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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40돌 '10년후비전 매출 100조시대'

창립 40돌 맞아 10년후 비전 선포‥1일, 기념식 거행

박희경 기자 | 기사입력 2008/04/01 [18:58]

포스코가 창립 50주년이 되는 2018년 연결기준 매출 목표를 100조원으로 정했다.

포스코는 1일 포항 본사 대회의장에서 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철강본업의 토대 위에 에너지, e&c 등 전략사업의 육성과 신성장사업의 적극 개발을 통해 10년 후 연결기준 매출 100조원을 하고, 글로벌 조강생산량을 5,000만톤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포스코 비전 2018’을 선포했다.

이구택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포스코가 산업화시대에 조국을 위한 사명감으로 성공의 역사를 써왔듯이 미래에는 회사 창립 이념을 세계 속에서 승화, 발전시켜 인류사회 발전을 위해 글로벌 성공을 이어가 자”고 강조했다. 

박태준 명예회장도“포스코 40년이 한국 근대화 40년의 기반이 되었 다는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이라며“전 임직원이 하나로 뭉쳐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도전정신을 포기한 적이 없었던 전통을 명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아 우리나라의 선진화에 기여해 달라”고 당부 했다.

이날 창립기념식에는 박태준 명예회장을 비롯한 창설요원들이 참석해 후배들과 함께 회사 창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공적인 비전 실현을 기원했다.

창설요원이 창립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 40주년이 처음으로, 창설요원들이 기념식장에 입장할 때 새로 단장한 사가(社歌)가 장내에 울려 퍼져 전현직 임직원들을 숙연케했다. 포스코는 창설요원들의 제철 보국의 의지를 되새기고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하기 위해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준공하던 해인 `73년 만들어진 사가를 창립 40주년을 맞아 일부 가사를 수정, 새로 녹음했다.  

창설요원들은 창업정신을 바탕으로 도전과 각오를 내용으로 하는 신입 사원들의 뮤지컬 공연과 포스코의 성장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관을 관람하면서 철강불모의 땅에 제철자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날 영상으로 발표된 포스코의 미래 청사진에는‘성장과 수익, 안정과 지속성을 갖춘 새로운 포스코’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담았다.

지난 40년간 매년 10% 이상 성장해 온 저력을 바탕으로 향후 10년간도 기술개발과 혁신의 속도를 높여 매년 10% 이상 지속 성장함으로써 연결기준 매출 100조원을 반드시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철강부문에서는 해외 성장시장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생산능력을 늘려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모두 최고 수준이 되는‘글로벌 big3, top3’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함으로써 70조원의 매출을 확보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비철강부문에서는 e&c, 에너지, it 등 기존의 핵심사업과 신성장동력을 적극 육성해 30조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 포스코 매출액 실적 및 전망(연결기준)                     (단위:억원)


73년
(1기가동)


78년 (10년)

88년 (20년)

98년 (30년)

2008년 (40년)

2018년(f) (50년)

416

3,597

37,011

111,377

343,000

1,000,000


특히 글로벌 big3로 도약하기 위해 국내4,000만톤을 포함한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를 구축하고, 제2의 성장거점인 인도는 물론, 중동과 미주, 유럽지역의 생산거점도 적극 확대해 글로벌 조강생산량을5,000만톤 이상 으로 늘릴 계획이다.

포스코의 10년후 비전 추진 전략도‘3s’로 집약했다. 즉 해외시장 중심의 능력증강(size up), 어떠한 경영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경영 체질 구축(speed up), 출자사와 동반성장 및 연결경영체제 강화 (synergy up)가 그것이다.

포스코는 지난 40여년간 국가경제를 지탱해온 것처럼 향후에도 기간 산업으로서 국가경제 발전에 지속 기여하는 한편 그동안의‘정도 경영’을 더욱 꽃피우고‘글로벌 마인드와 역량’을 갖추어서 새로운 성공신화를 창조하는 강한 기업, 사회에 책임지는 지속가능 기업, 세계로 부터 존경받는 모범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방침이다.

