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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경 “김상열연극사랑회 지켜낸것 숙명”

<단독 인터뷰>연극배우 한보경, 한국여성연극인협 주관 ‘올빛상’ 수상자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8/12/20 [10:30]
“제가 사랑했던 사람은 하얀 손이 참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그 두 손은 지금도 제 온몸을 감싸 안습니다.“
 
단행본 ‘영원한 내사랑 잠깐 안녕!’ (한보경 저, 1999년)에서 그녀의 남편 김상열을 그리워하는 한보경(김상열연극사랑회 대표/배우) www.ksylove.com) 대표의 가슴앓이다. 연습실에서의 카리스마적 독설과 괴팍스런 그 남자, 정말로 따뜻한 가슴과 예쁜 손을 가진 그 남자, 그 남자의 ‘임자’ 한보경 대표(이하 존칭 생략)는 만나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 '한국여성연극인협회'에서 주관한 2008년 제 3회 올빛상을 수상한 '한보경 '대표   ©브레이크뉴스

그녀의 ‘사모곡’ 시문 중 ‘이승과 저승의 길목에서 맞잡은 손등 위로/떨어지는 눈물 방울 하나/당신의 대답, 목 메인 그 한마디/임자!’. 김상열 선생이 작고한지 올해 10년째, 과연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 되었을까?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 김상열 선생 57세까지의 삶 속에서 많은 빛나는 업적 중 최고의 대상은 ‘한보경’이라는 최상의 작품을 아내이자 동료로 선택했던 선생의 탁월한 능력에 그 영광을 돌린다.
 
'한국여성연극인협회'에서 주관한 2008년 제 3회 ‘올빛상(올올이 빛나는 여성 연극인상)’ 연기부문에 한보경이 선정됐다. 지난 12월 17일 시상식을 '세 여자의 파티'(작가 박경희, 연출 김국희, 출연 박정재, 이승희, 윤미영) 희곡낭독회를 시작으로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서 가졌다.
 
“연기수상작〈길〉작품에서 저는 성삼문의 부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상을 탔어요. 제 연기보다는 저의 연극을 사랑하는 자세와 연극을 지켜가는 마음을 격려하고자 상을 주신데 그저 감사합니다.”
 
한보경의 수상소감에 이어 주변 지인이 그녀의 올빛 연기상에 대한 의미를 덧붙였다.
 
“한보경은 남편 김상열의 언덕 땜에 이 상을 받았다는 곡해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10년간 남편을 추모하는 한 대표는 남편 그늘에 가려서 사실상 개인적인 인생은 손해를 본 사람입니다. 주변에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 ‘너 참 애썼다’ 엄마가 가장 안쓰러운 딸에게 준 상인 것 같습니다. 묵묵히 참고 견딘 큰딸에게 주는 상으로 여겨집니다.”
 
남들보다 조심스런 행로, 그 행로 속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누구의 아내이며, 고  김상열 선생과는 무려 17년이나 나이차가 난다. 제자로 만나 아내 자리로 옮겨졌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본인 자신을 더 낮추어야 하는 고뇌를 어찌 다른 이들이 알 수 있었겠는가?

“1985년 남편과 결혼 한 후론, 배우 ‘한보경’으로만 만나지고 보아지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10년 동안 ‘김상열 연극 사랑회’를 지켜낸 것은 숙명이라고 느껴집니다. 운명을 뛰어 넘은 숙명이라는 느낌을 올해 3월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을 보면서 무대 위 낡은 현수막에 쓰인 ‘숙명’의 글씨를 보면서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았어요.”

그녀는 길고 긴 10년을 ‘숙명’이라는 단어로 애써 아픔을 보듬었다.
 
지금이 이조시대인가? 어엿한 21세기에 어찌하여 10년 동안 오로지 한길, 10년 전 요절한 천재 연출가 김상열 선생에 대한 모든 추억을 그대로 표현하고 사랑하는 여인, 그녀의 10년간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고 김상열 선생을 기리는 작품 ‘길’이 2008년 10월 〈고 김상열 선생 추모 10주기〉를 맞아 〈극단 김상열 연극사랑〉주관으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고 김상열 선생이 새로 닦아놓은 새길 (뮤지컬, 신파극 등) 위로 그를 따르는 연극인들에 의해, 그가 없는 10년간의 공백은 그를 더더욱 빛나게 했다. 그 뒤에 묵묵히 남편을 지키는 여인네는 지금의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이끈 장본인 역시 남편이라며, 그녀의 올빛상을 사랑하는 남편에게 넘겼다.
 
“그저 내가 했던 연극을 계속한 것뿐이고, 단지 그것이 남편의 작품과 작업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한 작가를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학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한보경 대표와의 인터뷰
 
그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따스한 성품과 올곧은 힘이, 바로 10년간 한 곳으로만 향한 그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첫인상은 전문배우로서의 화려한 미모와 젊고 천진스러운 여인이었다.  10년 전 남편을 잃은 젊디젊은 여인이 이끈 남편에 대한 사랑, 같은 동료인 남편의 희곡을 사랑한 인생 10년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행로를 들여다본다.
 
