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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첫관문,북한 어떻게 변화시킬것인가?

서독 통일정책 ‘접촉통한 변화’ 서독의 지혜를 배우자!

하정열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3/09 [22:45]
통일이 대박이 되기 위해서는 평화통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 북한주민이 남쪽을 바라보며 우리와의 통일을 원해야 한다.
 
북한의 변화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북한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1990년대 동구권의 변화과정에서 체제가 무너지고 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개방과 개혁을 통한 변화가 바로 체제와 정권유지에 영향을 주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화를 위한 제한요소와 촉진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북한 변화의 제한요소를 제거하고 촉진요소를 강화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 하정열  박사   ©브레이크뉴스
 
북한 변화의 제한요소는 북한의 무력통일을 명시하는 노동당규약과 사회주의 혁명을 강조하는 북한 헌법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온 북한의 세습왕조체제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을 두려워하는 북한 정권, 남북 간의 교류협력과 관계개선이 흡수통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북한군 등 권력집단 등도 제한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통일 전의 동독도 지금의 북한과 유사한 제한요소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의 과정을 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서독은 통일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인 접근전략을 통해 동독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동독은 공산주의체제와 공산당의 정권 유지를 위해 변화를 거부한 가운데서도, 상호주의를 효율적으로 적용하면서 교류협력을 지속하는 전략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서독은 긴장완화와 분단고통의 감소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통해 동서독 간 교류협력을 활성화시켰다. 특히 사민당의 브란트정부는 양 독일 간의 정치와 군사문제를 경제교류협력에 연계시키지 않는 정경분리원칙에 의하여 민간부문과 경제교류협력을 증진시켰다. 정부 차원의 경제협력은 분단고통의 감소, 긴장완화 차원에서 서로 연계시키는 상호주의 전략을 취하였다.
 
즉 서독은 베를린과 연결하는 교통망 확충을 위해 고속도로 및 운하건설에 14억 마르크(DM)를 연방재정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동독 측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 시 산재연금 수령자에 대한 최소 환전의무 면제, 정치범 석방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외에도 1983년과 1984년에 서독정부는 동독에게 19억 마르크를 제공하였으나,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교류의 확대, 내독 간 국경에서의 수속절차 완화, 환경과 문화협정 회담 재개 등을 동독 측에 요구하고 이를 성사시켰다. 정부차원의 경제협력은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였으나, 동독주민들의 생활수준을 증진시키기 위해 서독주민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동독주민들에 대한 각종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인도주의적 민간지원을 확대하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서독정부는 동독주민들이 서독사회를 동경하게 유도하였다.
 
서독이 추진한 ‘신동방정책’ 아래에서 동독의 변화를 위해 추진한 전략과 정책에 대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시사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독은 동독과 교류협력을 추진하면서 동독이 교류협력에 소극적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비탄력적 상호주의 원칙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공연, 전시회, 운동경기 등을 개최하는 경우에는 동독에서의 개최빈도와 서독에서의 개최빈도를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역에서만의 개최조차도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러한 교류협력에 소요되는 비용부담의 경우에도 동독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여 서독이 좀 더 많은 부담을 안을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교류협력의 지속적인 유지를 고려하여 가능한 한 일방통행식의 교류를 자제하였다. 교류의 내용과 폭은 다양한 내용을 가지되, 이해관계가 호혜적 차원에서 관철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즉 포괄적이고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여 동독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둘째, 서독은 교류협력분야를 선정할 경우에는 가능한 동서독이 공동으로 관심을 가지는 분야 중 동독이 상대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좀 더 쉽게 응해 오리라고 여겨지는 부문과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이 경제적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분야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셋째, 서독은 정부와 병행하여 민간차원에서 교류협력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인도적·행정적인 지원과 함께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서독은 민족적 동질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청소년 교류를 재정적·정책적으로 지원하였다. 동독체제의 선전을 위해 추진했던 청소년 교류는 선발된 동독 청소년들이 오히려 서독체제에 동경심을 갖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중요한 사실은 동서독 청소년들 간의 만남이 상호 현실 및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추진하였다.
 
넷째, 동서독 교류협력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서독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에서 현금 대신 물품지원을 선호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한이 남북 교류협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외환을 핵개발 등 군사 분야에 투입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우리의 우려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다섯째, 서독은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통일정책 아래에서 인적교류를 물적교류와 연계시켜 교류의 폭을 확대시키는데 최대의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인적교류의 확대를 위한 양보를 동독으로부터 받아내기 위하여 동독이 양보할 때마다 신축적 상호주의 전략에 따라 적정한 대가를 지불했다.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 관계는 서독의 적극성과 동독의 소극성이 맞물려 처음에는 극도로 제한된 교류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특수한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약 이후 호혜주의에 바탕을 둔 상호주의 정신에 따라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민족적 동질성 회복을 추구했다.
 
서독정부가 동독의 변화를 추구했던 ‘신동방정책’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사민당의 브란트 수상에 의해서 추진되었지만, 이어 1982년까지는 슈미트수상에 의해 집행되었다. 그 후 1982년부터 통일이 된 1990년까지는 보수당인 기민연 출신의 콜 수상에 의한 기민·기사연과 자민연의 연정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실제로는 이 시기가 ‘신동방정책’이 가장 많은 성과를 보여주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동서독 관계는 수많은 협정체결에 따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동독정부의 변화를 법적·제도적으로 강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동서독 간의 특수 관계를 고려하여 비탄력적 상호주의는 자제하였지만, 사안별로 포괄적이고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였다.
 
셋째, 분단국가가 교류협력을 지속하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까지는 동서독 간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왕래가 있었다. 남북한 간에도 이산가족 상봉, 식량지원 등 인도적 사업과 물자교역, 관광 등 경제교류, 그리고 체육, 학술교류 등 사회·문화적 교류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실정을 많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다. 보고 느끼면 변화하게 되어 있다.
 
넷째, 북한의 개방 수준에 비례하여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에 대한 우리 정부의 개입수준이 적절히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공고화를 추진해왔던 동독의 경우, 상응하는 동서독 교류와 협력에서 동독정부가 배제된 적은 없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서독과 동독의 경험에서 보면 이념 및 경제체제가 상이한 분단국에서 교류협력을 확대하거나 법률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교류협력과 이를 통한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류협력의 활성화는 필연적인 것이다. 변화를 하지 않으려는 집단과의 협상에는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서독정부는 포괄적이고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여 동독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추진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이를 법과 제도로 뒷받침하여 동서독의 정권교체의 과정에서도 불필요한 분쟁과 시간 및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황은 다른 점이 있지만, 우리도 이러한 교훈을 슬기롭게 활용한다면 조만간 평화통일의 문을 열고 ‘대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hjy20813@naver.com

*필자/하정열. 박사. 한국안보통일연구원 원장,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예비역육군소장,  교수, 시인, 화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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