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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공정은 억지...중국 정사로 확인

고구려의 역사는 휘황찬란하고 광대하며 장구한 천년의 역사

이순복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1/06 [12:44]
위선자들아! 고구려의 광활하고 장구하며 휘황찬란한 역사가 한 낱 지방정권이라니 말이 되느냐?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여 위선자로 자처하며 억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중화인이다. 한 때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를 치마폭에 싸서 안으려는 작태를 멈추어라!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 지더냐? 역사의 왜곡을 이제 그만 두어라! 이제 중화인의 조상들이 써서 남긴 중화인의 정사에 나타난 고구려사로 저들의 위선, 즉 역사왜곡을 밝히기로 한다.

2천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랜 시간을 우리 모두는 아시아 대륙을 디딤돌로 삼고 역사라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해왔다. 이제 저 멀리 어렴풋이 고조선이 보인다. 낙랑 땅이 보인다. 예와 맥 그리고 대방·요동·현토 그리고 대국 고구려가 보인다. 위대한 광개토평안호태왕의 말을 달리던 모습이 보인다. 전설과 역사와 조상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머물러 있는 정겨운 지명들이 중원 천지에서 다 보인다.

▲ 이순복     ©브레이크뉴스
가슴이 뛴다. 거친 세파를 방랑하던 나그네가 그리운 고향산천을 목전에 둔 것 마냥 가슴이 뛰고 또 뛴다. 피도 끓는다. 붉은 피가 끓어오른다.

밝혀야 한다. 보아야 한다. 고구려를 눈으로 보아야 한다. 저들 중화인들이 얼마나 많은 죄악을... 행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밝혀야한다. 밝혀서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왜곡이란 치졸한 것이다. 그 역사왜곡은 치졸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중화인들의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고구려의 약식역사를 열거하여 중화인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시정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1. 고구려의 약사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BC 37년에 건국하여 ad 668년까지 705년을 지속했던 대국이다. 어떤 역사서에는 1,000년의 역사를 말하기도 하지만 705년으로 못을 박아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는 성쇠를 겪으며 긴 세월 속에서 천변만화의 모습을 보이지만 대강 줄거리만 잡아 이야기하기로 한다.

처음 고구려가 건국한 곳은 홀본이다. 그리고 나라가 기틀을 잡아가자 압록강 물줄기를 이용하여 외적을 방어하기에 편한 국내성에 도읍지를 옮기었다. 국내성은 bc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도읍지로 삼고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국내성을 중심한 지역은 산악지라서 식량생산이 어려운 탓으로 고구려는 요동에서 한강까지 이르는 비옥한 황해 평야를 확보해야했다. 황해평야는 옥야천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고구려가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력한 적이 있어서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추모왕은 옥야천리를 정복하는 일을 미뤄두고 우선 주변의 작은 세력부터 통합해야했다.

bc 37년 추모왕은 백두산 동쪽 산간지대의 약소국인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를 통합했다.

bc 9년 2대 유리왕은 국내성 서쪽으로 진출하여 선비족을 굴복시켰다.

ad 21년 대무신왕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라 하는 부여국을 선제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비록 패배했지만, 부여는 왕이 죽고 내분에 빠졌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과 경쟁에서 밀리고 고구려는 국력이 신장되어 갈사국, 개마국, 구다국을 통합하였다.

ad 37년 고구려는 남쪽의 낙랑국을 멸망시켰다.

ad 49년 5대 모본왕은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후한으로부터 막대한 물건을 받고 귀국했다.

6대 태조대왕은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를 통합하고 동해안에서 남만주 일대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했다. 그리고 숙신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태조대왕 55년에 요서지방에 10성을 쌓고 후한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후방에 배후기지를 건설하였다.

ad 98년 태조대왕은 6개월간 책성에 머물면서 지배를 강화했다.

고구려는 서쪽의 후한, 북쪽의 부여가 연합하여 대항하므로 ad 122년 이후 대외 경략을 못했다.

2세기 초 고구려는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이겼다. 고구려는 후한의 전쟁 포로 1명당 비단 40필을 받고 화해했다.

197년 왕의 동생인 발기와 소노부가 공손씨 정권에 투항하여 서부지역 영토를 잃었다.