지난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로 출범한 이래 40년간 줄기차게 성장, 발전해 온 포스코는 불혹의 나이를 맞은 현재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 철강기업으로써 자리매김했다.

창립 당시 16억원에 불과하던 자산규모는 지난해 30조 4,928억원으로 1만9,000배 이상 늘었고, 포항제철소 1기가 가동된 1973년 416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액도 지난해 22조 2,000억원으로 530배 이상 증가했다.

포스코가 지난 40년간 생산한 철강재는 후판 6,925만톤, 열연 2억1,376만톤, 냉연 1억3,384만톤, 선재 3,936만톤, 스테인리스 1,941만톤 등 총 5억5,085만톤이다. 중형차를 기준으로 환산한다면 약 5억 8,00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포스코가 자본과 경험, 원료, 기술 등 일관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어느 요소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외 무수한 반대와 우려를 딛고 세계 최정상권의 철강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태준 초대 사장을 비롯한 초기 건설역군들의 제철보국(製鐵報國)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함께 이를 면면히 이어와 기업이념으로 승화 발전시켜 온 덕분이다.

만성적자이던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꿔 종합제철 건설의 최적임 자로 선택된 박태준 포스코 초대 사장은 선진 각국들이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제공을 거부하자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직접 일본 정재계 지도자들을 설득해 자금조달에 성공했다. 

68년 창립이래 줄곧 포항 효자동 회사 사택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현장 직원들을 독려해‘효자사 주지’로 불리울 정도였으며,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영일만에 우향우하여 투신할 수밖에 없다는‘우향우 정 신’은 지금까지도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이 됐다.

초기 건설 역군들은 제철소 건설 현장에서 명절 차례를 지내며, 공사가 지연되면 임원이나 사무직 직원 가리지 않고 현장에 뛰어들어 공사기간을 단축시켰고, 불량공사가 발생했을 때는 과감하게 폭파해 완벽시공의 귀감 이 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13번이나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민들의 열망도 포스 코 성공 역사에 큰 보탬이 됐다.이에 포스코는 정부와 국민, 지역사회, 주주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정도경영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일청구권 자금 등 회사설립부터‘86년까지 정부가 출자한 종자돈 2,205억원은 민영화되던 2000년 10월초까지 배당 2,744억원, 주식매각 및 양도 3조 6,155억원 등 총3조 8,899억원을 되돌려줌으로써 공기업으로서의 소임을 완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정부의 출자금액에 대한 투자수익률은 연평균 16.1%로 같은 기간 일반은행의 대출우대금리 연평균 수익률 14.4%보다 약 1.7%p 높은 것이다.

88년에는 국민주 1호로 주식을 공개한 이래‘94년 국내 최초로 뉴욕증시에 주식을 상장했고,‘95년 런던증시,‘05년 동경증시에 상장 함으로써 세계 3대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유일한 국내기업이 됐다.또한2000년 10월에는 민영화를 통해 대외 경쟁력을 강화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포스코의 기업가치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민영화되기 이전인‘99년말 12조 600억원에서‘07년말 50조 1,000억원으로 4배 이상 늘었다. 

특히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된 지배구조하에서 전문경영인이 책임 경영을 하고 사외이사가 중심이 된 독립적인 이사회가 이를 견제, 감시하는 이상적인 경영체제는 이후 민영화된 다른 공기업들의 모범 모델이 되고 있다. 지속적인 경영혁신도 포스코의 자랑이다.‘99년부터 프로세스 혁신 (pi ; process innovation)을 통해 세계 철강산업 최초로 it를 접목한 디지털 경영체제를 구축했고, 이후 6시그마 기법을 적용해, 모든 구성 원이 스스로 참여하고, 스스로 혁신하는 분위기가 정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전 가공 처리 없이 철광석과 유연탄을 바로 사용함으로써, 100년 동안 가장 경쟁력 있는 제철공법으로 평가 받아온 용광로공법을 대체하는 환경친화적이고 경제적인 파이넥스공법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원천기술 측면에서도 세계 철강업계를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십을 갖추게 됐다. 

