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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동북공정 발해사 한국사화로 깰수있다

대진국(발해)사는 한국사 임에 틀림없다, 발빠른 연구가 필요하다!

이순복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2/26 [16:38]
인류의 역사서가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불과 수 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런 소중한 역사를 소홀하게 여기고 말았다.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했다 할지라도 이것을 남기지 못하고 유실하고 말았다. 지키지 못하고 불태우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단고기나 유원사화 말고도 고구려의 이문진이 썼다는 신집 5권 백제의 고흥이 썼다는 서기며 신라의 거칠부가 쓴 사기가 있었으나 이를 전하지 못하고 유실하고 말았다. 이에 반하여 중화인들은 한자의 힘을 빌어서 한나라 적부터 동이족의 역사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 역사서를 계속하여 발전시켜왔다. 25사를 위시한 삼국지, 자치통감 등등 수많은 역사서를 남기고 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양자강 이남에서 살던 중화인이 대륙을 다 차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55개 소수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대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이순복     ©브레이크뉴스
그렇게 역사 문화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발전한 오늘날의 중국은 이제 대륙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간신히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과 티벹을 위시한 몇몇 국가의 정통성과 역사마저 도용하려고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동북공정이다. 이들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파렴치하게도 역사가로채기라는 희대의 희극을 벌리고 있다. 이런 중화인에게 우리는 지혜를 모으고 중지를 모아서 동북공정을 깨부수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하여 우선 대진국의 역사를 찾기에 매진해야 할 줄로 안다. 그래서 필자는 일천한 역사지식을 동원하여 대진국 역사(발해사) 찾기의 기치를 들어 보는 것이다.

