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이래 60년 넘게 유지돼 왔던 구씨(lg)와 허씨(gs) 가문의 모범적 동업자 관계에 ‘빨간 불’이 켜졌다. gs그룹이 무역업체인 쌍용을 최근 인수하면서 lg와 gs 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5년 전 계열분리를 하면서 “상대방의 사업영역과 겹치는 부문에는 뛰어들지 않겠다”는 이른바 ‘신사협정’을 맺은 바 있다. 실제로 계열분리 이후 두 그룹은 무엇보다 상대방의 사업영역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왔고, 재계에서는 두 그룹의 아름다운 동업자 행보에 큰 관심과 경외감을 나타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이번 인수건으로 5년여를 유지해 오던 ‘신사협정’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약속을 먼저 파기한 gs그룹의 부담도 적지 않을 뿐더러, 신사협정이 일방적으로 깨진 데 따른 lg그룹의 불편한 심기가 과연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도 관심거리다. 최근 대우건설을 비롯해 대규모 인수합병(m&a) 물건이 넘쳐나고 있어 과연 lg그룹과 gs그룹이 어떤 스탠스를 보일지, 어떤 사업영역에 경쟁을 하게 될지,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lg 구씨 가문과 gs 허씨 가문의 동업은 우리 재계에서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동업자 외길만으로 반세기 넘게 함께했다는 것은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네 구멍가게도 반세기 동안 동업하기 쉽지 않은 마당에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키워온 구씨와 허씨 가문의 만남은 재계사에 길이 남을 족적임에는 분명하다.
“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이는 동업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나 친구간이라고 해도 결국 의를 상하게 갈라지게 되는 것이 바로 동업이 가진 한계라면 한계다.
하지만 예외도 있는 법.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이같은 세인의 편견을 과감히 깨뜨렸다. 창업 1세대인 구인회 창업회장과 허만정씨에서 시작된 두 그룹의 인연은 오랜 세월 함께해 왔다.
아름다운 동업자 구씨와 허씨 가문
하늘 아래 불변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일까. 단단한 동업자 정신을 보였던 구씨와 허씨 가문은 지난 1999년부터 분리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구씨·허씨 가문 60년 넘게 모범동업…기업분할 때도 동업정신 살려 ‘신사협정’
동업청산 마지막 단계였던 ‘신사협정’ 보호기간 실효 다해 생존경쟁은 불가피
두 그룹 동업자 관계 청산하는 기폭제는 lg의 대우건설 인수 여부로 결판날 듯
창업주들이 투자했던 지분율에 따라 구씨 65%, 허씨 35%의 비율로 재산분배 및 계열분리가 이뤄졌고, 그 결과 3대인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허창수 gs그룹 회장에 이른 지난 2004년에 57년간의 동업자 관계를 청산했다.
그럼에도 잡음 한마디 나온 것이 없었다. 세인들이 놀랄 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업 반세기, 구씨와 허씨 두 가문은 lg그룹을 국내 굴지의 그룹 반열에 올려놓은 후 기업분할을 통해 각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면서도 lg그룹과 gs그룹은 새로운 동업자상을 제시했다. 바로 서로의 사업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굳은 언약, 이른바 ‘신사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구씨 가문이 이끄는 lg그룹은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텔레콤 등 전자·석유화학·이동통신을 중심으로 한 사업군을 맡았다. 허씨 가문이 이끄는 gs그룹은 gs칼텍스와 gs건설, gs홈쇼핑 등 정유·건설·유통을 중심축으로 한 사업군을 이끌면서 각각 재계에서 일정부분 영역을 구축했다. 물론 두 그룹이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분리 이후 5년여 동안 변함없이 지속돼 왔다.
실제로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2005년 2월 gs의 새로운 기업 이미지(ci)를 발표하면서 “lg그룹과의 57년간 동업정신을 살려 긴밀히 협력하고 lg의 사업영역에는 진출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기조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면서 재계의 관심이 온통 lg그룹과 gs그룹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신사협정’이 깨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gs그룹, 5월에 lg그룹 사업영역인 종합상사 ‘쌍용’ 인수…약속 먼저 파기해 부담
범lg계 lig, 건설회사 ‘건영’ 인수로 gs건설 위협…gs칼텍스는 2차전지 사업 진출
태양광 사업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 충돌 가능성 다분…두 그룹 영역다툼은 시간문제
물론 두 그룹이 맺은 협정이라는 것 자체가 문서로 명문화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법적 효력은 더더욱 없다. 그저 구 회장과 허 회장 일가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동업과정에서 쌓아놓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한 약속 내지는 묵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신뢰에 기초한 묵계가 창업세대 이래 구씨와 허씨 가문의 돈독한 동업자 관계를 존속시켜준 버팀목이었다는 점에서 법률 이상의 효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 못한 사실이다.
재계에서는 정확히 신사협정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아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대내외 적으로 알려진 5년이라는 기간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이제 서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제 사실상 동업관계 청산의 마지막 단계였던 ‘신사협정’에 따른 보호기간마저 사실상 실효를 다해가고 있다는 것. 이제 각자 정말 피말리는 생존경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협정 뒤로하고 각개전투 시작?