포스코의 이와 같은 성과는 국내외 언론들과 경제관련 단체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세계 양대 신용등급기관인 s&p와 무디스사는 포스 코의 신용등급을 각각 a와 a1으로 부여함으로써 세계 철강사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포스코의 성공요인은 미국의 스탠포드대, 하와이대 등 해외 유수대학교에서 모범적인 경영사례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으 며, 세계적인 철강 전문 분석기관인 wsd (world steel dynamics)는 80년 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으로 지속 선정해 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와 포천(fortune)지 등은 포스코를 가장 존경 받는 기업 중 하나로 매년 선정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경실련의 경제정의기업대상, 경총의 투명 경영대상, 한국경영학회 경영자대상, 한국 회계학회 투명회계대상, ir협의회 ir대상, 한국윤리경영학회 윤리경영 종합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특히 이구택 회장은 지난해 12월 국제철강협회(iisi) 회장에 피선됨 으로써 oecd, un 등 국제회의에서 세계 철강산업을 대표하고 있으며, 세계 철강산업의 경쟁력 향상과 현안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1.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일관제철소 건설

 가. 영일만 신화에서 광양만 신화까지 

 60년 후반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어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現 포스코 명예회장)을 비롯 한 포스코맨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잇달아 광양만에 세계 최신예 최대 제철소 건설을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 라고 이야기한다.

 - 5차례 제철소 건설시도 무위, 박정희 대통령 취임후 구체화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은 거의 전무 한 상태였다.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58년 자유당 정부 시절이었 으나 연간 선철 20만톤 생산을 목표로 했던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결국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61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부터다. 정부는 철강산업이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산업으로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기초를 다져야 할 필수 산업임을 인식하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적 비전을 이루기 위해 종합제철건설을 구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65년 존슨(lyndon b. johnson) 미국 대통령 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pittsburgh) 철강공업지대를 찾아가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inc)의 포이 회장을 만나 사업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이로써‘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       국제차관단의 와해로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구상

 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 건설사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와해됐지만 대한국제 제철차관단 발족은 우리나라에 종합제철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일관제철소 건립 일지>

시 기

경  위

계획규모

결  과

1958. 8

(자유당)

-대한중공업공사 추진

-입지: 강원도 양양

-자금: 외자3,475만달러,

 내자 248억환

정강

20만톤

자본, 기술, 미확보

정재계 협조 부족으로

무산

1961. 3

(민주당)

-대한중공업공사 추진

-입지: 동해안

-자금: 외자 3,200만달러

       내자 300억환

선철

25만톤

강재

17만톤

자금부족,정권단명으로 무산

1962. 1

(공화당)

-부정축재자 투자연합이

 서독 dkg그룹과 추진

-입지: 울산

-자금: 외자 3,200만달러

     내자 300억환

강괴

37만톤

 

미국 차관과의 경합으로

무산

1962. 11

-한국종합제철이

 미국투자공동체와 추진

-입지: 울산

-자금: 외자 1억1780만

 달러,내자49억원

강괴

31만톤

내외자 조달 실패로

1963년 6월 설립 주체 해산

1967. 10

- kisa(5개국 8개사)와

  기본협정 체결

-입지: 포항

-자금: 외자 9,570만달러

       내자 3,500만달러

조강

60만톤

ibrd의 경제적 타당성

결여 평가로 외자 조달

에 실패해 계약 해지

1969. 12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이

 만든 계획안으로

 한일 기본협정 체결

-입지: 포항

-자금: 외자 1억 2370만

      달러,내자 633억원

조강

103만톤

-ibrd가 경제적,기술적

 타당성 인정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1970년 4월1일 1기

 설비 착공

 `67년 6월 정부는 관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조강 연산 300만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 월포, 포항, 삼천포, 울산, 보성 중 지원시설과 투자 면에서 가장 유리한 포항을 건설 예정지로 결정했다.