대진국은 발해의 완전한 국가 호칭이다.(이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진국을 발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심할 일은 당연한 우리의 역사이건만 발해의 완전한 국호마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은 고구려의 속말 즉 송화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이다. 그가 나라를 세우자 신라는 대진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인정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최치원이 기록에 남기기를 ‘대진국은 고구려의 사마귀만한 부락에서 나타나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태백산을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신라인들은 대진국을 ‘말갈발해’나 ‘발해말갈’ 혹은 ‘말갈’ 등으로 부르면서 ‘대진국’이라는 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발해말갈’이란 당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해서 기록한 구당서의 표현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를 고구려가 망하자 변방의 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고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역사를 더듬다보면 대진국이 건국과 멸망의 위기에서 신라에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한 사실이 있다. 이 같은 위급 사태에 직면하여 신라가 이를 돕기로 수락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대진국과 신라 즉 남북국은 서로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나라의 화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먼저 신라가 대진국에 대하여 화친의 약속을 파기하고 대진국을 침략한 거란을 도와줌으로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 결과 대진국과 신라는 200여 년간 대립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동족간의 불화는 가슴 아픈 일이다. 더구나 서로 갈등만 역사위에 남긴 채 갑자기 대진국이 멸망하므로 남북조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런데 대진국의 멸망은 동이족에게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대진국이 망하므로 말미암아 동이족은 만주 땅에서 영토보유권이 사라진 것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동이족은 만주땅에서 명실상부한 국가를 갖지 못했다. 사실은 거란이나 여진, 금나라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으나 한반도와는 멀고도 먼 적대관계의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한족의 나라라고 말하는 중원의 나라들도 한나라, 수나라를 제외한 당의 이세민이나 원의 징키스칸, 명의 주원장, 청의 누루하치가 다 같이 동이족에 뿌리를 둔 영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가 동이족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이는 한반도와 만주땅이 대진국이 망하고 난 후부터 인연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며 동이족을 표방한 나라가 오로지 한반도에만 국한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는 흐르고 흘러서 동이족의 종주국인 고려가 한반도에 남게 되었다. 그런 고려에서 미미하게나마 한국사에 발해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자국사 논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슬픈 역사는 꼬리를 물었다. 대진국이 이민족에게 멸망당하고 우리의 역사가 신라 중심적으로 획일화되었다. 소위 신라삼국통일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역사서 말이다. 통일신라라는 것은 만주땅을 도외시 한 쪼가리 역사, 반도 중심의 단일 왕조역사로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통일 신라를 인정하면서도 대체로 대진국의 역사를 자국사로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고려 태조 왕건은 대진국이 망하기 전에는 거란과 교통하였다.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진국이 거란에게 멸망당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등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이게 하였다. 이것은 대진국의 멸망을 아쉬워하며 그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인식하였던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소위 대위국을 세운 바 있는 묘청의 일파로 지목된 윤언이의 해명 발언이 유명하다. 그는 칭제 건원을 하자는 청을 임금에게 올려 금나라를 격노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주적이고 왕을 존중하는 충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칭제 건원의 발상은 고려의 태조와 광종이 건원한 바 있었고 또한 신라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펙트’가 있다. 여기서 예의 주목할 일은 우리 역사에서 연호 사용의 예를 신라와 아울러 발해를 들었던 점이다. 이는 고려인들이 발해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인식했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인들은 그런 정도로 발해사를 자국사로 인정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실학파들이 나타나 대진국 역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1749- ? )은 저 유명한 발해고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고려가 떨치지 못함을 알게 한다. 옛날에 고씨는 북쪽에 살며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는 서남쪽에 살며 백제라 하였고, 박·석·김씨는 동남쪽에 살며 신라라 하였는데. 이를 삼국이라 한다. 그 삼국의 역사가 있는 것은 마땅한데 고려가 이를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부여씨와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했는데 이를 발해라 한다. 이를 남북국이라 할 수 있으니 남북국사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남북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고구려 사람이다. 그 소유한 땅은 어떠한 땅인가, 고구려의 땅이다. 그 동·서·북쪽을 넓혀 광대하게 만들었다. 김씨와 대씨가 망하자 왕씨가 아울러서 소유하고는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은 온전히 가지게 되었으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온전히 가지지 못하였다. 대씨의 땅은 혹은 여진에 편입되고 혹은 거란에 편입되었다. 이때를 맞아 고려를 위하여 세워야 할 계책은 마땅히 급히 발해사를 편찬하는 것이었다. 사필을 들고 여진을 책망하기를, 왜 우리 발해의 땅을 되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영토라 하고 1장군을 파견하여 그곳을 수복토록 하여 토문(土門) 이북의 땅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사필을 들고 거란을 책망하기를, 왜 우리 발해의 땅을 되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영토라 하고 1장군을 파견하여 그곳을 수복토록 하여 압록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토문 이북 압록 서쪽의 땅이 누구의 땅인지를 모르게 했다. 여진을 책망하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책망하려 해도 할 말이 없다. 고려가 드디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유득공은 위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요, 한국사는 삼국시대에 이어 신라와 발해가 병립하였으니 이는 남북국시대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남북국시대론’자들의 이론적 모형이 유득공에 의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진이나 거란을 보는 시각에 있어 차이가 있겠으나 고려시대의 북방 여진이란 발해유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거란도 역시 발해유민들이 포함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왕실을 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발해가 멸망하니 유민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이는 왕실의 멸망이 곧 역사의 단절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실 귀족사의 붕괴가 곧 발해 주민들의 역사까지 붕괴되었던 것은 아니다. 발해 유민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거란’ 사람이 되었으며, 거란화 되지 않은 유민들은 그 때부터 ‘여진’ 사람으로 불리어 졌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 모두가 발해에서 ‘여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자면, 만주의 금사(金史)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일가(女眞渤海本同一家)’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발해를 한국사로 취급하여 ‘남북국시대’를 주장하였던 유득공도 여진의 주거와 생존을 정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단지 고려만이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왕조로서 북방의 주인이라 하였다. 그 역시, 왕조 중심적 시각에서 송화강 주민의 속말인과 왕실중심의 고구려인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한치윤(1765-1814)은 발해사의 한국사화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해동역사(海東繹史) 세기(世紀)에서 발해사를 단군·기자·위만조선과 예·맥·부여·옥저와 고구려·백제·신라 및 고려와 같은 위치에서 서술하였다. 이들은 비록 외국의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지만, 한치윤의 발해사관은 한국사화에 투철하였다.

