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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3>

옥단추와 달개장식의 다양성

박선희교수 | 기사입력 2012/11/15 [09:49]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유적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옥기는 주로 달개장식으로 쓰였을 장식품과 치레거리들이 많다. 즉 비실용성 생산공구류와 인물, 동물, 식물, 곤충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 또는 추상적인 동물형상을 조각한 것, 신발의 모양을 나타낸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한데, 대부분 구멍이 뚫려있어 의복에 달거나 걸어 장식했을 것이다. 신발모양의 장식품은 지금의 버선형태와 유사하다. 
 
▲ 박선희  교수  ©브레이크뉴스
요령성 심양의 북쪽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유적인 신락문화유적(서기전 6,000년대 후기)에서도 새김무늬 질그릇과 함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일부 장식물을 옥단추로
구분했다. 이처럼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 옥으로 만든 복식 장식품이 출토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전문 수공업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경제력의 발전은 복식분야에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양식을 보다 다양하게 정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장식단추의 발전양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나 직물생산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장식기법의 복식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 같은 발전양상은 중국 황하유역의 신석기문화유적들에서 장식단추가 드물게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초기유적인 궁산유적(서기전 6,000년~서기전 5,000년)에서는 뼈구슬과 둥근모양의 토기단추가 출토되어 실제로 바늘과 실을 사용해 의복에  단추와 구슬을 달거나 꿰어 걸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신석기중기의 후와유적(서기전 4,000년)에서는 둥근모양의 돌단추와 함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곽가촌유적(서기전 3,780∼서기전 3,530년)에서는 뼈북과 함께 둥근모양의 토기단추와 가락바퀴 등의 방직과 재봉에 사용된 도구들이 돌과 뼈로 만든 구슬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후 신석기후기의 좌가산유적과 서포항유적 4기층(서기전 3,000년)에서는 곡옥과 뼈, 돌로 만든 나뭇잎모양의 달개장식과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팔찌 등이 많이 출토되어 의복장식이 이전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조형미를 추구해나간 모습이다.
  
신석기중기부터 장식구슬의 출토량이 증가한 것은 전문 기능인 수공업자의 출현과 함께 달개장식품의 생산 규모가 커졌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의복에 장식단추를 사용하고 구슬로 장식하거나 달개장식을 달아 복식에서 공간을 꾸몄던 조형적 전통기법이 정착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기전 4,000년경에 속하는 심양 신락유적의 하층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특징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최근에 만든 것처럼 검은색 광택이 나는 흑옥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같은 흑옥 장식품이 중국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신락유적의 것이 가장 이르다고 분석하며 보기 드문 진귀품으로 평가했다. 
   
요령성 매전지질감탐공사 과학기술소에서 감정한 내용에 의하면, 이 흑옥의 원료는 무순 매전 서부 본층의 것으로 밝혀졌다. 심양에서 무순까지는 약 100리의 거리인데 당시 교통수단으로 신락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매정을 가져다 정교한 장식품을 만들었다고 하겠다. 신락유적에서 출토된 흑옥 장식품은 전체 유물의 10분의 1이나 차지한다. 발굴자들은 유물이 차지하는 큰 비중으로 부터 흑옥 장식품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허리띠를 장식했을 네모난 크고 작은 옥장식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가죽허리띠에 달아 옥대를 만들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 옥대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허리띠는 중국보다 앞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유적에서 보여지며 삼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만주의 신석기시대 여러 지역에서는 지역마다 특색을 달리하는 재료를 융통성 있게 사용해 단추와 달개장식 및 장신구를 만들어 의복위에 자유로운 조합의지와 다양성을 추구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석기초기부터 시작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복식기법은 홍산문화에서 옥을 재료로 독창적이고 입체적인 양식들을 표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의복에 장식하던 토기단추와 돌단추, 뼈와 뿔,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옥장식 등은 홍산문화를 지나 고조선시대로 오면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한 것들로 적극 대체되어 보다 화려해졌다.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위에 달아 여밈새를 처리하거나 달개장식으로 사용되어 다시 고조선문화로 이어져 한층 화려하고 현대적인 조형미의 지속성을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오면 직물의 발달과 함께 장식양식이 보다 화려해져, 뼈나 뿔, 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뼈와 뿔, 조개껍질,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주로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 위에 달아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직물 발달은 의복에 다는 장식단추와 장식품의 사용도 직물의 성격과 아울리게 변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자연히 종래의 장식단추에 새로운 장식기법이 더해져 대담하고 역동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직물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옷 만드는 일이 많아지면서 장식단추의 사용량도 크게 늘어난다. 고조선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장식단추는 그 양식이 주로 원형과 나뭇잎모양으로 나타난다. 그 형태는 윗면이 도드라진 원형인 것과 편편한
       