 ‘67년 9월 종합제철 건설사업의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을 선정 했다. 이는 효율적인 내자조달이라는 실무 차원의 고려도 있었 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뛰어난 리더십과 경영 능력을 보유 한 박태준 사장을 위시해 기업체 근무 경험이 풍부한 관리직 사원, 해외연수를 마친 기술직 사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재원확보 계획이 불투명한 상태였지만 ‘68년 4월 1일 34명의 임직원들로 창립식을 갖고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공식 출범하게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의 안정성과 순조로운 건설을 위해 특별법에 의해 정부의 재정지원과 조세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사 형태로 출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포스코는 해외 철강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의 자율성과 조직의 기동성을 보장하고, 철저하게 책임경영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상법상 주식회사 형태를 고집했다.

 `68년 들어서자 kisa와 ibrd로부터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제공에 부정적으로 돌아서자 박태준 사장은 농어업분야 에 사용하기로 돼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아이디어를 구상,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재계를 직접 설득했다.

 결국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고일본으로부터 차관과 기술을 제공받는 방법으로 수정됐고, `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정부가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지원키로 함으로써 본격화됐다.이로써‘70년 4월 1일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조강연산 103만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착공했다.‘71년에 들어서면서 공사가 본격 진행되자 장차 제철소가 완성된 후 조업에 필요한 철광석과 원료탄 문제가 대두됐다. 

일본이 종합상사를 통해 제시한 원료가격은 매우 높은 수준이어서 박태준 사장은 인도, 호주 등지에서 직접 원료를 구매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세계적 제철원료 주산지인 호주의 광산회사를 우선 방문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제 신용도는 매우 낮은 상태였을 뿐 아니라 거대한 광산회사를 설득할 자료라고는, 성토해 둔 부지에 영어로 제선공장(iron making plant), 제강공장(steel making plant), 열연공장(hot strip mill)이라고 큼직하게 쓴 표지판 사진이 전부였다.

포스코는 집요한 설득 끝에 세계적인 철광석 및 원료탄 공급사인 해머슬리(hamersley iron pty.,ltd.), 벨람비(bellambi coal co.,ltd.)로부터 소량을 구매함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동일 조건으로 원료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러한 원료 장기 구매 계약은 제철소 안정조업에 크게 기여 했으며 제1차 석유파동으로 원료가격 폭등은 물론 조달 자체가 어려웠던 위기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1기 건설착공 3년 2개월만인‘73년 6월 9일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 첫 쇳물을 생산하는 역사적인 감격의 순간을 맞이했다. 제철소 건설은 원칙적으로 제품이 생산되는 순서에 따라 제선·제강·압연공장 순으로 건설하는 포워드(forward) 방식을 택하나 포스코는 제품생산공장부터 건설하는 백워드(backward) 방식을 택했으며 생산공정이 짧은 압연 및 제강공장을 먼저 완성 해, 수입한 반제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생기는 이윤을 나머지 공장건설에 투자하면서 제철소를 완성해 나갔다.

-       사상 초유의 대역사, 매기 마다 공기단축

‘81년 2월 18일 조강연산 850만톤 규모의 포항4기 설비종합 준공에 이르기까지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은 규모나 물량, 공사 금액, 기간 등 어느 모로 보나 사상 초유의 대역사의 연속이었다. 

포스코는 주설비 착공 13년만에 910만톤 체제의 대단위 제철소 를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하 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72년 7월 후판공장 가동 이후부터는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매기(每期)마다 공기(工期)를 단축해 왔다.