- 21세기에 살고 있는 ‘열녀’로 칭송하는 주변 분들의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 심정은 어떠하신지요?
 
▲‘열녀’라는 생소한 낱말보다는 남편과 같은 일, 연극을 하다 보니 이 시간까지 왔어요. 남편이 지금까지 살아있더라도 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연기를 했을 거예요. 같은 일을 하지 않은 부인이었더라면 남편의 희곡집을 정리하는 것으로만 그를 추모했겠지만, 나는 연기하는 사람이니 동료이자, 아내이자, 제자였던 복합적인 상황에서 그를 더 많이 추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저 내가 했던 연극을 계속한 것뿐이고, 단지 그것이 남편의 작품과 작업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한 작가를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학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는 제 남편을 가장 존경하는 연출가로 사적이나 공적으로도 생각해요. 위대한 천재 연출가인 남편 김상열에 대한 연구와 추모를 할 수 있는 것이 운명을 뛰어 넘는 제 숙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상열 연극 사랑회’에 대한 사업 내역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올해 그이가 돌아가신지 10주기입니다.  ‘김상열 연극 사랑회’를 창단하고 운영을 하면서 2가지 역할을 나누어 봤어요.  첫 번째는 ‘김상열 연극 사랑회’, 두 번째는 ‘김상열 연극 사랑의 집’입니다.  그 사람이 운영하였던 ‘극단신시’의 정신으로 ‘김상열 연극 사랑회’를 발족하여  김상열 연극상, 김상열 연극세계 재조명 공연, 김상열 기념관, 김상열 장학금, 김상열 희곡집 출간하는 사업들로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고 3주기에 그의 환갑상을 차리고자 제자와 동료들이 벌인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연극 ‘언챙이 곡마단’으로 첫 공연을 시작했어요. ‘등신과 머저리’ ‘원효로1가 19번지’ ‘배비장’ ‘애니깽’, 그리고 2008년 10월, 6번째 연극 ‘길’을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공연을 마쳤어요. 2005년에는 제가 그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던 그의 기념관을 조그마하게 마련하여서 무척 기뻤어요.
 
- ‘김상열 연극 사랑회’를 10년간 이끄는데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저는 사업마인드가 없어요. 금전을 뛰어 넘어서 가진 것을 줄여가면서 지금까지 이끌고 있어요. 가끔 삼성, 국민은행, 등 대기업의 문화 애호가들의 덕분에 힘입어서 어렵사리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의 함께 가자는 배려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요.  
 

▲ 2008년 제3회 '올빛상' 수상자들 (왼쪽부터) 연출상 류근혜, 무대의상상 최보경,  번역상 신정옥
   심사위원 유민영교수,  연기상 한보경, 희곡상 전옥주     ©브레이크뉴스


- 지나간 10년을 그래도 성공적으로 잘 이끌었는데 앞으로의 10년간, 아니면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전에도 어느 신문사 기자분이 이와 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말을 줄이고자 합니다. 제가 말한 내용을 꼭 지켜야 한다는 저의 아집 때문에 요새는 좀 자제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꿈이겠지만 ‘극단 김상열 연극 사랑’의 장기공연을 할 수 있는 전용극장을 갖고자 합니다. 부족한 경제력 때문에 서울을 벗어난 지역에서 전용극장을 갖게 된다면, 아마 첫해는 여러 지인들의 후원으로 운영은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몇 년 후에까지는 자신이 없어요. 제가 연기를 28년 동안 한 결과, 연극인으로 관객동원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요. 어쨌든 누군가를 찾아오게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기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28년 동안 무대에서 연극을 하셨다면, 여러 어려웠던 시절도 많으셨겠네요. 이 시기는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제 나이 23세에 연기를 처음 시작했어요. 제가 읽었던 첫 번째 연극관련 책자에서 교훈을 얻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연극인은 가난하다’는 문구였어요. 앞으로 100년 동안도 연극인은 역시 가난하다는 그 이유를 분명히 연극 시작부터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연극을 하고 있는 저변이라고 생각해요. 금전을 뛰어 넘는 함께 한 동료와 후배들 덕분에 ‘김상열 연극 사랑회’를 이끌고 있어요.  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는 딸에게도 ‘연극 연습하는 시간보다 술 마시는 시간이 더 많은 연기자는 결국 예술애호가 밖에 될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이는 평소 제자들에게 감성 연기 중심으로 고된 훈련을 시켰어요. 저도 끊임없는 연기 연습만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를 운동을 하면서 알차게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결혼 전에 저를 인터뷰했던 기자에게도 ‘아마 제가 연극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수도자가 되었을 거예요’ 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실제 저는 실리 세상에는 어둡고 그러한 세상사를 잘 몰라서, 제일 순수하게 사랑하는 연극에만 몰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남편 연극이 없었더라면 과연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도 반문하며 남편에게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 올해 10월,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길’ 공연작품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부탁드립니다.
 