▲청동장식단추    ©브레이크뉴스


 원형으로 꼭지가 달린 것, 도드라진 원형으로 단추구멍이 있는 것, 가운데 구멍이 있는 구슬모양의 것, 단추 구멍 2개가 나란히 있는 것, 정사각형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있고 4변 주위에 문양이 있으며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원형으로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반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청동장식단추는 표면에 문양을 나타내는 경우와 문양이 없는 소면 상태의 두 종류로 크게 구분된다. 표현된 문양은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문양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김무늬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양식과 같다.
 
고조선 사람들은 장식단추를 의복뿐만 아니라 모자나 신발 또는 활집 등 복식의 여러 부분에 자유롭게 사용했다. 한민족의 여러나라에서는 모자에 새깃을 꽂는 것 이외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금과 은, 옥 등으로 모자를 장식했다. 이러한 고급 장식재료는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화려하고 높은 수준의 관모 양식을 이루게 만들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장식단추를 일반 복식에서 뿐만 아니라 특수복식인 갑옷과 영성필사영자유적출토 고조선 청동투구 청동투구에도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일반인들이 평상복에서 청동으로 화려한 장식을 했기 때문에 청동장식단추가 자연스럽게 갑옷에 응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동을 사용하면서부터 종래의 돌이나 뼈 등으로 만들던 공구나 무기를 청동으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에 가죽이나 뼈로 만들던 갑옷재료도 청동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고조선사람들이 의복에 장식했던 장식단추의 양식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여러나라시대로 이어져 나라마다 조금씩 특색을 달리하여 발전해 나간다. 예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입는 곡령에 약 5센티미터 이상 되는 은화를 꿰매어 장식했다. 부여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썼다. 

 
▲  백제사신의 옷  ©브레이크뉴스



원태자촌출토 금관식
               
와 고구려 사람들도 청동장식단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한 사람들은 북방지역에서 청동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한 것과 달리 의복에 주로 구슬을 장식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인의 의복에서도 화려한 장식이 가능했던 한민족 복식의 특징으   고구려사신의 옷   로 중국이나 북방지역과의 차이점이다. 고구려 사      람들은 금(錦)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 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으므로 이러한 고구려의 풍속도 예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것을 이었을 것인데 그 실제 모습이 안악3호 고분벽화와 왕회도, 마조총 수렵도 등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의복뿐만 아니라 금관과 관장식에 일정하게 장식단추모양의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를 달아 만든 보다 발달 된 고구려 관식과 장식품이 서기 3세기∼서기 4세기에 걸쳐 고구려 영역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원태자 무덤과 북표현 방신촌 진무  덤, 조양현 왕자분산무덤이다.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동관과 금관 등에서 보이는 관식과 절풍,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 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금관양식의 영향이었다. 이 같은 고구려의 금관식은 신라와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주변민족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요녕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식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관식이다. 
  
이처럼 장식단추의 양식은 홍산문화로부터 시작되어 고조선 이전시기부터 복식에 장식물로서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로 이어지고 다시 삼국시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중요한 장식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한민족 복식에 보이는 장식단추에 대한 비교 분석과 통시적 전승을 검토한 결과, 한민족 복식의 원형을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으로부터 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원형과 나뭇잎모 양의 장식단추는 생명력 있는 조형의지와 역동적이며 생동하는 한민족의 정서를 줄곧 표현해 온 고유한 문화 인소로서 그 정체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복식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로 부터도 우리는 홍산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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