고 기뻐하였다는 모습을 통하여 비록 몸은 일본에 있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의친왕이 일본에서 정확히 언제 귀국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지난 7회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와 같이 1939년 최진동 장군의 아들이 출생하였을 때, 이기권 밀사를 통하여 축하 족자(簇子)와 함께 독립운동의 재개를 촉구하는 밀서(密書)를 최 장군에게 함께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의친왕의 1930년대 독립운동과 관련된 흔적을 살펴 보았는데,  특히 의친왕의 강력한 항일운동 의지를 짐작할 수 있는 물증인 밀서(密書)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가 없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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