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에 관련되었던 의친왕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일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해방이후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상해임정 각료들이 사동궁(寺洞宮)으로 의친왕을 방문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나의 아버지 의친왕”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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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사동궁으로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임시정부 각료들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오셨던 것을 봤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이 시기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을 거론하자면 이미 1회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와 같이 의친왕이 해방이후 광복회(光復會) 황해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던 화사 이관구 선생과 친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화사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사들의 필적(筆跡)을 수집하여 만든 서첩 “독립정신(獨立精神)”에 의친왕의 필적(筆跡)이 포함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사학연구회(史學硏究會)를 조직할 때 의친왕도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아울러 의친왕은 1945년 11월 한국기원(韓國棋院)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성기원(漢城棋院)이 사동궁(寺洞宮)에 설립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이기권 밀사의 아들이면서 그의 사위가 되는 이학진 선생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6.25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으며, 환도(還都)한 이후 마침내 1955년 8월 16일 안국동 별궁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는데, 그로부터 1주일 전인 8월 9일에 장면 박사를 대부(代父)로 하여 비오라는 본명(本名)으로 영세(領洗)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13회에 걸쳐서 한 시대의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는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돌아보았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