특기할 일은 260만톤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76년 5월 이후부터 우리의 철강생산 능력이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여 910만톤 체제가 완료된‘83년 5월에는 2배 이상의 조강생산 능력 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기 가동 6개월만인 `73년 말 46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매년 흑자행진을 지속하면서 2기부터 자체자금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설비확장투자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 세계 최신예 광양제철소의 탄생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성공적인 제철소 건설에 고무되어 포항제철소 확장사업과는 별도로 조강 연산 1,000만톤 규모의 제2제철 건설계획을 발표 했다. 

그러나 제4차 중동전으로 인한 석유파동,‘74년 말을 전후한 철강경기 침체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우여곡절 끝에‘78년 10월 제2제철 실수요자가 포스코로 확정되면서 광양에 4기에 걸친 총 1,140만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립이 시작됐다.

특히 포스코는 국내 건설사상 초유인 바다 위에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 겨울바다의 험한 파도, 매서운 바람과 싸우면서도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 역량을 토대로 공기를 단축하고 투자비 를 대폭 절감했다. 또한 동일 설비 및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조업 의 안정성을 도모함으로써 국내 철강자급도 향상은 물론 경영 기반의 조기 구축에 따른 국제경쟁력도 높였다. 

‘92년 10월 2일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함으로써 광양 제철소는 최적의 생산규모를 갖춘 세계 최대의 단일제철소이자 21세기 최신예 제철소로 탄생됐다. 광양 4기의 준공으로 포항제철소는 고급강 위주의 다품종 소량 생산에 치중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 및 냉연제품 위주의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하는 등 양 제철소별 특성에 맞는 제품구성을 추구함으로써 포스코는 인력 및 비용 등 생산원가의 절감과 함께 설비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나.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룬 성공

민족의 염원인 종합제철소 건설은 국내외의 온갖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 여론, 주요 기관들의 잇따른 타당성 부인 등으로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며 시작됐다.

‘68년 11월, kisa로부터 차관도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중 ibrd(세계은행)는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 서를 내 우리나라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 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usaid(미국국제개발처)도‘포항종합제철사업의 확정 재무계획에 대한 분석’에서 ibrd의 평가와 맥을 같이 하는 부정적 의견서를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69년 4월 iecok (대한 국제경제협의체) 총회에 서 굿맨 의장(raymond j. goodman) 도 한국의 제철사업은 중단 기 외채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외화의 획득분보다 상환부담이 더 커서 국내 자본 축적을 해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kisa를 통해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박태준 사장은 차관 교섭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소위‘하 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64년 한일국교정상화 협상 과정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잔액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태준 사장은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선생과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한일문화협회 이사장을 만나 협력을 요청하고 이들의 소개로 일본철강연맹 이사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야와타제철 사장,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후지제철 사장, 아카사카 다케 시(赤坂武) 일본강관 등 철강업계 지도자들을 만나 부탁했다.

박태준 사장은 이와함께 지바 사부로(千葉三郞) 전 노동상, 이치마다 히사토(一萬田尙登) 자민당 해외경제협력위원장, 다카 스케 신이치(高杉晋一) 해외협력기금 총재, 기무라 도시오 (木村 俊夫) 관방 부장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우에무라 고고로(植村甲午郞) 경단련 회장, 야마구치 에이지(山口英治) 경단련 전무, 아이치 기이치(愛知揆一) 외상,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대장상,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會根康弘) 운수상, 가야 오기노리(嘉屋興宣) 전 대장상 등 당시 일본 정계와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전현직 관료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국내 여론도 반대수위가 높았다. 국내 일부 언론은 제철소 건설사업은 외자 부담이 크고 생산비가 높기 때문에 수입강재를 쓰는 것보다 국민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되고, 결국 종합제철은 거대한 부실 기업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농촌 출신 국회의원의 80%도 농수산 부문 개발 용도로 사용 될 자금이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되면 자신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 회담에서 일본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됐으 며,‘70년 착공에 이어‘73년 7월 3일 성공적으로 일관 제철소를 준공함으로써 국내외의 온갖 반대와 우려를 불식시키고 국가 산업 육성의 버팀목으로 그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이 최초로 거론된 시기는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한창 건설되고 있던‘72년 2월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경기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75년에 이를 일단 백지화 했으며‘77년에 제2종합제철 건설을 다시 추진하게 된다.한 민간기업은 중소 규모의 철강사를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제철 사업 추진을 시도했다. 