홍석주(1774-1842)는 동사(東史) 세가 중의 <발해세가>에서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이해하였다. 한국사가 중국의 동국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한 점은 큰 진전이라 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발해의 한국사적 견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한치윤과 홍석주의 《해동역사》와 <발해세가>를 참고하였던 강역고(疆域考)에 <발해고>와 <발해속고>를 남겼다. 그는 ‘발해의 건국은 본래 고구려의 땅에 근거하였다고 명시하고 우리나라 서북의 변두리는 모두 그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갈파했다.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 ? -1864)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신라와 발해의 공존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못 박았다. 그는 삼한의 여러 나라는 삼국으로 통합되었으며 신라·가야·백제이다. 그리고 가야가 망하고 고구려가 남쪽으로 옮겨와 다시 삼국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50년에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을 계승하여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을 지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한반도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으나 도련포(都連浦)· 청새관(淸塞關)· 압록강 밖의 땅은 여진과 거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고산자는 남북국의 통일을 고려통일이라 주장하고 땅의 대부분을 거란과 여진이 가졌으나 고려의 한국사적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와 같은 실학파들의 주장은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가치체계가 붕괴되므로 가능했다. 즉 발해사가 한국사의 체계 속에 들어오게 했으며 한국사의 독자성 확보와 중국사와 대등한 입장에서 한국사를 전개해야 한다는 주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많은 역사서가 나왔지만 이때의 발해사 인식을 잘 반영하는 것은 삼국사절요(1484)와 동국통감(1485)이다. 이 역사서의 발해사 기록은 중국의 당서(唐書)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발해사 기록의 양이 고려의 삼국사기보다 많아진 것은 발해사의 자국사화라는 입장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것도 조선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단지, 발해의 서술 분량이 많아졌을 뿐 발해사의 자국사화라는 구체적 인식은 소극적이었다.

한국사가 발해사를 자국사로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시기는 실학의 시대로 불리는 조선 후기이며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김택영이 편찬한 역사집략(1905)이다. 역사집략은 대조영을 속말말갈계로 보는 한계가 있으나 편년체의 역사 서술에서 발해를 민족사의 일부로 편입시킨 점은 크게 찬양할만하다. 그러나 김택영의 발해사에 대한 이와 같은 서술은 민족사적 당위성을 느낀 결과라기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발해사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일제의 억압 속에서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시기의 발해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하는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반식민사학 쪽에서 적극적이었다.

이때에 발해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풍조가 한국사의 모순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발해사는 상당히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열화와 같이 끓어올랐던 애국운동이 좌우익의 갈등으로 남북한이 대립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이 같은 민족의 비운은 역사학계마저 크게 혼란을 가중시키며 불행하게도 6. 25동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역사학계는 또 다른 진통을 겪으며 혼란에 빠져 들고 말았다. 분단된 조국인데 역사학계마저 통일된 학통을 만들지 못하고 반듯한 역사서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제 일본국이 물러가고 해방 60년을 넘겼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암담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은 뿌리 깊은 식민역사관이다. 그 식민역사관은 한국인의 정신을 파먹고 사는 병균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의 역사를 2천년짜리 미숙아로 만들고 말았다. 조상을 팔아먹고 조상을 잃어버린 돌 상놈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 중화인들이 우리를 크게 괴롭히고 있다. 중화인들의 동북공정이 그것이다. 그들이 고구려사며 발해사를 송두리째 자기들의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하는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발칙한 행동을 하는 중화인들을 대항하려면 이때에 대진국 역사의 한국사화의 작업은 참으로 시급하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주장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우리 역사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국사학계가 미동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귀중한 역사서를 위서라고 낙인찍어 외면해버리니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호소가 작위적으로 억지 춘양격으로 대진국역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에 나타난 진실을 사실대로 밝히자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가진 역사 유산으로는 대진국사를 한국사에 편입 혹은 복원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중화인들이 쓰고 지켜온 그들의 역사서에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대진국사의 한국사 편입이라는 해답이 있으니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하니 지금 부터라도 우리는 맑고 깨끗한 진정성 있는 빈 마음으로 대진국의 한국사 편입 내지는 복원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위에서도 수 없이 언급하였지만 대진국사는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그리고 이 대진국사가 우리 역사위에서 되살아난다면 중화인들의 헛된 욕망인 동북공정을 분쇄할 수 있는 답이 된다고 믿는다.
이순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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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화 문화 전반에 걸쳐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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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노인 2014/01/03 [10:03] 수정 | 삭제
  • 대진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 발전시키는 문제는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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