238년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씨를 공격할 때에 원군을 파견하며 요동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도망했다.

259년 위나라 대군이 침략하자 양맥곡에서 대파하였다.

270년 서천왕은 숙신과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요서지역의 모용선비와 부여 쟁탈전을 벌렸다.

300년 미천왕은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을 꾀했다.

313년 남쪽의 낙랑군을 차지했다.

314년 대방군을 완전히 동방지역에서 몰아냈다.

319년 미천왕은 우문선비, 단선비, 서진 등과 함께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연합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342년 모용선비는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를 몰아내고, 단선비를 격파하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모용선비에게 수도가 함락 당했다. 고구려는 왕모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자 모용선비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무릎을 꿇었다. 모용선비가 우문선비를 물리치고 황하 일대로 남하하여 강국으로 성장했다.

346년 모용선비는 부여를 침략하자 부여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371년 고구려 국왕 고국천왕이 백제와 전쟁에서 살해당했다.

391년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아 왜와 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한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또 동부여의 64개성을 점령하였다. 숙신족을 정벌하였다. 거란족의 일파인 비려를 격파하고 서요하 상류인 염수(鹽水)까지 진격했다. 모용선비가 세운 후연을 공격하여 멸망하게 하였다. 백제의 58개성을 점령하고 신라 수도에 주둔군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었다. 또 후연이 멸망했지만 그 땅에 고구려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요동에서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구려는 거란, 북연, 신라, 숙신과 같은 제후국을 거느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국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4대 강국이 되었다.

427년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썼으나 실제로는 북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435년 척발선비족이 세운 북연이 북위의 공격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어대릉하 연안에서 대면하였으나, 큰 무력 충돌은 없었다.

475년 백제가 부흥을 꾀하고자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이를 먼저 탐지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남쪽의 웅진으로 밀려갔다. 이때 고구려의 영토는 아산만에서 대전을 거쳐 포항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인 충주 지역에 국원성을 세우고 남부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494년 문자명왕 때 부여가 스스로 투항했다. 고구려는 부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실위족에게 철을 공급하며 회유책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물길족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고구려의 북부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550년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침략해 왔다. 고구려가 돌궐을 막는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해왔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와 화해하고,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견제하게 했다. 신라가 백제를 견제하는 대가로 한강유역의 땅을 주고 돌궐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고구려는 돌궐과 첨예한 이권이 걸린 거란족 지배문제에 있어서 기득권을 잃지 않았다.

2.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영토를 살펴보아 중화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가를 면밀하게 알아내어 저들의 시커먼 뱃속을 드려다보기로 하자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1천여 리에서 2천여 리까지 변하지만, 동서의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은 없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후한서』‧『삼국지』‧『북위서』에는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는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한 후의 고구려 강역이다. 고구려가 가장 쇠약했을 때의 기록이다. 당시 고구려의 동쪽에는 옥저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여 리가 되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하북성의 칠로도산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선은 보통 가로막힌 큰 강이나 산맥으로 형성되므로 고구려의 서쪽 2천여 리에서 국경선이 될 만한 곳은 난하와 칠로도산 밖에 없다.

그리고 고구려 서쪽의 1,000여 리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으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 땅이다. 이곳 하북성 요동 땅은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1천여 리 침략하여 연5군(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을 설치한 지역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이며,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또한 훗날 고구려가 태동한 지역이며,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한 후에는 공손씨 정권과 선비족인 모용씨의 연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북위의 평주와 영주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하다. 하북성 요동 땅 1천여 리는 5호 16국 시대에 격랑의 중심지였다.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은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구당서』‘동이열전 고구려의 원문’

위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고구려 평양성까지의 거리가 5천 1백리이고, 고구려 강역의 동서 거리가 3천 1백리이다. 『구당서』는 거리를 100리 단위까지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동서 거리가 3천 1백리이면 위의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은 고구려 서쪽 국경이 태행산맥의 갈석산 부근이 된다.

『통전』에서 “진 태강지지에서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와의 옛 경계에 있다(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고 하였다.