때문에 당시 실수요자로 이 민간기업이 선정되리라는 전망이 무성하게 나왔지만 박태준 사장은 제철업을 민간기업에 맡기면 부의 편재가 극심하게 되고, 부실화하면 포스코가 떠맡을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국민경제에 큰 부담을 안겨줄 수 있음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역설해 결국 포스코가 실수요자로 선정된다.

이로써 그 동안의 기술축적, 차관선과의 유대, 원료 공급선의 확보, 중복투자 방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울러 기존 포항 공장과 설비상의 상호보완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됐다.

제2제철은 사업자 선정과 더불어 입지 선정에도 논란이 심했다. 경북 영해를 비롯해 아산만,가로림만 등 여러 후보지가 검토됐으 나‘81년 11월 광양만의 바다를 메워 제철소를 건설하자는 포스 코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오늘날 광양제철소가 탄생하 게 됐다.

다. 탁월한 리더십, 창업이념은 글로벌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승화

포스코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자본은 물론 기술, 경험, 자원 등 철강업 육성을 위한 어느 하나의 조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 에서 양질의 철강재를 생산해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의지 하나로 매진한 결과물이었다. 

최고 경영자로서 박태준 사장(現 명예회장)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포스코 내외부의 도전을 소화하고, 제철보국의 기업이념 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는 공사현장을 둘러 본 박정희 대통령이‘남의 집 다 헐어 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근심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박태준 사장을 위시한 전 임직원들은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지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우향우하여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 각오까지 했다.

여기서 유래한‘우향우 정신’은 당시 포스코인들의 각오를 담은 표현으로, 몇 사람의 사표나 희생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거대한 역사적인 작업에 동참했던 자부심, 자신들을 다스리는 채찍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현장에 투입시켜 공기를 성공적으로 만회했으며, 이 같은 정신과 노력으로 103만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39개월 만에 준공했다.

제철소 공기 단축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 집념, 열정과 함께 그만큼 원료 재고비용을 절감해 현금흐름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임직원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지로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건설하던 제철소를 포스코는 2~3년만에 건설했다. 따라서 1기 건설에 소요된 톤당 투자비도 다른 회사의 톤당 500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인 26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전통은 광양제철소 건설에도 지속 이어졌다.

박태준 사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특히 회사 창립초기 제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주택단지 부지 를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인 주거안정 정책은 우수인력을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태준 당시 사장은“직원들의 주거가 안정되어야 정상적인 회사 업무가 가능하며, 장기간의 건설기간 동안 안심하고 현장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택과 자녀교육 문제까지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자가주택 제도를 도입했다.`69년 당시 ibrd 실무자로서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부정 적인 보고서를 내 kisa를 와해시킨 당사자였던 자페 (j.jaffe)와 인연도 유명하다. 

`86년 4월 박태준 회장이 iisi총회를 마치고 런던에서 자페를 초청해“지금도 당신의 그 보고서가 옳다고 믿느냐”고 질문하자 자페는“현재도 그 보고서가 옳지만 박태준 회장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여 보고서를 틀리게 했다”고 답변했다.`88년 포스코를 방문한 자페는 포스코의 성공요인으로 지도자 의 끈질긴 노력, 설비구매의 효율성, 낮은 생산원가, 인력개발, 건설기간의 단축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철 회장 에게“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 가“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기도 했다.

이와 같은‘우향우 정신’과‘제철보국’의 전통,‘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도전정신, 책임의식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은 글로벌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지금도 면면히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다.

