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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비(碑) 희한한 묘(墓)

이승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4/04 [13:56]
김포군 월곶면 조강리 휴전선에서 불과 200m.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병대 경비병이 열어줘야 묘소에 갔다. 해마다 3월 마지막 일요일이 시제 날이다.
 
묘역 문인석이 우람하고 특히 이수(1458∼1516) 무덤은 △삼단 둥근 호석 높고 크다. 봉분 위편 용미(龍尾) 돌로 되었는데 이 부분은 호남에서 보지 못한 남근(男根) 모양이다. 혹 거북 머리인가? 하여간 희한하다. 어른들의 익살스러움인지 남자 선호사상에 따른 중부지방 특유의 민속묘제 표현인지 하여간 연구 대상이다. △몸 갓이 하나인 석비 규모 작지 않다. 오래 된 머리 부분 조각 문양 구름(용)인 듯 비교적 완연하여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반듯한 4각 고른 네 면에는 있어야 할 글자가 한 자도 없다. 아무리 심한 우로풍상에 씻겼다손 치더라도 이럴 수 있을까? 작은 글자는 그렇다 치고 앞면 대자 새길 자리 눈을 부릅 떠 더듬어도 1점 1획 흔적이 없다.
 
아예 글씨를 새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비를 세웠나? 세상에는 글씨 없는 비 있다. 이를 ‘백비(白碑)’라 한다. 전남 장성 청백리 박수량(朴守良:1491∼1558) 백비가 그것이다(전남 기념물 193호). 이를 통하여 의문을 짚어 본다. 8세손 예조정랑 태동(1638∼1706)이 쓴 이수 행장에 눈길 끄는 대목 “자녀에게 계를 삼도록 글로 써 유언하기를 ‘녹과 옳다는 일은 생각지도 마라’(作書遺子戒勿干祿義)”하셨다. 28세 동생 목이 죽을 때 조카 세장(世璋:1497∼1562) 겨우 두 살 제수씨 공주 친정으로 가시니 이곳으로 물러가 조카를 지켰다. 세장 명종조 청백리가 됐었음은 큰아버지를 거울로 삼은 결과라 본다.
 
조카와 아들 세연 가난도 하지만 어르신 유언이니 백비를 세운 걸로 봐야 한다. 한국 분단 70년 자손 머져도 접근이 어려운 철조망 지대 어느 누가 감히 묘비에 관심을 가졌으랴? 애기봉 아래 철책 너머 800m(?) 한강 그 건너가 북한이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될 날 멀지않다. 남북학자가 함께 금석문과 중부지역 묘제 연구를 한다면 이게 통일의 길이다. 전주인 이수 청백리(?)의 백비가 교류를 기다란다. 오가는 길 아성 남규 선생, 병우, 순섭, 진희, 국순, 양규 외 여러 얘기가 가슴을 뭉클케 한다. 행장 가운데 윤필상 간당과 거슬러 ‘충주목사’로 갔다는 이 사실은 재평가 대상이다.esc2691@naver.com
 
*필자/이승철. 국사편찬위 사료(史料)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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