이것은광개토태왕 이후 하북성 요동 땅 1천여 리를 수복했을 때의 기록이다. 또 당시 고구려 서북쪽에 영주營州가 있었으므로 영주의 위치가 오늘날의 중국 북경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는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잇는 선이다.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대흥안령산맥은 북방 유목세력과의 주요 경계선 역할을 하였으며, 태행산맥은 농경세력인 한漢족과의 오랜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전국책』‘연책燕策’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중략...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으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中略...邦國之固 而山川社稷之寶也)” 『염철론』‘험고險固’

위 『전국책』과 『염철론』의 기록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BC 300년경)이 있기 전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가 태행산맥의 갈석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하여 막혀있으며 그 동쪽에 요동의 조선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또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가 가장 강성하였던 묵돌 선우(冒頓 單于, 재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시대에도 흉노는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상곡을 넘지 못하였고, 상곡지역을 경계로 예맥, 조선과 접하였다.

“좌방의 여러 왕과 장수들은 동방에 거주하며 상곡上谷 바깥을 마주보고, 동쪽으로 예맥, 조선에 접한다. 우방의 왕과 장수들은 서방에 거주하며 상군上郡 서쪽을 마주보고 월지, 저, 강에 접한다. 선우의 정庭은 대, 운중을 마주본다.(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接月氏﹑氐﹑羌;而單于之庭直代﹑雲中)” 『사기』‘흉노열전’

『통전』은 고구려의 강역에 대하여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동서로 6천여 리는 고구려가 북쪽의 부여지역까지 차지했을 때의 기록이다. 위의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은 구당서의 기록인 동서 3천 1백리에서 동쪽으로 2천여 리가 늘어나고, 서쪽으로 1천여 리가 늘어나서 동서 6천여 리가 되었다. 이때의 서쪽 국경선은 대략 지금의 중국 섬서성 유림관까지다.

또『삼국사기』‘온달열전’과 『태백일사』‘고구려본기’에 고구려가 산서성 너머로 진출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을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질풍같이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삼국사기』‘온달열전’

“대덕 18년(576년) 병신에 임금이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과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유림관까지 추격하여 북주를 대파하였다.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 산서의 경계이다(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以東悉平 楡林 今山西境)” 『태백일사』‘고구려본기’

위 『태백일사』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에 위치한 백석산이며, 배찰산은 하북성 장가구시 북쪽지역이다.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년) 시절, 북주가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과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상곡 부근으로 공격해오자, 고구려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파한 기록이 있으니 고구려가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넘어 산서성으로 북주를 공격한 것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사학계나 중화인의 주장은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을 오늘날의 요령성 요동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그 동쪽에 있는 고구려 강역은 동서 1천여 리가 되지 못한다.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는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므로 국사학계나 중화인의 주장은 중국 정사들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그러므로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서 언급한 고구려의 강역 동서 2천여 리를 충족하려면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라는 결론이다.

3. 고구려 영토의 변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발기의 난’으로 말미암아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하고 요동의 동쪽 천리로 천도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편>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한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동옥저’편>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예’편>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삼국지』‘위지동이전 읍루’편>

고구려의 동‧서쪽 경계를 살펴보자.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남‧북쪽 경계를 살펴보자. 남쪽은 조선과 접하고 있는데 조선은 마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북쪽 경계는 한반도 평양 또는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으로부터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요하 일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강역은 동서로 개마고원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요동반도 대련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2천여 리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으므로 하북성 요동의 끝인 칠로도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요령성 요양 부근이 된다.

또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서 사방 2천리의 강역이므로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으로 둘러싸인 만주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사학계와 중화인들은 이를 인정치 아니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축소지향적으로 해석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 사학계는 밥그릇 싸움을 멈추고 태백일사를 인정하시오. 이상에 인용한 모든 중국의 사서를 충실하게 연구하시오. 그래서 위대하고 빛나는 조상의 업적을 드러내는데 충실하시오.

그리하여 동이족의 위대함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몽골, 만주, 한반도, 왜국이 모두 다 같이 하나의 피요, 하나의 혈색이요, 하나의 동이족임을 명심하시오. 양자강 남쪽에서 올라온 중화인의 단결력에 부끄러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근시안적 역사관을 버리고 올바른 역사를 찾아야 합니다. 동이족의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큰 공부를 하신 역사학자님들의 양심적인 분투를 부탁합니다.

이순복 칼럼니스트
ntgf1000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전반에 걸쳐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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