라. 정부, 기업, 국민이 합심 노력한 성과

포스코의 탄생과 성장은 조국근대화라는 국가적 비전과 강력한 실천의지를 가진 최고 통치권자, 최고 경영자,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을 핵심산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65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자금과 기술지원의 필요성을 역설 하는 등 외교 무대에도 직접 나섰다. 또한‘철강은 국력’이라는 신념 하에 일관제철소 건설과 육성을 지원코자‘70년‘철강공업 육성법’을 제정했다.

특히‘68년 11월 제철소 부지 조성공사 현장을 처음 시찰한 이후 11년 동안 무려 13차례나 포스코를 방문했던 박대통령은 각종 인사청탁 등 정치권의 압력을 원천 봉쇄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당시 설비 및 원료 구매와 관련된 여러 업체들이 구매에 개입 하기 위해 유언비어와 역정보를 퍼뜨리는가 하면 정치권도 설비 구매시 일정률의 리베이트를 요구하는 등 국내적으로 심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박태준 사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대통령은 후일 소위‘종이마패’로 불리운 이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 외부압력을 차단해주는 등 포스코의 출범과 조기정착을 위해 모든 정치적·행정적 지원과 신뢰를 보여줬다. ‘73년에는 제철설비중 최첨단인 포항 1연주공장 설비구매시 국제입찰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푀스트가 공급사로 선정됐으나 국제 설비 브로커의 모함으로 박태준 사장이 약 4개월에 걸친 수사당국의 조사 및 가택수색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무고함이 밝혀지자 박태준 사장은 고귀한 민족자산을 건설하는 데 브로커의 농간이나 정치권력의 개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로 사의를 표명하는 등 단호하게 대처했다. 박 대통령도 사안의 중대성을 보고받은 후 관련인사들을 호되게 문책했다.

포스코의 탄생은 총체적이고 자주적인 정치외교 역량의 결집 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기술 문제 해결을 위해 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 등 일본의 철강 3사를 방문해 경제 및 기술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 정부 각료와 유력인사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는 등 공식· 비공식으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포스코 탄생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또한 자립경제를 향한 국민적 열망은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 자치단체, 정부 산하기관들의 아낌없는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 내게 했다.이처럼 정부·기업·국민의 합심, 노력은 일관제철소 건설 이라는 소중한 결실을 이끌어 냈으며 출범 당시부터 숱한 어려움 에 직면하면서도 포스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2. 한국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버팀목

 가. 수요산업 경쟁력 강화로 산업화 기틀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생존 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대외 수출 진흥이었으며 이러한 전략의 성공 여부는 철강산업의 발전에 달려 있었다.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중화학공업에 투입되는 기초소재를 공급해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1차 산업 중심에서 2차 제조업 중심으로,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중심으로 변모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75년 경공업 54.1%, 중화학공업 45.9%에서‘90년 경공업 34.5%, 중화학공업 65.5%로 성장, 이러한 산업 고도화 과정에서 포스코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국내산업이 점차 고도화됐지만 철강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80년 4.5%,‘03년 3.7%로 여전히 우리나라 산업발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자동차, 조선, 가전, 건설 등 철강 수요산업은‘80년 16.6%에서‘03년 28.6%로, 철강 관련산업 전체적으로도‘80년 21.1%에서‘03년 32.3%로 증가하여 국내 산업의 발전에 지속적인 기여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철강산업은 가치창출 면에서도 높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국내 총부가가치 창출액(gdp에 해당)에서 철강산업의 비중은‘80년 1.5%에서‘03년 1.7%로 상승했다. 이는 포스코가 전체 산업에 비해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를 더욱 빨리 진전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철강산업의 국민경제 비중추이]                                    (단위 : %)

구  분

생산

부가가치

1980

1990

2000

2003

1980

1990

2000

2003

농림수산업

8.3

5.1

2.7

2.3

14.7

8.1

4.0

3.0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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