▲‘길’작품에서 저는 성삼문의 부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상을 탔어요. 제 연기보다는 저의 연극을 사랑하는 자세와 연극을 지켜가는 마음을 격려하고자 상을 주신데 그저 감사합니다. ‘길’에서는 성삼문, 신숙주, 그들의 아내, 수양, 한명회 등 혼란한 시대에서 각자의 길에 따라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던 인물들에 대한 갈등을 그렸어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정한 길을 찾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고, 죽이고, 또 살아남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그이가 말했듯이 ‘사람들에게는 각자 살아가는 길이 있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말이다. 누구의 삶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의 그야말로 기호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에게도 제가 가는 길을 열심히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 올빛상을 수상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연극인으로 자주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남편이 돌아가신 지 10주기에 연기상을 받아서 저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해 주었어요. “남편이 없었더라면 과연 내가 이런 자리에 있었을까?”하며 남편에 대한 감사함을 더합니다. 누구의 마누라이기 때문에 불편하였지만 바른생활로 공연을 많이 하여 남편에게 10년 제사상을 잘 차려드리고 떠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큰 아픔 속에서는 큰 상에는 욕심이 없었어요. 이제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숙명으로 여기면서 열심히 매진하겠습니다. sungae.kim@hanmail.net
 

▲ '길' 연출가 장승세씨, 정종섭배우와 함께한 한보경  대표.  ©브레이크뉴스

****김상열(金相烈)은 어떤 연극인이었나?
 
한보경 대표의 남편 김상열(金相烈)은 어떤 연극인이었을까? 다음은 “김상열 희곡집 11” ‘길’에서 발췌한 연극인 김상열에 대한 삶의 기록이다.
 
“김상열 희곡집 11” ‘길’이 소개한 김상열의 삶
 
김상열(金相烈, 1941.8.8~1998.10.26)은 1966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여, 1967년 동문들과 함께 만든 극단가교의 초기 멤버로 시작, 곧바로 무대현장에 뛰어들었다 (추후 상임연출과 대표 역임). 천막극장, 교도소 순회공연, 동남아 순회공연, 실험극 등 젊은 날의 열정은 1976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연출상 (유랑극단)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힘입은 풍부한 무대현장 경험은 생동감 있는 창작열로 이어져 ‘까치교의 우화’(문공부공모 희곡당선 1975) ‘길’(도의문화저작상 1977)을 시작으로 연출의 시각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 현장성 있는 극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예리한 감성은 tv극 ‘수사반장’을 3년간 집필하며 그 빛을 발했고, 1978년 현대극장 상임 연출로 자리를 옮기며 전문성을 띤 대형 무대를 넉넉하게 만들어 냈다. 미국 뉴욕 ‘라마마’극단(1981)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 돌아오기도 한 그는 우리 것, 우리의 작품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언챙이 곡마단’(1982)을 인상 깊게 무대에 올리기도 했으며, 농익은 창작열은 작-연출의 무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우리극단 ‘마당’ 세실극장 (대표)으로 자리를 옮겼다.(1984)
 
1988년, 드디어 자신의 극단 ‘신시’를 창단하고 작고 시까지 이끌어가면서 창작극, 창작 뮤지컬, 마당놀이, 악극 등 왕성한 창작과 힘찬 무대를 만들며 tv극본을 비롯,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대전 엑스포, 세계 잼버리대회 등 국제적인 문화행사에도 구성 대본과 총연출을 맡아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분출하였다. 이러한 그의 역량은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및 연출상, tv극본상, 서울연극제 작품상 및 희곡상 등 수많은 수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극작가-연출가로서 수많은 창작극과 더불어 ’90년대에는 현대로 끌어들인 악극작업으로 대중극의 선풍적 바람을 일으켰으며, 우리 민속연희의 생명체였던 풍자와 해학을 주류로 관객과 함께 만들어 가는 놀이마당의 현장성을 예술성 있는 마당놀이로 절묘하게 승화시켜 놓았고, 동심을 잃지 않았던 그는 어린이 뮤지컬 분야의 개척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다양한 장르의 개척과 발전에 선구적 역할과 살아 있는 희곡으로의 완성을 위해 매진했던 그는 누구보다 무대현장과 가장 직결된 창작활동을 한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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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쥬드맨 2013/05/10 [00:56] 수정 | 삭제
  • 더 넓은 세계에 관심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늘 온화하고 행복한 모습 감사합니다.
    따님과 함께 항상 행복하세요~with all my heart~
  • 미래 2008/12/24 [16:22] 수정 | 삭제
  • 이렇게 살아가는 분도 계시군요. 이 험한 세상에...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축복이 있으시길...
  • 길손 2008/12/20 [11:11] 수정 | 삭제
  • 좋은 인터뷰 입니다. 사는 게 뭔지...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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