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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4)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0/30 [12:30]
지난 3회 마지막 부분에 의친왕이 김사준의 딸과 길례(吉禮)를 올렸다는 내용을 서술한바 있는데 돌아오는 2014년이 의친왕비 서거 50주년이 되기 때문에 추모하는 심정으로 의친왕비를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 의친왕 비    ©브레이크뉴스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안타까운 대목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필자는 특히 두가지를 거론하고 싶다.
 
하나는 마지막 국모 윤 황후가 후손을 두지 못한 대목인데 이 부분은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의친왕비가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는 점인데 여기서는 이러한 대목을 바탕으로 의친왕 못지 않게 파란만장하였던 의친왕비의 삶을 뒤돌아 보기로 하자.
의친왕비의 휘(諱)는 김덕수이며,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왕후의 사친(私親)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11대손으로서 1880년 11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서 김사준 소생의 6남매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여기서 의친왕비의 유년시절(幼年時節)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일화를 소개한다.
 
[조모님 슬하에서 금지옥엽같이 자라면서 국문,한학,글씨,예의범절을 배웠다. 천품이 후하고 인자하여, 어려서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종종 나들이를 나갈 때면 종일 집을 비우는 틈에 높은 쌀뒤주에 발돋움을 하고선 쌀을 퍼내어 하인을 시켜 떡을 만들어 그들에게 골고루 나눠줘 배불리 먹이고 시침을 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4세가 되는 1893년 당시 의화군과 안국동 별궁에서 길례를 올렸으며, 연원 군부인(延原 郡夫人)으로 책봉되었다.
▲ 의화군     ©브레이크뉴스
 
1906년 엄 황귀비가 조직한 귀족부인회의 부총재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인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황제가 황위(皇位)를 계승하면서 공식적으로 의친왕비로 책봉되었으며, 그 이후 1964년 타계하기 전까지 의친왕비로 불려졌다.

1919년 11월 의친왕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상해망명 미수(未遂) 사건 당시에 사동궁(寺洞宮)의 안주인으로서 의친왕이 이미 사동궁(寺洞宮)을 빠져 나간 이후 의친왕의 행방을 집요하게 물어 보는 일제관리를 교묘하게 속이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려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국 의친왕이 신의주역에서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고 말았다.
 
생각하여 보면 의친왕비는 의친왕의 정실부인(正室夫人)으로 입궁한 이후 동학혁명을 비롯하여 을미시해,아관파천,대한제국 반포,러일전쟁,을사늑약,헤이그특사사건,경술국치,3.1운동 등 그야말로 숨가쁘게 전개된 격동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였던 황실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인 측면보다는 의친왕비의 인간적인 고뇌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의친왕의 공식적인 자녀가 12남 9녀인데 여기에 의친왕비의 소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의친왕의 5녀로서 사동궁에서 오랫동안 의친왕비와 함께 살았던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의친왕비를 “어릴 때부터 성품이 어질고 사리에 밝을 뿐만 아니라 학문도 뛰어나 맹자를 줄줄이 암송했고 붓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해서를 매우 잘 쓰셨던 훌륭한 분이셨다”로 증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친왕비가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는 점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에도 불구하고 부실(副室)들의 많은 자녀들을 마치 친자식같이 따스하게 대하였던 그 고매한 성품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의친왕의 7남 이해청에 대한 의친왕비의 애정은 각별하였는데,그가 동경제대 독어학과에 재학중에 학병징집을 강요받게 되나 황손(皇孫)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거부하다가 결국 함께 거부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함경남도 원산에 위치한 철공장으로 강제징용되어서 몇개월동안 일을 하다가 결국 신경쇠약증에 걸려 경성에 오게 되었을 때, 남연군의 묘소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함께 가서 요양을 시켰다.
 
이러한 의친왕비의 헌신적인 간호로 그가 신경쇠약에서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마치 친아들 같이 아끼던 이해청이 결국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을 때 의친왕비의 심적 충격은 컸을 것으로 본다.
 
해방이후 10년이 되는 1955년 8월 9일 시대의 풍운아였던 의친왕이 천주교에서 비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때 의친왕비도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의친왕은 세례를 받은 지 7일후가 되는 8월 16일 새벽에 안국동 별궁(別宮 :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때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던 궁)에서 타계하였는데, 장례식은 명동성당에서 10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 의친왕비는 칠궁(七宮 :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후궁 7명의 신주 등을  모신 사당)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마침내 1964년 1월 14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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