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세 어설픈 길거리 남자, 32세 공무원 만나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희망의 씨앗이 생겼다. 씨앗은 자라고 와이프의 배는 불러오고, 전치태반으로 제왕절개로 아들이 태어났다. 한 달 빨리 수술하고 몸을 푼 아내는 직장으로 나갔다. 손바닥만한 아들을 두 시간마다 울어제끼는 성화에 젖 먹이고 등 두드리며 트림하면 다시 뉘어 재웠다. 6개월. 조금씩 성인처럼 잠들고 깨어나는 아들, 즉 우주의 순리에 나는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천정에 엉성한 모빌을 달아 가끔씩 회전시키기도 하고.
기어 다니다가, 집안의 온갖 것을 잡고 빨고 만지작거리며 가끔씩 모서리에 부딪치며 울고. 집안은 문짝마다 청테이프로 감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들이 네 살이 되던 해에 내게 우울증과 당뇨가 찾아왔다. 당뇨-눈이 흐릿해지며 기운이 파도를 타는 통에 가끔 아들이 우는 소리(통신)를 듣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대책을 세웠다. 현미 먹고 매일 북한산에 아들을 등에 업고 약수를 받으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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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가 잡히고 관리수준이 되니, 어느 날 우울증이 내게 방문했다. 살인 방화 자살 심장부정맥 두통 침잠 순간적인 폭발성 등등, 수많은 증상이 나를 괴롭혔다. 고려대 구로병원장을 지내시고 노숙자 정신건강 상담을 해 오신 배기영 박사님을 찾아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우울증은 보통 두 달 분량의 처방을 내리는데, 일주일에 서너 번을 찾아가 내게 맞는 증상조절을 해주셨다. 지금은 하루에 여섯 알씩 세로토닌 내지 부가 약물로 생을 붙들고 있다. 참으로 숭고스런 분들이시다.
당뇨와 우울증의 한복판에서
결심을 했다가도 아들의 자는 얼굴을 보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 겨울밤에 오한과 더불어 복통을 호소했다. 동네 병원 네 군데를 돌아다니며 처방을 받았다. 낫지 않았다. 나는 한의사 지인에게 연락하여 설사약을 먹이고 싶다했다. 한의사는 뚫어야 되는 것인데, 그걸 사(射)라고 했다. 나았다. 그러나 불안했다. 연세대 정기섭 소화과 전문의를 찾아갔다. CT촬영 후에 대장의 숙변이 원인이라 했다. 듀파락이란 숙변 제거제를 두 달 복용해야 된다고 말했다.
당뇨라서 현미밥 잡곡밥을 아들에게 먹인 것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두 달 듀파락을 먹인 후에 아들은 완치됐다.
당뇨와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와이프는 퇴근 후의 남편이 나무늘보 같다고 푸념했다.
어느 날 와이프가 퇴근하고 집에 행장을 풀어놓은 시간에 난, 아들이 신문지에 싼 오이 같고 단단한 똥을 수저로 잘라 스테이크처럼 잘라 서로 맛보자고 했다. 나는 과감히 아들의 똥을 잘라 수저로 스테이크처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질겅질겅 씹었다. 생김새는 우황청심환 같은데 맛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아들과 마누라에 대한 존경심은 그것뿐이었다.
똥-분(糞)! 산해진미도 똥으로 통일되는구나. 공산 독재 자본주의도, 먹고 싸고 자는 것에 대한 원시적 투쟁인데, 와이프는 굳이 똥먹는 나를 외면했다. 똥! 어렸을 적 선산에 똥구덩이를 파고 흙을 덮어 호박씨를 심으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이 나왔다. 똥! 동남아의 주택구조상 가축은 위에서 흘리고 떨어뜨리는 똥을 먹고 살았다. 제주도 똥돼지를 일본인은 더럽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제주도 똥돼지를 맛있게 먹는다. 똥!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오줌과 똥은 생존요건의 제일이다. 똥! 캄보디아의 사향원숭이가 먹고 싼 똥섞인 커피는 비싸다. 똥!
박통시절에 산과 들에서 베어 온 풀잎 위에 똥을 고루 뿌리면 한해 농사의 비료역할을 했다. 봄에 대문간 옆의 똥냄새는 구수하게 발효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당시 쥐꼬리와 겨울 난방용 솔방울 조개탄과 아울러 농번기 방학이 주어졌다.
중국산 배추는 똥으로 키워서 기생충이 우려된다고 한다. 그걸 막는 것은 오백 원이면 된다. 웬디 오랄 필! 구충제다. 기생충보다 더 무서운 게 농약이다. TPP로 우리나라는 농촌이 절멸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쓰나미다.