lg그룹과 gs그룹은 표면적으로 신사협정을 통해 상대방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겨왔다. 하지만 실상은 서로의 영역에서 사업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lg는 2005년 경기 광주 곤지암cc 근처에 곤지암 리조트를 건설하고 리조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gs는 강원도 춘천의 엘리시안 강촌리조트, 제주도의 엘리시안cc를 운영하면서 일찌감치 리조트 사업을 하고 있다. 문제는 지역적으로 겹치지 않은 데다 매출비중이 크지 않아 사실상 영역침범으로 해석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 5월 gs그룹이 종합상사인 쌍용을 인수한 것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해석된다. 설상가상 lg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 신사협정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재계일각에서 제기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재무구조 개선 차원에서 매입했던 대우건설을 그룹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해 다시 매각키로 하면서 유력한 인수후보로 lg그룹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범lg계인 lig가 건설회사인 건영을 인수한 것을 비롯해서 gs칼텍스의 2차 전지사업 진출 등 이미 여러 차례 신사협정에 균열 조짐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lig의 건영 인수는 gs건설을 위협하는 결과가 됐고, gs칼텍스의 2차전지 사업 진출은 결국 lg화학의 사업영역을 침범한 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같은 사업영역 충돌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재계에서는 태양광 사업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의 충돌 가능성이 다분해 두 그룹간의 영역 다툼이 본격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57년 동업자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최근 이같은 기류변화에 대해 lg그룹과 gs그룹은 비슷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진화에 나서고 있다. 오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사협정 기간도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양 그룹이 서로의 주력사업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인 것이다.
lg그룹 관계자는 “시장에서는 신사협정 기간을 5년간 유지키로 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처음부터 기간을 정해두지 않았다”면서 “대우건설 인수설도 이미 사업 포트폴리오가 정해져 있는 만큼 건설업 진출에 관심이 없다”고 건설업 진출 가능성을 일축했다.
gs그룹 관계자도 “앞으로도 허창수 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상호 협의 하에 사업영역 진출을 조절할 것으로 안다”면서 동업자 정신이 지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두 그룹 모두 신사협정 파기설을 일축하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lg와 gs가 스스로 사업영역을 옥죄는 현재의 신사협정을 어떤 식으로든, 언젠가는 파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동업정신이 과거보다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고, 기업이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 주력분야에서의 특화된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사업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 만큼 영역간 충돌은 불가피하고, 이 경우 신사협정을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에서는 gs그룹의 주력 사업군인 건설과 유통의 경우 현금 유동성이 높다는 매력이 있는 만큼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lg그룹과 중첩된 사업군에 진출이 가능하고, lg그룹 역시 매력있는 gs의 사업영역에 뛰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lg의 대우건설 인수, 신사협정 분수령
lg그룹과 gs그룹의 해명에도 불구, 재계에서는 지난 2004년 7월1일 기업분할 당시 향후 5년간 서로 주력사업에 진출하지 않겠다며 맺은 신사협정이 이달 말로 종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신사협정은 비단 lg와 gs그룹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lg그룹의 방계기업인 ls그룹과 lig그룹도 포함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결국 신사협정 종료로 두 그룹의 사업영역 진출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고, 상대방의 영역에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그 신호탄이 gs그룹의 쌍용 인수. 재계에서는 사실상 신사협정의 효력정지를 뜻하는 것으로 향후 두 그룹 간에 펼쳐진 사업영역 침범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gs는 쌍용의 주된 취급품목이 철강과 시멘트이고 향후에는 에너지·유통·건설 등 기존 gs의 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해 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lg의 주력인 전자와 화학을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lg상사와는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lg그룹과 gs그룹이 그동안 쌓아놓은 동업자 관계를 청산하는 기폭제는 바로 대우건설 인수에서 결판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내놓은 대우건설을 lg가 인수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대우건설 인수 1순위 후보로 lg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lg그룹에서는 공식적으로 대우건설에 관심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산업은행이 lg그룹에 대우건설 인수 의향을 타진했다는 소식이 업계에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인수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
실제로 범lg가인 lig는 지난 2006년 건영을 인수해 lig건설로 사명을 바꾼 바 있다. gs건설을 보유한 gs그룹으로서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gs건설이 올린 6조8000억원의 매출 가운데 20% 가량인 1조2000억원이 옛 lg그룹 계열사인 물량이고 보면 lg의 건설업 진출은 gs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lg가 대우건설을 인수하지 않더라도 자회사인 서브원 등을 통해 건설업에 진출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하고 있다. 서브원의 사업정관에는 건설업이 포함돼 있어 이같은 관측에 무게를 싣고 있다. 서브원에서도 내부적으로 건설업 진출을 고심중으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서브원은 lg그룹 내 공장·사무실·건물 등에 대한 리모델링 사업이나 대리점 인테리어 공사 등 소규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lg측은 서브원이 감리 등의 업무를 시작하면서 이와 관련된 컨설팅을 몇차례 받아 그것이 와전돼 건설업 진출 이야기가 불거진 것으로 건설업체 인수나 건설사업 진출은 검토조차 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때문에 정말로 lg가 건설업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의문이 가시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
lg, 건설·유통 진출시 gs 영역침범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2007년에 “lg가 영원히 건설업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안 하는 분야에 참여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긴 바 있다.
lg로서도 마냥 건설업 진출을 미루고만 있을 수도 없다. 자체 건설 물량만도 1조∼2조원에 달하는 lg로서는 대우건설이 아니더라도 건설업에 진출할 필요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 이미 중견 건설사 몇 곳에서 lg에 매각의사를 타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매매가 체결되는 순간 lg와 gs의 굳은 신사협정은 깨질 수밖에 없다.
lg그룹은 gs와 계열분리한 데다 현대차그룹과 sk의 약진으로 재계 순위가 2위에서 4위로 내려앉았다. 재계 순위의 원상복귀를 위해서라도 lg는 새로운 성장동력과 ‘캐시카우’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는 결국 돈 되는 사업의 진출로 귀결되고 그 경우 유동성이 풍부한 건설이나 유통사업 진출이 우선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gs의 사업영역 침범이 된다. 때문에 이달 말로 종료되는 신사협정 이후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구 회장이 신사협정 종료를 계기로 본격적인 신성장 동력 창출에 방점을 찍고 공격경영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gs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에 주력할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zizi83@naver.com























