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을 오로지 교육현장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일하며 학교를 자기 집처럼 정갈하게 가꾸었고, 학생들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며 80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 지금도 새 아씨 모습을 간직하고 수즙은 듯 웃을 때는 영락없는 처녀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를 세우고 가꾸는 마음에서는 누구보다 굳고 강인한 철의 여인, 양천고등학교 정금순 설립자이다.
|
그는 1933년 함경도 흥남시 작도리에서 가난한 부모의 8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나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집안일꾼 이었다. 그는 유난히 총기가 좋아 동네 어른들로부터 ‘잘 키우면 큰 인물이 될 거야’ 라는 말을 듣던 아이였으나 부모님께서는 여자가 공부를 해서 무엇 하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늘 집안일로 피곤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정이사장은 야학을 찾아가 부모님 몰래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힘든 세월을 보냈으나 인생 불학이면 여 명명야행(人生不學이면 如冥冥夜行)이라는 생각에 새 희망과 삶의 비전을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앞날의 꿈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때 배운 공부가 그의 인생에 등대와 나침판 역할을 했고 양천고등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대의 정부는 재정도 열악해 학교를 설립해서 많은 학생을 수용할 상황이 아니어서 소수의 학생들만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학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 때는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많은 수의 젊은 청소년들이 꿈도 희망도 없이 절망하며 길거리를 방황했다. 그 시대에 정 금순 설립자는 학교를 세워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에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라고 생각하고 양천고등학교 설립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정 설립자는 한명의 친자녀도 낳지 않았지만 수 만 명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꿈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졸업한 학생들은 명문대에 입학도 하고 사회지도자로, 사회 성원으로 훌륭하게 성장하여 정 금순 설립자의 열정에 보답해 주었다. 그러나 정 설립자가 양천고등학교를 세우기까지는 혹독한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
18세에 월남하여 식모살이와 길거리 행상 등 먹여 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하던 생존의 몸부림을 겪었고. 서울이 수복되고 서울로 상경해서는 억척스레 보따리 장사해서 벌은 돈으로 서울역 앞에 작은 빵가게를 열었다. 그 시절 역시 하루 한 끼나 두 끼만으로 눈물 젖은 밥을 먹으며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배고픔의 시련과 추위를 이기고 홀로 외롭고 고통스런 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때였다. 휴가 한번 가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22살에 서울에 올라와 49살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아 건물과 집 그리고 땅을 사고 저축을 했다.
|
남들보다 10배 100배 더 피땀으로 노력한 결과 부동산과 많은 저축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모은 재산을 늘 꿈꾸었던 일, 이 나라에 미래의 자산인 아이들을 키워내는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양천고등학교다. 학교를 설립하고도 어려움은 많았다. 배정받은 학생들의 교실을 만들기 위하여 무슨 움막처럼 계단 밑에 나무 문짝 하나 있는 허술한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였고, 황량한 산등성을 평평하게 고르고 매일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등 스스로 학교의 청지기를 자처하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맡으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학교가 있게 된 것이다.
오늘도 작업복 차림으로 손에 호미를 든 정 설립자모습은 진정으로 학교를 사랑하고 학생을 사랑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중에 끼이는 꽃이 아닐까? news2525@naver.com
*필자/장승영. 르포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