요즘 아들에게 암기시키는 것은 하나다! 주택가 이면도로에선 좌측통행만 해라! 집 근처에 대형 교회와 절이 있어 횡단보도도 있다. 비좁은 이차선 이면도로다. 일 년에 대여섯 번 대형사고가 난다. 내 아들도 우측동행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택시에 발등을 눌렸다. 다행히도 동네 어른들 일곱 분이 택시를 밀어 올려서 발을 구했다. 합의금 30만원에 해줬는데, 지금까지도 가끔 그 발등이 아프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보고 바보라고 한다. 나는 자식 팔아 돈벌일 없고, 아들의 아픈 발등은 평생 경구가 될 것이니 오히려 잘됐다고 한다.
즉, 주택가 이면도로를 보행할 땐 좌측통행을 해라. 차를 보고 피해야지, 차가 뒤에서 덮치면 속수무책이다. 이것만 지켜도 초등학교 교통사고 30%는 쉽게 고칠 수 있다. 서양인, 나아가 유태인은 아이를 가슴에 안지 않고 등 뒤에서 등을 맞대고 뒤를 바라보게 하고 보행한다. 맞닥뜨려 피하는 전술, 사각지대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로 가족의 안전한 나들이.
내 아들은 핸드폰이 없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구하라고 한다. 요즘, 초등학생도 화장하고 수업시간에 게임을 한다. 와이프가 전해준 충격적인 현실이다. 순방향 보다 역 방향성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침 여섯시에 일어난다.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고, 당뇨잡기 위해 체육관으로 간다. 그리고 손님 상담을 하고, 저녁 여섯시쯤 투쟙 일터로 나가 자정쯤 돌아와 샤워하고 잠잔다. 가족 간의 대화시간은 하루에 십분도 안 된다.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 아들은 구어체를 모르고 문어체로 대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식사하세요. 다녀올게요.” 라는 답변을 한다. 핸드폰이 없어서 친구도 없다.
나는 신께 매일 기도한다. 나무 할렐루야 인샬라! 아들이 14세 때, 즉 작년 가을쯤이다. 큰 스케치북 같은 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제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와이프가 못을 박아달라고 했다. 아들은 그 네모진 것을 침대의 이불 속에 감추었다. 날이 바뀌고 내가 못질한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
길
길이 있다. 어제 길이 있었던, 내일도 있을, 그 자리에. 길이 있다. 수많은 잡초, 시냇물 소리에서 황금빛 논에 드리운 사람들이 있다. 끝없이 구불구불하고 자연스럽게, 단조롭지만 단조롭지 않은 길이 펼쳐진다. 길 옆 덩그러니 있는 나무 발치에서 찌르르 매미 소리가 들린다. 길이 있다. 무너진 성벽 옆, 사람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적막과 소리만이 남는다. 성벽의 새들의 보금자리,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생태계다. 그 사이로 보이는 한 폭의 그림 속 논의 허수아비.
길이 있다. 짙고 날카로운 가시덤불, 그 사이로 외나무다리.
폭삭 부서질 것 같은. 길은 없다. 길은 끝이 없다. 온몸이 긁히고 피가 방울지어 떨어진다. 밤손님과 어둠, 부엉이 소리.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들을 수 없다. 돌멩이가 많고 거칠어진다. 길의 끝을 내 눈에, 온몸에게 보여주고 싶다. 길. 그 옆에 허수아비가 있다. 조용하게. 나는 허수아비 가까이 가고 싶다. 살살 불어오는 썰렁한 바람. 벼가 흔들리는 느낌. 나는 아무 고통도, 생각도 하지 않고 싶다. 지나가는 새가 앉아서 쉬고 벌레가 파먹더라도 관대하게 있고 싶다. 행복은 없다. 고통도 없다. 나는 길 옆 적막한 허수아비가 되고 싶다. 잠시만이라도. 나는 매일 기도한다! 나무 할렐루야 인샬라! 살다가 청산에 뿌려져 냇가와 강을 거쳐 바다로 이르기를.
세상의 눈칫밥 먹는 남편들을 위하여 삼가 졸고를 바칩니다. 거창하진 않아도, 평범하고 부산한 아침의 생동감을 느끼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오늘도 작은 꿈을 꾸어 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백두산 꼭대기에 두고 살아갑시다. 먹고 싸고 잠자는 것이 뭐 이리도 복잡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samsohun@hanmail.net
*필자/삼소헌 이래권.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